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울야곡
봄비를 맞으면서 충무로 걸어갈 때
쇼윈도 그라스엔 눈물이 흘렀다
이슬처럼 꺼진 꿈속에는 잊지 못할 그대 눈동자
샛별 같이 십자성 같이 가슴에 어린다

보신각 골목길을 돌아서 나올 때에
찢어 버린 편지엔 한숨이 흘렀다
마로니에 잎이 나부끼는 네거리에 버린 담배에
내 맘 같이 그대 맘 같이 꺼지지 않더라

네온도 꺼져 가는 명동의 밤거리엔
어느 님이 버리셨나 흩어진 꽃다발
레인코트 옷깃을 올리며 오늘 밤도 울어야 하나
배가본드 맘이 아픈 서울 엘레지

[골프타임즈=박하 작가] 카페에서 새삼스럽게 엉뚱한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야말로 정말 앞뒤가 맞지 않는 노래이다. 아닌 게 아니라 생경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 ‘다사랑’ 카페야말로 억지로 젊어지려고 아드득거리는 변신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이제 겨우 껍질을 벗는 매미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다사랑’을 사랑하는 이유는 80년대식의 다방 분위기와 음악 신청을 할 수 있는 것.

구본하는 문득 술이 깨는 듯한 낭패감을 맛보았다. 술이란 가끔은 깨어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는 법이다. 물론 그 경지에까지 도달했다면 그것만큼 위험한 일이 없을 터이지만, 그는 그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서울야곡」이란 유행가는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당연히 생소할 수밖에 없다. 아니 좀처럼 들을 수 없는 흘러간 옛날 가요이다. 하지만 노랫말 속에 담긴 의미는 요즘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신식 가요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센티멘털한 감각은 오히려 지금의 그 어떤 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모자라지 않다. 물론 최근의 인기곡들이 사실은 알고 보면 예전의 음과 곡을 흉내낸 것이 태반이긴 하지만.

구본하는 게슴츠레한 눈을 비벼 뜨고 카페 실내를 둘러보았다. 누군가 「서울야곡」을 시켰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불현듯 사로잡은 것이다. 이정현의 「달아달아」가 아니면 이수영의 「굿바이」, 서영은의 「혼자가 아닌 나」, 한경일의 「내 삶의 반」, 신화의 「너의 결혼식」이 흘러나오는 것이 더 알맞은 분위기의 장소였으므로.

카페 안에는 늦은 시간이어선지 사람들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겨우 대여섯 명의 손님만이 남아 마지막 술잔과 부대끼고 있었다. 다들 웬만큼 취해 있어 저 따위의 군내 나는 흘러간 옛 노래에 흥얼거릴 개재도 못 되었다. 그렇다면, 누가 무엇 때문에 희귀종의 음악을 주문했을까?

구본하는 불쑥 장난기가 발동한다.

“아가씨! 아니, 예쁜 언니! 여기 좀 봐유?!”

구본하의 목청은 고음 처리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있었다. 취한 탓이다. 그래도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득달같이 긴 머리 소녀가 달려왔다.

구본하는 긴 머리를 보자마자 웃음을 푸시시 게워낸다. 굳이 역겨운 것은 없었을 터인데도 그 무엇이 그를 역겹게 했을까. 구본하는 곧 그것을 눈치채고 고개를 심하게 주억거린다. 가뜩이나 긴 머리를 싫어하는 그였다. 그 이유는 엔간찮게 복잡하다. 구태여 밝힌다면 젊은 시절 긴 머리 여자에게 실연당했다는 것, 그리고 긴 머리는 필요 이상으로 성욕을 유발시킨다는 점이다.

“아저씨, 이제 좀 취하셨는데 그만 가시지요.”

긴 머리 소녀가 자신의 소신을 밝힌다.

불러놓고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 웃는 것이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말투로 보아 아르바이트가 분명할 듯싶다. 주인 여자라면 손님이 아무리 취했을지라도 이런 상투적인 말을 쉽게 할 수 없는 법이다.

