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박하 작가] 구본하는 머리가 빠개지는 통증에 눈을 떴다. 가뜩이나 뭔가에 짓눌려 가슴이 답답한 것도 한 원인이었다. 여관방이었다. 어디쯤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어도 을지로 인쇄소 골목길이리라. 아직도 간밤의 뜨거운 열기가 곳곳에 배어 흔적으로 남아 있다. 확연한 기억은 없지만 무척이나 격정적이었을 법하다. 아직도 그 울부짖음이 들리는 듯하다.

구본하는 다시 한 번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일어난다. 미명의 그림자가 창가를 기웃거리는 새벽녘이다. 궤탄한 마음이 미치도록 허망하다. 구본하는 순간 머리를 쥐어뜯는다. 옆에 알몸으로 누워 있는 여향미의 조각처럼 잘 빚어진 여체가 허상 같다. 그러나 실체다. 가짜 인형이 아닌 진짜 여인이다. 뜻하지 않은 스캔들에 휘말린 자신이 우스꽝스럽다 못해 가증스럽다.

이대로 도망치는 것이 상책이다. 도대체 아무 일도 없을 줄 알았는데. 어떻게 해서 넘어선 안 될 선을 넘고 말았는가. 꿈이라 믿고 싶다. 모두가 허상이리라.

구본하는 고개를 좌우로 마구 흔든다. 침대가 흔들리고 따라서 여향미의 젖무덤이 춤을 춘다. 그러자 여향미가 미소 지으며 눈을 뜬다. 무섭다. 여우같다.

“구 기자, 언제 그런 솜씨를 익혔어? 숨 막혀 죽는 줄 알았잖아.”

여향미가 도망치려는 구본하를 덥쑥 안고 다시 침대로 쓰러진다.

이제야 여향미가 어젯밤에 한 말이 실오라기처럼 풀풀 떠오른다. 그야말로 뜬금없이.

―오늘밤, 날 가져.

구본하는 자포자기로 무너진다. 여향미가 하는 대로 몸을 맡긴다. 여인은 익숙한 조련사이다. 사내는 금세 말 잘 듣는 애완견이 된다.

구본하는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책임지기로 마음먹는다. 아니 순전히 여향미의 뜻대로 움직인 것이므로 하등의 죄책감 비슷한 감정을 갖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결정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다만 앞으로 여향미와 두 번 다시 불장난을 하지 않을 것도 다짐하면서.

어젯밤 그녀는 눈물까지 보였었다. 여자의 눈물은 묘한 수수께끼를 동반하는 위험 인자이다. 그 눈물 앞에 여지없이 함몰된 구본하는 마치 홀린 듯한 기분에 사로잡혀 로봇처럼 움직였다. 여인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심지어 울라고 하면 정말 울 것처럼 여향미의 분위기에 흠뻑 취해 버렸다. 설사 그것이 대단한 계략일지라도 후회하지는 않겠지만.

여향미의 눈물은 곧 대부와의 이별을 뜻할 수도 있었다. 구본하는 그것을 금세 눈치챌 수 있었다. 구본하 역시 박철수를 그다지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신통할 만큼 남들과 다른, 자칫 신기마저 감추어져 있는 듯한 그의 관찰력은 보통 수준 이상이었다. 박철수와 여향미의 불륜은 널리 알려진 것은 아니었다. 그네들이 워낙 은밀하게 만나 향연을 펼치기 때문에 회사 직원들의 눈에 쉽게 발각될 리가 없었다. 그러나 관찰력이 남다른 구본하의 눈에는 들키게 마련이다.

구본하는 지난해 가을 우연히 그네들의 약점을 한순간에 포착하는 개가를 올렸다. 아침 일찍 경리부에 올라간 구본하는 뜻하지 않게 박철수와 여향미의 은밀한 수신호를 본 것이다. 출근하자마자 곧장 경리부로 들어온 박철수는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여향미에게 카드 영수증을 내밀었다. 진동하는 술 냄새를 푹푹 풍기면서. 알아서 처리하라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간밤에 엄청난 술을 마셨던지 박철수의 얼굴은 무척 망가져 있었다. 그때 뒤늦게 구본하를 발견한 박철수는 그제야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무한해 하고는 총총히 사라졌다.

구본하는 나름대로 그네들의 야릇한 적정 수준까지 가늠할 수 있었다. 그 정도의 힘을 가진 자라면 법인카드로, 아니면 자신의 카드로도 얼마든지 결제할 수 있었다. 그것은 아주 간단한 숫자 짜맞추기 게임이었다. 여향미만 눈 감아 준다면, 게다가 박철수가 후원하고 있는 이상 어떠한 문제도 없을 거였다. 결국 이와 같은 수많은 비리를 통해 회사는 회사대로, 공직자는 공직자대로 그 어떤 음흉한 심보를 표출하는 것이 아닌가.

