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박하 작가] 여향미는 숙소로 ‘바다여행 민박집’을 잡았다. 차라리 민박집이라기보다는 예쁜 발코니가 있는 별장 같다. 바로 방 앞까지 바닷물이 올라온다. 만조(滿潮) 때 해변과 접한 지역이어서 풍광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여름에는 해수욕을 하고 곧바로 방으로 들어올 수 있게 꾸민 것이다. 하지만 태풍으로 풍랑이 몰아칠 때면 그 반대로 험한 꼴을 많이 경험할 듯했다. 어차피 바다가 항상 잔잔한 것이 아닌 것처럼 인생 또한 그렇지 않던가.

‘바다여행 민박집’은 식당도 겸하고 있다. 굳이 멀리까지 가지 않더라도 싱싱한 회를 싼 값에 먹을 수 있는 곳이다. 구본하와 여향미는 짐을 풀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 한쪽 구석에 놓인 노래방 기기는 으레 찾게 마련인 단체 손님들을 위해 준비한 듯하다.

“우리도 한 곡조 뽑아 볼거나!?”

여향미가 노래방 기기를 보고 신기한 듯 한마디 농을 한다.

“자신 있으면 한 곡조 뽑아 보시죠.”

구본하가 한 술 더 뜨자 여향미가 까르르 웃는다.

“그런데, 영 분위기가 아니네. 식당 객실에서 노래방이라…?”

“그러게요. 보통 강심장 아니고서야….”

두 사람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무엇을 드실까요?”

인심마저 몸집만큼이나 푸짐할 듯싶은 주인 여자가 다가온다.

“글쎄요. 부장님, 뭘로 할까요?”

구본하가 여향미의 의중을 묻자 주인 여자가 새삼스럽게 쳐다본다.

이미 어림짐작으로 두 사람을 놓고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듯한 쌍으로 파악한 얼굴이다. ‘부장님’이라는 호칭이 좀은 어색했던 모양이다. 뚱뚱한 몸집과 달리 주인 여자는 의외로 눈치가 빨라 보인다.

“언니, 싱싱한 회 있어요? 물 좋은 거로….”

“아이구, 그럼유. 바닷가인데 당연히 싱싱하쥬.”

“그럼 참돔으로 주세요.”

여향미가 일방적으로 비싼 참돔을 지칭한다.

주인 여자가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조아리고 주방으로 사라진다.

곧이어 한 쌍의 젊은 남녀가 식당으로 들어왔다. 이제 막 이성에 눈뜬 풋내기 냄새가 난다. 사랑이 무엇인지 모른 채 그저 맹목적으로 덤벼드는 부나비 같은 풋사랑. 너 없으면 이 세상 못 살 것 같은, 사랑을 위해 죽으라면 정말 따라 죽을 수 있는 그런 부나비의 사랑을 아는가.

하지만 이런 한적한 해수욕장에 올 만한 연인이라면 그런 대로 운치 있는 짝이다. 인적이 드문 철 지난 바닷가에 올 수 있는 감각 하나만 두고 보더라도. 물론 여자가 먼저 이곳에 오자고 요구했을 법하다. 아둔해 보이는 남자가 먼저 정했을 턱이 없다. 대개의 경우 남자들이란 자고로 분위기를 모를 뿐만 아니라 오히려 망치는 것이 허다하다.

구본하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젊은 시절 여자들로부터 한창 인기 있을 때, 그런 고아한 풍치를 외면한 탓에 아직도 노총각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그는 여자를 배려하는 마음이 부족했다. 물론 그것이 가장 큰 핸디캡이었다. 여자들이란 남자의 조건이 아무리 좋아도 사소한 것 하나에도 토라지는 법이다.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 그냥 지나쳐도 될 만한 문제에 자신의 인생을 건다. 이른바 유달리 섬세한 여자만의 우월감에서 비롯된 자만이다. 결국 그것이 화를 잉태한다.

하기는 그 반대로 그에 대해 너무 무지한 나머지 불행한 경우도 있다. 물론 결혼 생활에 있어 불행과 행복의 경계선은 모호하다. 설령 물질적으로 풍요로워도 불행할 수 있으며, 그 반대일지라도 행복하다고 하는 경우가 있게 마련이다. 과연 결혼 생활에서 무슨 잣대로 행복지수를 잴 수 있을까.

젊은 연인은 주머니 사정이 풍족하지 않았던지 매운탕만 시킨다. 잠시 후 두 사람이 시킨 생선회가 나오고, 또 한 떼거리의 가족이 들이닥친다. 처음 들어올 때는 그들 외에 별다른 사람들이 없을 줄 알았는데 뜻밖이다.