‘요즘 젊은 것들이란…!’

성질대로라면 “에라, 이 싸가지 없는 년아” 하며 한바탕 욕지거리를 토해내고 싶을 만큼 확 끓어올랐지만 그는 이내 참고 만다. 주변에 그를 말려줄 놈이 하나도 없다는 정직한 외로움이 또 다른 그 어떤 무리들을 일찌감치 제압한 탓이다. 자기들끼리 엄청나게 헐뜯길 좋아하는 경쟁적인 생각들이 없었더라면 또다시 주책을 부릴 만한 상황이었다.

구본하는 스스로도 자신이 웃겼다. 이제 불혹을 갓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또 그가 품고 있는 기억들이란 것이 온통 먹물 같았다. 물론 그는 그것들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고 있었다. 다만 주위 사람들이 그를 케케묵은 놈으로 치부할 뿐이다.

구본하는 자신을 꾸짖는다. 조금만 더 점잖아지자고.

“아가씨, 나 그렇게 술 취하지 않았어요. 다만, 아가씨를 부른 이유는, 그저 이 노래를 누가 신청했나 알고 싶어서….”

가까스로 뱉아낸 말이 어지간히 비겁해져 있다.

오로지 술 탓이리라.

“아, 그래요. 저, 저기 창가에 혼자 앉아 계시는 여자분이 신청했어요.”

“아, 혼자….”

긴 머리 소녀가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한 듯이 목소리가 한결 부드럽다.

아무래도 멀리서 본 얼굴과 막상 앞에서 본 것이 상당히 판이했던 모양이다. 적어도 자신이 상대해내기에는 좀 역부족임을 간파했다는 징조이다. 술집에서 가장 진상은 겉늙은 놈들이라고, 그 또래들은 곧잘 유행어처럼 떠들고 다닌다.

긴 머리가 큰 엉덩이를 짐짓 과도하게 흔들고 사라지는 순간 구본하의 눈길이 창가로 향한다. 과도한 떨림은 일종의 심각한 데모다.

헉!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한다.

창가의 여자는 뜻밖에도 구본하가 아는 사람이었다.

아니 저 여자가 어째 혼자서, 청승맞게 저토록 어울리지 않는 장난을 하는가.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 노릇이었다.

적어도 저 여자의 곁에는 그 자가 있어야 하지 않는가. 아무리 남의 눈을 피한다 해도 밤만큼은 그런 대로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가. 그 자. 충무로의 대부. 어느새 염증이 도졌단 말인가. 하기는 이미 오래 전부터 마지못해 챙겨 왔겠지만….

여향미. 이름은 흔할지 몰라도 성만큼은 희귀한 여자. 그러나 무엇보다 더 야릇한 것은 그녀가 가지고 있는 특이한 성분이었다. 사람의 성분이 어찌 동식물의 그것과 비교가 될까마는 아무튼 뭔가 쉽게 감지하기 힘든 그 어떤 종류의 것이 그녀에게는 숨겨져 있었다. 탄수화물, 무기질, 지방질, 단백질, 비타민 A B C D E F K U…. 아니다. 그런 것들이 아니다. 요컨대 그것은 어이없게도 변질된 귀족성이었다. 구본하는 그에 대해 혼자만 쓰는 독특한 용어를 가지고 있다. 이른바 ‘인디안 드림’이다.

