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박하 작가] “부장님, 그런데 말입니다. 혹시 그렇게 유명했던 현인 선생을 기념하는 어떤 모임이라도 있나요?”

구본하는 노골적으로 덤벼드는 여향미의 축축한 눈길을 피하기 위해 짐짓 옆길로 빠진다.

“…….”

“아, 현인 선생은 없나 보군요. ‘100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가수’로 일컬어지는 배호는 그를 기념하는 전국 모임이 있습니다. 매년 11월초마다 배호와 그의 모친이 잠들어 있는 경기도 양주군 신세계공원묘지에서 열립니다.”

“…….”

하지만 여향미는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배호가 무슨 대수냐는 투다.

이번에는 아예 한 술 더 뜬다. 생각지도 않게 여향미가 뜬금없이 구본하의 옆자리에 와 앉는다.

“어, 부장~ 님!?”

구본하가 반사적으로 몸을 피하며 엄살을 떤다. 어이없게도 여향미의 몸이 구본하에게 덥석 실려 왔기 때문이다.

출렁이는 여향미의 젖가슴이 묘한 여운을 남긴다. 기이하게도 피아노 라단조 음의 느낌이다. 아직까지는 감흥이 없다는 뜻일 게다.

‘이것은 명백한 성희롱이야. 고소하고 말 거라고!’

그러나 속으로만 외칠 뿐이다. 입 밖으로 어떠한 말도 나오지 않는다. 불현듯 아주 짧은 순간 아랫도리가 벌떡 고개를 든다. 순식간에 좀 전과 달라진 자신이 가소롭다. 오랜만에 대하는 여인의 체취가 이상할 만큼 푸근해지는 이율배반이 가증스럽다. 속 다르고 겉 다른 놈이 맞다.

구본하는 짐짓 형식적인 예의라도 갖추자는 뜻에서 몸을 뒤로 뺀다. 여향미의 굴곡 있는 앞가슴이 슬쩍 패를 내민 탓이다. 사내들이란 그런 틈을 잘 노린다. 구본하 역시 젖무덤의 미끄럼틀을 보고 잠시 눈이 어찔하다. 차려 자세로 버티던 신경 조직들이 서서히 반란을 일으킬 조짐까지 보인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큰일이다.

‘이럴 때 긴 머리가 나타나 훼방을 놓으면 얼마나 좋을까, 빌어먹을.’

하지만 긴 머리는커녕 주인 여자도 약속이나 한 듯이 사정권에서 짐짓 벗어나 있다. 여향미가 먼저 같잖은 놈에게 노골적으로 접근했다는 점이 그들의 기분을 상하게 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여자의 자존심을 깬 데 대한 일종의 분노 표출이 아닐까. 별의별 잡념이 다 고개를 내민다.

도도하고도 고급스런 향수 내음이 코를 찌른다. 죽어 있던 신경들을 급작스럽게 두들겨 깨우는 그 어떤 마력으로 보면 아무래도 오리엔탈 노트 같다. 머스크 향이나 앰버 향이 있는 동물 계열의 향기에 바닐라 향을 적당히 가미한 향기다.

아무래도 따뜻한 느낌이 들고, 진하면서 지속력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리엔탈 노트가 분명하다. 구본하는 확신한다. 한때 화장품 회사를 취재 다니면서 얻어들은 것이 그를 제법 괜찮은 수준까지 끌어올린 셈이다.

결국 여자의 향수는 남자에게 총칼이 될 수도 있다. 향수는 체온에 의해 자신의 체취와 합쳐져 냄새가 나는 법이다. ‘향수는 키스를 해주었으면 하는 곳에 뿌리라’는 코코 샤넬의 말이 문득 구본하의 머리를 스친다. 여향미는 특이하게도 목덜미에서 향이 진하다. 여향미가 은밀히 바라는 곳은 목덜미인 모양이다.

성감대가 겨우 목덜미라니? 바이없이 웃음마저 발끈한다. 구본하는 자신을 간신히 타일러 가라앉힌다.

가장 지치기 쉬운 것이 후각이 아니던가.

‘금세 가라앉으리라. 자식, 쓸데없이. 인마, 이 여자는 연상이라고! 그리고 직장 상사이기도 하고….’

‘연상의 여자가 더 편한 법이라고? 자식, 합리화시키지 마!’