“아니,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오네요.”

구본하가 여향미에게 소주잔을 건네며 한마디 한다.

“그러네. 그 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여향미가 구본하의 잔에 소주를 따라 주었다.

“이곳에 언제 오셨었나 보죠?”

“응.”

“언제, 누구랑?”

“…….”

대답이 애매했던지 여향미는 그저 웃음만 흘릴 뿐 말이 없다.

구본하는 순간 박철수의 얼굴을 떠올린다. 물론 여향미가 확답하지 않은 이상 반드시 그놈일 리는 없다. 그와 달리 전혀 생소한 인물일 수도 있다. 구본하가 볼 때 수수께끼같이 오묘한 것이 여향미의 과거사였으므로. 아무튼 한 남자에 만족할 만한 여향미는 아니다.

“말하기 곤란한가 보죠?”

구본하가 알근한 기분에 젖어 슬며시 공세의 고삐를 바싹 조인다.

“호홋, 집요하긴…. 2년 전에 친구랑 왔었어. 그때는 정말 한산했는데. 그때 그 기분 내려고 왔는데, 그동안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모양이네.”

“그렇군요.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은 거예요. 정동진 같은 데 한번 가보세요. 도대체 바닷바람 쐬러 간 건지, 사람 구경 하러 간 건지 분간이 안 갈 정도니까요.”

“호, 그런 것에 비할 수는 없지. 사람이 이 정도도 없으면 어떡해. 사람들이 적당히 있어야 그런 대로 분위기라도 잡지.”

“하핫, 그건 좀 엉뚱한 관점인데요?”

“요즘 젊은 애들은 우리 어릴 때와는 또 달라. 마치 자신들의 연애를 시위하듯 내놓고 하지. 남의 눈치는 전혀 안 봐. 아니 오히려 자랑이라도 하듯 남들 보란 듯이…. 지하철은 물론 거리에서, 아니 특정한 장소를 불문하고 어디서든 서로 껴안고 뽀뽀하고 그러잖아.”

여향미는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데도 말문이 터지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속사포이다.

그녀답지 않게 음성도 높다. 구본하는 무의식중에 식당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젊은 두 남녀를 힐끗 훔쳐본다. 여향미가 하는 말이 자칫 그들을 표적으로 삼고 있는 듯해 보인 탓이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개의치 않고 갓 나온 매운탕 맛에 빠져 있다. 오히려 그들에 무관심한 듯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일지감치 자신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부적절한 관계로 익히 파악한 듯한 눈치다. 남자는 연거푸 소주잔을 비운다.

‘그래, 이럴 때는 빨리 취하는 것이 장땡이다. 짜식, 어린 것이 한 수 가르쳐 주네. 당연히 그렇겠지. 어서 빨리 취하고 싶을 거야. 그리고 한시바삐 싱싱한 네 여자 친구의 옷을 벗기고 싶겠지. 아무리 회가 싱싱하더라도 네 여자 친구만 하겠냐? 좋겠다, 짜식!’

구본하는 웃음을 한소끔 술잔에 털어 넣고 다시 한잔 들이킨다. 전기가 짜르르 온다. 빈속에 대한 혼란이다. 잠들어 있던 내장이 경망스럽게 야단을 떤다. 여향미도 덩달아 한잔 넘긴다. 마신다기보다는 강제로 알코올을 쑤셔 넣는 듯하다.

“그러다 취하겠어요. 천천히 마시세요.”

“호홋, 취하면 어때? 술이란 취하려고 마시는 거 아냐?”

“내일 운전하는 데 지장 있을까 봐요.”

“아, 참…. 우리 구 기자는 운전 못하지? 에구, 바보같이 여태 뭐했어. 운전면허증도 못 따고!”

“그래요. 요즘 후회하고 있어요. 진즉에 따놓지 못한 것을….”

“그건 그렇고 어쩌다 면허증을 안 땄어?”

“그 얘기 하려면 길어요. 밤새도록 해도 모자라요.”

“엉? 면허증을 따지 않으면 안 되는 무슨 사연이라도 있나 보네. 거, 참….”

“하핫, 별 거 아닙니다.”

“그래, 그래. 괜히 골치 아픈 과거사 얘기 꺼낼 필요 없어.”

여향미가 그 틈에 소주잔을 또 비운다.

“와, 멋지다! 야호!”

그때 창가에 앉아 바닷가를 응시하던 가족 일행이 탄성을 내지른다.