물론 여향미 자체를 두고 볼 때는 한갓 평범한 여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 역시 바닷가 시골에서 태어나 보통의 여자들처럼 꿈 많은 사춘기 소녀 시절을 지냈으며, 비록 가정 형편이 어려워 상아탑의 꿈을 접은 대신 운 좋게 신생 언론사에 입사해 아름다운 미래를 설계한 여자였다. 다만 여느 여자들보다 남다른 것이 있다면 빼어난 미모에다 늘씬한 몸매, 게다가 청량한 목소리가 압권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 뭇남성들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그녀를 사로잡은 것은 바이없이 권력과 돈이었다. 그녀가 충무로의 상투적인 영화배우와 다른 것은 비록 같은 동네에서 놀더라도 그 차원이 틀리다는 데 있다. 아니 엄밀히 따지자면, 미모의 영화배우들이 정치적인 힘을 가진 권력층과 노는 반면 그녀는 그저 순수한 직장인에 불과했다. 하지만 오늘의 현실에서 뒤돌아볼 때 여향미의 권력은 잠시 피었다가 사라져 버린 은막의 그녀들과는 비교가 안 되었다. 퇴화된 밤의 꽃과 달리 오히려 더 화려하게 피어나는 꽃 그 자체였으므로.

아직도 처녀인 여자 여향미. 나이가 비록 마흔여덟일지라도 그녀는 여전히 탱탱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 데는 나름대로 그녀만의 비결이 있었다. 70년대에 웬만한 사람이 아니고선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던 테니스를 일찌감치 시작한 그녀였다. 작금에도 아직껏 여향미의 테니스 실력은 수준급이었다.

눈부신 하얀 미니스커트를 풀풀거리며, 윤기가 반지르르 흐르는 미끈한 각선미를 뽐내는 그녀의 싱그런 자태. 아무래도 서열상으로서나 힘으로서나 유리한 놈이 먼저 집적거리게 마련이고, 그 결과는 뻔한 이치였다.

‘저거는 트릭이다! 웃기지도 않는 쇼다!’

구본하는 부조화한 여향미의 행동을 보고는 속으로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처음에는 반가움에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술을 마시고 있다는 사실, 게다가 제법 취해 있다는 자체가 그를 잠시 그 자리에 그대로 붙박여 있게 만들었다. 아주 짧게나마 술이 화들짝 깨어나는 듯했지만 그것이 끝까지 지속될 리가 만무다.

구본하는 이내 고개를 파묻는다. 괜한 호기 부리지 말라고 자신을 질책한다.

‘설사 네가 아는 사이라 하더라도, 이미 신분이 급상승된 이상 절대 너와 어울릴 턱이 없다.’

그때였다. 그런 구본하의 마음을 익히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그를 찾는 전갈이 날아온 것이다. 그 전갈을 가져온 사람은 다름 아닌 좀 전의 긴 머리 소녀였다.

긴 머리가 이번에는 엉덩이를 그다지 과도하게 흔들지 않는다. 겉보기보다는 참 눈치 빠른 계집애다. 그러고 보면 여향미가 이 카페의 단골손님이라도 된다는 얘기다. 구본하는 그것을 대충 지레 짐작으로 때려잡는다.

“선생님, 저기 언니가 찾으시는데요.”

긴 머리가 ‘선생님’이라는 어색한 호칭까지 붙인다.

‘언니’라는 극존칭을 붙이는 것으로 보아 여향미는 ‘다사랑’의 완벽한 단골손님이 분명하다.

역겹다. 등줄기를 타고 전갈 한 마리가 기어가는 듯한 충동을 느낀다.

‘차라리 가장 흔해 빠진 ‘아저씨’라 부르는 것이 더 제격인데, 빌어먹을 년.’

구본하는 마지못해 일어나 자리를 옮긴다.

“아니, 여 부장님! 어쩐 일이세요!? 술까지 다 드시고….”

그는 짐짓 놀란 척한다. 적당히 꼬리를 감춰 약간 맘먹어도 된다고 아부까지 떤다. 그러면 혹시 예전처럼 아껴 줄지도 모를 일이므로.

여향미가 영화배우의 허튼짓처럼 천천히, 그러면서도 야릇하게 얼굴을 쳐든다. 마치 연기력을 보이는 듯하다. 누가 뭐래도 여우는 여우다. 구본하는 그것을 다 알고 있다. 하지만 여향미는 그런 구본하의 본색을 모르는 듯 연기한다.