‘잘못하다가는 네 모가지가 사라질 수도 있어. 이 여자의 애인은 너에겐 하늘이야.’

‘어서 도망가지 못해? 너를 테스트하는 거라고. 이 멍청아. 바보, 얼간이, 쪼다!’

그런데도 끄떡없다. 온갖 엄포를 다 놓았는데도 도리어 샘물처럼 더 솟는다. 무수한 생각들이 서로 조직을 결성해 한창 전투 중이다. 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여향미의 손길이 마냥 집요하다.

그녀의 고운 손길이 뜨거운 장소로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다. 손을 델 수도 있는데 겁이 없다. 이제 불장난을 막 시작한 바보 같은 소녀처럼 맹목적이다.

구본하는 무의식중에 기어오는 여향미의 손을 움켜잡는다. 지나치게 따스하다. 나이답지 않다. 미소녀의 것처럼 부드럽다. 애당초 뿌리치자는 속셈이었는데, 놈이 말을 안 듣는다. 쿠데타를 바라는 나쁜 생각들이 이미 요새를 점령했으니 난공불락이다. 착한 놈들은 벌써 난자당한 지 오래다.

참으로 웃기는 동물이 남자라고 아무리 상투적이라며 욕해도, 그 진리는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그래서 예부터 할머니가 손녀들에게 전해 주길 “애 늙은이 할 것 없이 남자란 조심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되뇌었으리라.

구본하는 스스로 생각해도 약해지고 있는 자신이 어이없다. 아무리 유혹해도 무너지지 않으리라 자신만만했던 존심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다. 여향미에게는 어떠한 여육(女肉)의 징표도 맡을 수 없었는데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한번 빠져든 무아경에서 헤어나는 것이 마냥 쉽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여향미와는 이미 오래 전부터 편안한 관계를 지속해 오고 있었다. 10여 년 전부터 주간지를 만들어 온 구본하는 여향미와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 사이를 편안하게 연결해준 고리는 겨우 영화나 연극 초대권이었다.

그 당시 경리부 과장이던 여향미는 문화생활에 흠뻑 빠져 있었다. 테니스를 일찍 시작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름대로 문화 특유의 향수를 맛볼 줄 아는 여자였다. 물론 그 역시 일종의 열등감에서 비롯된 일탈일 수도 있다. 재수생 아이들이 두꺼운 책을 들고 대학가에서 폼을 잡는 격이다.

주간지 팀장인 구본하에게는 각종 문화 공연 티켓이 무수히 쏟아져 들어왔다. 영화사나 공연 단체에서 홍보 차원으로 보내는 공짜 표였다. 영화를 담당했던 구본하는 어떨 때는 초대권을 2000장까지 얻는 경우도 있었다.

문제는 여향미가 그 냄새를 어떻게 맡았느냐는 데 있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주변에는 그녀의 편이 늘 넘쳤으므로 그 정도는 식은 죽 먹기였다.

게다가 여향미는 이미 본지 문화부 기자들로부터 각종 티켓을 공급받고 있었다. 일종의 상납인 셈이다. 경리과장과 기자? 아무리 뜯어보아도, 어떤 관계도 성립되지 않을 듯싶은 물과 기름이 아니던가.

하지만 여향미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자신이 이용할 만한 사람들을 잘 포섭했다. 비록 자신의 것이 아니더라도 신문사의 돈을 쉽게 주물럭거리는 힘은 타인에게 언뜻 위압감을 주고도 남는다. 실제로 여향미는 자신만의 그런 능력을 곧잘 써먹었다.

그녀에게는 의외로 그럴 만한 필요충분조건이 잘 갖춰져 있었다. 허수아비로 앉아 있는 경리부장보다도 더한 실세가 바로 여향미였다. 편집국, 출판국, 사업국, 광고국, 판매국 등 어느 부서나 돈과 관계된 것이라면 그녀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마치 자기가 사장이라도 되는 듯이 각 부서에서 올라오는 돈과 관련된 기안은 습관처럼 칼질을 해댔다. 웬만하면 회사에서 지출하는 돈은 거의 다 깎았다. 그러니 그녀 앞에서 꼬랑지를 내릴 수밖에 없다.

구본하 역시 마찬가지였다. 주간지 팀장으로 해외출장비, 사진대, 식대 등 부서 살림 기안을 맡았기 때문에 부득불 잘 보이려고 애썼다. 같잖아도 피할 수 없는 일종의 로비였다. 그나마 그에 딱 맞은 것이 바로 초대권이었다.