그러자 시선이 모두 바다로 쏠린다. 시뻘건 불덩이가 바다 속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다. 그림같이 아름다운 낙조이다. 구본하도 넋을 잃은 채 한동안 지켜본다. 손으로 턱을 괴고 소주잔을 든 채. 여향미도 마치 연기하는 주인공이 된 것처럼 화사한 얼굴빛으로 노을을 응시한다. 그녀의 얼굴에도 불그레한 융단이 깔려 있다. 구본하는 얼핏 여향미를 쳐다보다가 이내 눈길을 거둬 간다. 여향미의 눈가에 잔잔한 이슬이 맺혀 있기 때문이다. 멋진 노을 풍광에 감탄한 듯하기도 하고, 아니면 누군가 떠오르는 얼굴이 불덩이와 오버랩되었던 것인지 도통 알 수 없다.

사춘기 소녀도 아닌데, 여향미가 쓸데없이 눈물을 보일 리가 없다. 잘못 본 것이리라. 어쩌다 눈에 티가 들어간 것이리라.

구본하는 적당히 딴전을 피운다. 깡충깡충 뛰며 탄성을 지르는 아이들의 귀여운 모습에 넋을 잃은 듯 눈길을 준다. 저만한 딸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짐짓 슬픈 미소까지 짓는다.

적어도 여향미의 눈가에 맺힌 액체가 다 마를 때까지는 모른 척해야 한다. 설사 거짓 눈물일지라도 그녀의 눈과 마주치면 안 된다. 대책 없는 접속은 속수무책이다. 그것만큼 위험한 눈빛은 없다. 사람은 거짓말할 때 왼쪽 눈동자가 살며시 떨린다거나 무의식중에 위로 올라간다.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여향미의 눈과 교신할 필요는 없다.

저녁 바다를 온통 발갛게 물들였던 불덩이가 순식간에 곤두박질친다. 장난이라도 치듯 너무 빠르다. 그대로 몇 십 분, 아니 최소한 3분만이라도 더 버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지는 태양은 냉정하다. 정확하게 주어진 시간만 지킨다. 서두르지도 않고 게으르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노을의 아름다움에 중독된 탓이다. 그러므로 노을의 궤적, 그리고 거기에 주어진 시간을 알 턱이 없다. 자연의 일부이면서도 유독 자연의 순리에 부응하지 않는 족속이 인간이 아니던가.

“우리도 불꽃놀이 할까?”

여향미가 불쑥 말을 꺼낸다.

창밖을 응시하던 구본하는 그제야 눈길을 돌린다.

불꽃놀이. 좀은 야릇한 단어다. 기실 구본하는 그 뜻밖의 단어에 잠깐 혼선을 겪는다. 난데없는 불꽃놀이라니.

잠시 후에야 그는 불꽃놀이의 의미를 알아챈다. 식당을 안방처럼 버릇없이 왁자하게 들고뛰는 아이들의 손마다 폭죽이 들려 있던 것이다. 자세히 보니 젊은 두 연인의 옆자리에도 폭죽이 놓여 있다.

“아하, 폭죽 불꽃놀이요?!”

구본하는 가까스로 반문하며 자신의 무지를 질책한다.

웃음이 입가로 실실 기어 나온다. 청년과 중년의 차이를 폭죽으로 가늠하려는 그 어떤 음모가 들통난 탓이다.

“그래요. 재밌겠는데요.”

“구 기자는 아직까지 폭죽놀이를 못 해봤나 보지?”

“그러는 부장님은요?”

“나두 안 해봤어.”

“둘 다 마찬가지죠. 그렇다고 우리 스스로 구닥다리라고 치부할 것까지는 없어요.”

“응? 그게 무슨 뜻이야?”

“하핫, 저 아이들을 보면 알잖아요.”

“…….”

여향미는 말없이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윽하다 못해 좀은 측은한 눈길이다. 아이들의 천진스런 모습이 보기 좋은 듯 엷은 미소까지 짓는다.

구본하는 그때서야 문득 섬광처럼 뇌리를 스치는 것을 발견한다.

좀 전에 언뜻 비친 여향미의 이슬은 바로 이 아이들이 원인이었다고. 한낱 환상적인 저녁놀에 감탄해 눈가를 적실 여향미가 아니다. 그런 감상적인 생각을 가질 나이는 이미 오래 전에 지났으므로.

아이들을 낳아 기르다 보면 당연히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이 동심의 세계다. 일부러 배울 필요가 없다. 은연중 자연스럽게 터득되는 것이다. 개중에는 그 세계와 현실을 혼동하는 어른도 있지만. 그러나 설사 그렇더라도 그 자체가 행복이다. [계속]

박하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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