아무튼 구본하는 그런 두 사람의 묘한 장부 정리를 목격한 이후 심기가 불편했다. 그렇다고 함부로 아무 데서나 까발릴 수도 없는 처지였다. 다만 친하게 지내는 동료 기자인 함봉호에게는 어느 정도 얘기했다. 하지만 그 역시 입을 다물자고 그답지 않게 비겁해졌다. 함봉호는 확실한 물증이 없는데 괜히 위험한 장난 하지 말자고 부추기까지 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것이다. 그런 대로 겁 없는 축에 드는 함 기자마저 주눅이 드는 마당에 구본하가 총대를 멜 필요는 없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의 연애 전선에 이상이 생겼다는 데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의 막강한 힘을 이용해 힘없는 여향미를 처녀 때부터 다 빨아먹은 이후 이제는 한물가자 외면하려는 심산일 공산이 컸다. 한마디로 단물이 다 빠진 여향미를 차버리고 녀석은 또 다른 싱싱한 젊은 여자를 흡취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낌새를 알아챈 여향미는 결국 무지막지하게 괴로운 마음을 달래려고 술에 취했고, 급기야 좀은 순진한 구본하의 육체를 탐한 것일 터이다. 그것이 거의 들어맞으리라.

구본하는 그와 비슷하게 추리했다. 그와 함께 자신마저 흔들렸고, 두 사람은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육체의 향연을 펼친 것이다. 구본하는 지난밤 어느 순간인가 여향미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은 두려움을 무심코 맛보았다. 자칫 여향미가 자살 소동이라도 벌일 듯한 어떤 모종의 불안감 같은 것. 물론 그것이 최후로 구본하를 약해지게 만들었지만. 비록 우연히 나이 든 여향미를 탐했지만 그녀의 육체로 통하는 비밀의 문은 아직도 탐미적이었다.

어쨌든 그 사건 이후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 만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특히 구본하는 웬만하면 임원실이 있는 9층에 출입하지 않았다. 어쩌다 마주치기라도 하면 엄청난 혼란에 맞닥뜨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본하는 밖으로 나가 돌아다니길 잘했다. 취재한답시고 영화사와 공연사를 기웃거리고, 심지어 시간을 때우는 의미에서도 영화나 연극을 구경했다. 물론 그것도 업무의 연장선이지만.

그렇게 겨울은 가고 있었다. 여향미와의 사건이 있은 지 한 달이 지나도록 두 사람은 어떤 만남도 가지지 않았다. 구본하는 어쩌다 마주치는 박철수의 얼굴을 볼 때마다 묘한 쾌감에 사로잡혀 이유 모를 웃음이 낄낄 나왔다. 어쩌면 알량한 비웃음 종류였다. 놈이 여향미의 몸을 버렸지만 그 대신 젊은 내가 보듬어 줄 것이라고. 시위 아닌 시위를 보내는 맛이 괜찮았다. 그러나 박철수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것을 알 턱이 없다.

그런데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 여자의 마음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여향미로부터 전화가 온 것이다. 업무적인 일이었으므로 구본하는 그녀를 찾아갔다. 사무실에는 허수아비 부장이 꾸벅꾸벅 졸고 있을 뿐 다른 직원들은 모두 어디론가 가고 아무도 없었다. 거의 수금을 하는 직원들인 관계로 낮에는 텅 비는 것이 당연하지만.

구본하를 바라보는 여향미의 눈이 사슴처럼 슬프다. 금방이라도 펑펑 울어 버릴 듯한 근원 모를 우울한 긴장감마저 감돈다.

그래도 아무 말을 하면 안 된다. 비웃어도 좋다.

불현듯 구본하가 더 이상 빠지지 않을 것이라고 눈빛으로 대답한다.

“구본하 씨! 이 서류 다시 기안해 주세요. 이리 와 봐요, 구본하 씨!”

여향미가 엉뚱한 말을 한다.

지금 그녀가 들고 있는 서류는 이상이 없다고 다 결재된 것인데.

구본하가 짐짓 엉거주춤하며 여향미에게 다가간다.

그러자 여향미가 백지장에 뭔가를 끼적인다.

‘이번 주말 바다 구경 가자!’

바다. 사람들은 왜 무료할 때마다, 가끔씩 그 바다에 가려는 것일까. 정작 그 바다에 가면 아무 것도 없는데. 고즈넉하면서도 어딘가 울적한 풍광, 그리고 얼굴을 괴손시키는 염기 섞인 바닷바람뿐인데.

그래도 사람들이 바다를 찾는 이유는 삶이 무료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인생이란 자체가 온갖 풍파에 시달려 지루하고 심심할 수밖에 없는 것을. 그럴 때마다 대개의 사람들은 바다에 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다. 물론 바다는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이 경이로운 곳이다. 그래서 뭍에서 자란 어린이나 청소년들에게는 여전히 미지의 세계로 보일 수밖에 없다.