그는 결국 그녀에게 초대권을 무차별적으로 살포했다. 다행히 나이가 6살이나 어린 덕분에 적당히 애교도 떨면서 친분 관계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더욱이 두 사람 다 결혼하지 않은 점도 많은 작용을 했다. 서로 미혼이란 점은 상대에게 그만큼 부담을 덜어 주게 마련이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의 수도 있다.

구본하는 그런 그녀의 뒤에 진정한 실세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챘다. 회사의 막강한 권력을 쥔 박철수 기획실장이다. 창업주의 외가 쪽 사람인 박 실장은 상고밖에 안 나왔지만 머리 회전력이 빨랐다. 더구나 외가 집안의 사위인데도 그에게 주어진 임무, 그리고 그가 휘두르는 칼과 펜은 막강했다. 심지어 어떤 면에서는 사장을 능가하는 파워를 지닌 그였다.

그는 비편집 출신인 탓에 편집국을 쉽게 장악하지 못했지만 점차 그 방면으로 영역을 넓혀 갔다. 문제는 편집국 안에 있었다. 남보다 빨리 편집국장이 되고 싶은 꿈을 가진 일부 기자가 그에게 남몰래 아부를 떠는 것이었다. 구본하는 그 사실을 간파한 이후, 아주 어쩌다 기자들을 대하는 그의 비굴한 미소를 발견하곤 했다. 그것이 열등감의 발로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아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런 배후에는 노조가 단단히 한몫하고 있었다. 노조위원장은 모두가 우연찮게 짜 맞추듯이 편집국 출신들이 차지했다. 거기에는 엄청난 함정이 숨겨져 있었다. 만약 비편집 쪽에서 노조위원장이 나올 경우 그 후유증이 실로 심각했으므로 운명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편집국 출신이 위원장을 맡아야 어용노조 활동이 가능했고, 그런 위선은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슬몃슬몃 노조원들을 속였다. 노조위원장을 비롯한 노조 간부들에게 자칫 말을 함부로 했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박철수의 레이다망에 포착됐다.

이른바 파괴적인 비편집에서 노조의 실권을 틀어잡으면 큰일이 날 수밖에 없다. 회사 입장에서 볼 때 한마디로 귀찮은 존재가 되고 만다. 실제로 몇 년 전 비편집에서 후보가 나왔을 때, 계획적으로 당선을 방해한 사건이 있었다. 이 배후에는 당연히 박철수가 개입되어 있다. 선거에서 패한 공무국 출신의 위원장 후보는 끝내 직장을 그만두고 말았다.

그토록 안하무인격인 박철수에게 맞서는 유일한 사람은 이병채 상무밖에 없었다. 이병채는 대쪽 같은 성질을 가진 공채 1기생 출신으로 형편없던 무명 신문사를 오늘의 굴지 언론사로 키운 일등공신이다. 경제 방면에 박식한 이 상무는 각종 텔레비전에 나가 명성을 날리면서 덩달아 신문사까지 간접 홍보를 한 것이다. 말 잘하는 똑똑한 사람이 있는 신문사라면 그 신문도 괜찮을 것으로 보는 사람들의 판단이 어느 정도 적중한 것이다.

시기와 질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 사실을 믿지 않았지만 구본하는 그것을 입증할 수 있다. 이병채 상무와 함께 창업주 책과 사보 창간 작업을 했던 구본하는 그것을 간접 경험했다. 이따금 이 상무와 함께 식사하거나 등산하면 그의 인기도를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보통의 사람들마저 그가 지나가면 손가락질을 할 만큼 유명인사가 되어 있던 이 상무였다.

하지만 이병채도 끝내 박철수와의 권력 다툼에서 패하고 지난해 회사를 그만두었다. 청춘을 불살라 일으켜 세운 신문사에서 결국 사장 자리 한번 못 앉아보고 물러서는 심경이야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참담했을 터이다.

그나마 이 상무는 동기생들이 일찌감치 짐을 싼 데 비하면 그래도 제법 오래 버틴 셈이다. 여향미도 이병채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그녀와 아무런 관계가 없을 듯한 그가 굳이 그런 불이익을 받았다는 자체도 역시 박철수 때문이었다.[계속, 월-목 연재]

박하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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