[골프타임즈=정병국 작가] 기차가 가평역에 도착했을 때 잠에서 깨었다.

복잡했던 객실이 한산해졌다. 승객들이 떼 지어 역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은영은 저들과 함께 역 밖으로 나가고 싶은 강한 유혹을 떨쳐냈다.

스물아홉의 자유분방한 인석 오빠의 팔이 어깨를 감쌌다.

“복잡하게 생각할 거 하나도 없어. 어차피 인생 자체가 연극이잖아.”

은영은 그의 말을 받지 않았다. 어깨를 감싼 팔에서 전해져오는 그의 체온을 느끼며 차창 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너답지 않게 왜 그래? 우린 애당초 결혼을 전제로 한 만남이 아니잖아.”

은영은 오른쪽 가슴에 걸쳐 있는 그의 손을 살짝 밀어냈다. 지금 이 순간에는 그의 손이 싫었다. 두 겹의 옷과 얇은 브래지어가 젖을 감추고 있었지만, 알게 모르게 가해지는 그의 손가락 장난이 짜증스러웠다.

“곧 춘천이야. 제발 부탁인데… 우리 부모님이 눈치 못 채게 행동해 줘.”

은영은 그의 어깨를 감싼 팔을 밀어냈다.

“이건 지나친 기만이야.”

은영은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어머니와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렸다. 은영은 요즘 자신에게 놀라고 있었다. 독신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현실로 옮겼기 때문이었다.

지난해 여름, 어느 날 새벽이었다. 그날은 평상시보다 일찍 깼다. 그때 문득 독신이 편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샤워한 후 출근을 서두르며 정말 독신이 가능할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고민은 한동안 계속됐다. 독신을 결심한다 해도 집에서 나오는 것 또한 문제였다. 이제 스무 두 살의 딸년을 어느 부모가 독신으로 살아가도록 독립시켜 주겠는가.

“무슨 생각을 하니?”

인석 오빠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는 독신주의 신봉자였다. 남자나 여자나 결혼의 굴레에 칭칭 감겨 허덕이는 꼬락서니를 볼 때마다 한심하다고 했다. 자기는 자유스러운 삶을 만끽하며 편안하게 살겠다고 했다.

그때 은영은 물었었다. 미치도록 사랑하는 여자가 생기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사랑하는 여자를 독신주의로 만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했다.

은영은 그의 대책 없는 대답에 엉뚱하게도 섹스를 떠올렸다. 유부녀도 유부남도 아닌 독신주의자들의 성생활은 말 그대로 자유의 선택이 아닌가. 몸과 마음이 끌리는 상대방과 거리낌 없는 육체의 향연을 열면 된다. 그녀는 얽매이지 않는 성의 자유스러움을 상상하며 묘한 흥분을 느꼈다.

그날 인석 오빠에게 몸을 허락했다. 독신의 결심을 남자에게 안기는 것으로 시작한 은영은 성의 첫 밤에서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사랑하지 않는 남자, 그냥 인상 좋은 남자일 뿐인 그와의 잠자리는 그렇게 시작되어 지속했다.

“아까보다 더 심각한데… 왜 그래?”

그가 다시 물었다.

은영은 대답 대신에 웃으며 물었다.

“우린 어떤 관계야?”

그가 어이없다는 눈길을 던졌다.

기차는 왼쪽으로 강을 끼고 달렸다. 한 무리의 청둥오리가 먹이를 찾아 자맥질하는 강은 검푸른 색깔이었다.

“우리는 오직 욕구 해소의 파트너, 그거지?”

“단순하게 생각해. 복잡하게 생각해본들 골치만 아파.”

“우리의 섹스만큼 더 단순한 관계가 또 있을까?”

“설사 그렇다 해도 그걸 꼭 꼬집어 얘기해야 하니?”

“그건 오빠 말이 맞아.”

은영은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그와의 관계를 따지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서로가 필요할 때 만나고, 필요 없으면 헤어지는 관계에다가 의미를 붙이려 하는 것은 바보짓이었다.

“인석 오빠 부모님이 날 마음에 들어 하면 어떻게 해?”

은영은 기분을 전환하고 싶어 그를 자극했다.

“꿈도 야무지다.”

“내가 어때서?”

“넌 며느릿감이 아냐. 적어도 두 분의 눈에는.”

“자신 있어? 그 말이 확실하다는 거.”

은영은 그가 미쳐 대답을 하지 못하자 깔깔거렸다.

“있잖아.”

은영은 애교를 떨었다.

“마치 시부모님 될 분들께 인사하러 가는 기분이야.”

“너 끝까지 까불래?”

그가 화를 냈다.

“왜 이래? 난 지금 내 기분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데.”

“은영아! 너 날 죽일 일이라도 있니?”

은영은 그가 필요 이상으로 흥분하자 불쾌했다. 여자로서 최소한의 위치마저 무시당하는 기분이었다.

그가 춘천행을 부탁했을 때 거절하지 않았던 것은 순전히 여행 때문이었다. 그의 부모가 성화를 부리는, 결혼 독촉의 입막음 역할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다. 언젠가 친구들과 몰려와 법석을 떨었던 호숫가에서 주말을 보내고 싶어서였다.

“그렇게 불안해?”

“그래. 널 믿지 못하겠어.”

“그럼 안 가면 되잖아.”

은영은 앞의 빈자리로 옮겨 마주 앉았다.

“왜 날 못 믿어?”

“넌 속셈을 알 수 없는 오리무중의 여자애니까.”

“오리무중의 여자애?”

은영은 그의 말을 되받았다.

“아니니 그럼? 넌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을 쉽게 하잖니.”

“예를 들면?”

은영은 상체를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눈에 시선을 못 박았다.

“독신주의.”

“그게 왜?”

“넌 아직 어려. 어린 게 독신주의가 좋다고... 그만두자. 하여간 넌 이해하기 곤란한 여자애인 것만은 확실해.”

은영은 그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자 까르르 웃었다.

“잘 됐다! 정말 내키지 않은 동행이었는데… 서울서 봐. 기회 닿으면.”

은영은 핸드백을 챙겼다. 기차는 춘천역으로 진입하며 속도를 죽이고 있었다.

정병국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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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병국은...
도서출판 ‘지식과사람들’ 및 문예계간 ‘시와 수상문학’ 발행인. ‘문예창작아카데미’와 스마트폰 전자책문학 ‘파란풍경마을’을 운영하고 있다. 정병국 性풍자 콩트는 매주 화요일 연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