참으로 희한한 노릇이다. 충무로에서 오래 살다 보면 가끔은 연기를 하는 듯 몽롱해진다. 빌어먹을 놈들 때문이다. 영화판을 기웃거리며, 또한 실제로 영화를 한답시고 거들먹거리는 놈팡이들 탓이다. 그것은 구본하 자신도 모르게 옮은 일종의 정신질환성 전염병이다.

“앉아요, 구 기자님!!”

여향미의 음이 높다. 그러자 긴 머리와 주인인 듯한 여자의 눈길이 두 사람으로 향한다.

구본하는 급작스런 불안감에 습관처럼 사위를 둘러본다. 손님은 두 사람뿐이다. 어느덧 남아 있던 세 명의 젊은이들은 그 새 나가고 없다.

“아니, 어쩐 일이세요?”

“호홋, 나는 술 마시면 안 되니?”

“그래도….”

“자, 나랑 한잔 더…!”

“…….”

여향미의 혀가 중음(中音)에서 약간씩 뒤엉킨다. 취하지 않았다고 시위하는 증거다. 이럴 때는 화제를 바꾸는 것이 제격이다.

“뜻밖이신데요, 부장님. 현인 노래를 다 좋아하시구요?”

“응? 나라고 뭐, 현인 노래 좋아하지 말란 법 있나!?”

“그래도….”

“호홋, 구 기자가 뭔가 착각하고 있네. 내 나이가 벌써 오십이 다 된 걸….”

“하하, 그런가요?”

“요즘 젊은 애들이 아무리 용 써도 현인 노래 따라올 수 없지. 암, 당연히….”

“현인 노래는 거의 다 히트했지요?”

“그러면, 어디 아는 노래 있으면 말해 봐.”

“아까 들었던 「서울야곡」, 그리고 「신라의 달밤」이 가장 유명한 곡 아닌가요?”

“호홋, 그뿐인가? 「비 내리는 고모령」, 「굳세어라 금순아」, 「전우야 잘 자거라」,「럭키 서울」도 유명하지.”

“히야, 그렇데 많던가요? 부장님은 아예 현인 전문가이시군요.”

“호…, 옛날 사람 치고 그분의 노래를 좋아하지 않은 사람 있나? 일제 강점기 때 우리 나라 백성의 암울한 현실을 풍자하면서 은근히 용기를 불어넣어 주신 분이고…. 대표곡인 「신라의 달밤」은 달빛이 비치는 산사에서 풍류객이 고도 경주를 내려다보며 흥얼거리는 듯한 가사에다 이국적인 멜로디, 가수 특유의 부르르 떠는 창법 등으로 큰 사랑을 받았지. 「비 내리는 고모령」은 일제 강점기 때 실향의 아픈 기억을 되살린 노래이고….”

“하하, 정말 전문가이시군요. 그래서 좀 전에 「서울야곡」을…?”

“「서울야곡」이 어때서?”

“뭐랄까. 노래 분위기가 좀 너무 가라앉았다고나 할까요? 슬픈 사랑을 떠나보낸 연인, 혹은 실연당한 여인이 생각나는….”

“…….”

구본하가 엉뚱한 말을 하자 여향미는 한동안 말없이 그를 바라본다. 그런데 문제는 여향미의 그윽한 눈빛이다. 재미라도 있다는 듯이. 구본하는 불현듯 혼란스러워진다. 하는 수 없이 눈길을 피한다. 지나치게 도발적인 눈빛이 부담스럽다.

더욱이 여향미는 미소까지 살포시 던진다. 마치 당황해 하는 구본하를 고문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술로 치부하기에는 과도하리만큼 집요하다. 이럴 때는 피하는 것이 상책인데 뜻대로 안 된다. 다시 한 번 분위기를 일소할 때다.[계속, 월-목 연재]

박하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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