내륙에서 태어나고 자란 구본하는 바다를 뒤늦게 접했다. 고등학교 2학년 수학여행 때 비로소 처음 대한 그의 눈에 비친 바다는 그저 신비롭기만 했다. 코를 매캐하게 후벼 파는 고기 비린내, 거무죽죽한 바닷물, 옹기종기 떠 있는 수많은 섬, 기약 없이 떠나는 여객선, 그리고 어딘가 우울한 바닷가 사람들…. 그 모든 것들이 생경했다. 그 중에서도 수업 시간에 배운 것과 달리 바닷물이 파랗지 않다는 사실은 두고두고 머리를 혼란스럽게 했다.

그런 반면 바닷가에서 태어난 여향미는 바다에 아주 익숙해져 있었다. 여향미에게는 오히려 바다가 지겨운 존재로 기억된다. 바다를 바라보아도 어떤 감흥이나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오로지 가지고 있는 기억이라면 온통 악몽 같은 태풍과 폭풍우, 그리고 무수하게 죽어 가는 뱃사람들뿐이다. 그래서 그녀는 대개의 바닷가 사람들이 그랬듯이 어린 시절부터 뭍을 꿈꿔 왔다. 가난과 죽음이 항상 공존하는 곳, 그 지겨운 바다를 떠나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결국 그 꿈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운 좋게 성사되었다.

그런 여향미가 불쑥 바닷가에 가자는 것은 좀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았다. 구본하는 그런 여향미의 데이트 신청이 뭔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는 것 같아 그에 응하지 않았다. 구본하는 여향미가 휘갈긴 낙서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누가 유심하게 쳐다보지도 않고, 더구나 그들의 행각을 누구 하나 낌새를 챌 리도 없는데 구본하는 이상하게 가슴이 콩닥거렸다.

어린 시절 사과 서리를 하려고 과수원 철조망을 넘을 때도 이 정도는 안 그랬는데. 자신이 생각해도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사실은 이럴 때일수록 더욱 침착하고 대범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것도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결국 기우(杞憂)는 현실로 다가왔다. 이른바 남자로부터 거절당했으면 자존심에 상처받아 그대로 무너지는 것이 여자인 줄 알았는데, 여향미는 전혀 달랐다.

“아니, 내가 구 기자랑 무슨 장난하자는 건 줄 알아!?”

여향미였다. 게다가 핸드폰이다. 구내전화로 하면 뭔가 찜찜했던 모양이다.

그것도 사무실이 아닌 밖에서 하는지 좀은 당당한 목소리다.

“내가 저번 일 가지고 언제 왈가불가한 적 있나요?”

“아니, 전 갑자기 바다에 가자고 해서…. 좀 생각해 본 다음에 말하려고 했어요. 그리고 오늘이 원고 마감이라 정신도 없구요.”

구본하는 뜻밖의 말에 당황한 나머지 원고 마감으로 얼버무린다. 옆자리에는 후배 기자 황봉호가 앉아 있고, 주변에는 그의 말을 엿들을 만한 첩자들이 얼마든지 널려 있는 탓이다.

사무실에는 박철수의 스파이들이 득시글거린다. 놈들은 사무실에서 벌어지는 일거수일투족을 일일이 고해바친다. 문제는 이 사실을 웬만한 직원들이 모른다는 데 있다. 어쩌다 사무실의 일이 외부에 알려지면 그저 그런가 보다 생각하는 것이 태반이다. 구본하는 사무실의 첩자가 누구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다. 그렇다고 그 사실을 굳이 다른 직원들에게 알려주고 싶지는 않았다. 자기 자신 외에는 그 누구도 믿을 놈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단지 그놈의 첩자만 조심하면 된다 싶어 입을 다물기로 했다. 물론 함봉호 만큼은 예외로 어느 정도 귀띔해 주었다.

박철수에게 사무실의 비밀을 일러바치는 녀석은 김진호였다. 지방대 공대 출신인 김진호가 처음부터 박철수의 첩자 노릇을 한 것은 아니었다. 어쩌다 자신이 대학에서 전공한 공학과는 거리가 먼 것이 신문사 일이라는 것을 감지한 이후부터였다. 그런 만큼 놈에게는 그럴 만한 사연이 숨겨져 있었다. 적어도 실권자의 눈에 들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데라는 것을 은연중 체득한 셈이다.

처음 입사할 때 김진호는 구인구직 관련 경력자로 들어온다. 그러나 김진호의 상사는 그로부터 알맹이를 따 빼먹은 후 그를 버린다. 결국 김진호는 한직으로 밀려난다. 그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연감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는 자신을 밀어낸 옛 상사의 배후에 거물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챈다.

김진호는 드디어 칼을 빼어든다. 그는 얼마간의 노력 끝에 의외로 순진한 박철수에게 접근하는 데 성공한다. 남들보다 머리 회전이 빠른 김진호는 드디어 자신이 모시고 있는 부장을 몰아낸다. 예전부터 금전적으로 비리가 있어 왔던 부장의 허점을 박철수에게 보고한 것이다. 연감 판매 비리를 알아챈 박철수는 우회적으로 서고(書庫)의 연감 재고 부수를 조사해 부장의 목을 단칼에 쳐 버린다. 그러므로 누구 하나 김진호의 짓이라는 것을 감지하지 못했다. [계속]

박하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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