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박하 작가] 여향미의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을 수 없었던 구본하는 핸드폰을 들고 슬그머니 복도로 나갔다. 저만치 김진호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녀석은 시선을 다른 데 두는 척하면서 귀로 상황을 파악하는 데 도가 튼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놈이다.

“아니, 내 말이 말 같지 않아요?”

여향미가 어울리지 않게 존댓말을 한다.

그 존댓말이 괜히 부담스럽다. 여향미의 급작스런 존칭어는 뭔가 자신의 뜻과 뒤틀리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아, 아니, 그게 아니구요. 복도에 나와 받느라고 잠시 수화기를 들지 못했어요.”

“어머, 누가 우리 전화를 엿듣기라도 하나요?”

“아, 그게 아니구요.”

“원고 마감이 어디 하루 이틀 해봤어요? 다른 일이 있다면 모를까.”

“글쎄요, 아무튼 갑자기 바다에 가자고 하는 바람에 선뜻 답할 수 없었어요.”

“그래요. 그럼 약속한 걸로 알고…. 이따 1시에 만나요. 그럼….”

“아, 아니, 어디서요?”

“바보같이…. 핸드폰 뒀다 뭐해요!?”

여향미가 그쯤에서 전화를 끊는다.

다행이다. 어느새 김진호가 슬금슬금 복도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여향미가 끊지 않으면 구본하라도 그럴 참이었다.

“아이구, 구 팀장님! 무슨 밀담이 있어 이리 한적한 곳에 오셔서?”

김진호가 습관처럼 비아냥거린다.

사실 구본하는 속으로 뜨끔했다. 마치 놈이 훔쳐보기라도 한 것처럼 괜히 켕기는 순간이다. 구본하는 씨익 한번 웃어 보인다. 이럴 때는 그 특유의 기분 나쁜 웃음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곧장 사무실로 다시 들어왔다.

-바보 같이….

여향미가 남긴 말이 뜻하지 않게 머리를 괴롭힌다.

‘그러니까, 바보 같으니까, 아직도 결혼 못 한 채 그 모양 그 꼴이지. 나 같이 한물간 여자하고나 놀고….’

환청이다. 보랏빛이다. 귀가 멍멍하다.

구본하는 자신을 바보로 만든 여자들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보랏빛 환청 뒤에 또 다른 환청이 그의 고막을 찢는다. 주황색이다. 아니 이번에는 남색이다. 주황색은 수정이고, 남색은 경혜다. 그리고 보라색은 미경이다.

참으로 신기한 현상이다. 굳이 표현한다면 신기루 같기도 하고 무지개도 닮았다. 강산이 한번 바뀌고 두 번째로 접어드는데도 이상하게 구본하의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여인들이 있었다. 유행가 가사처럼 세월이 흐르면 깨끗하게 잊힐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것이 아니다. 그러고 보면 유행가란 무책임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 유행가의 노랫말에 넋을 잃는 것은 여전히 속물인 탓이다.

구본하도 자신이 별 볼일 없는 속물임을 인정한다. 여태껏 그 아픈 상흔을 간직하고 있는 자체가 못마땅했다. 망각의 늪에서 영원히 헤어나지 못하는 몹쓸 기억이 원망스럽다. 새삼스럽게 떠오르는 세 여인이 아련하게 미소 짓는다. 지금도 서울 하늘 아래 어딘가에 살고 있을 그녀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나 그를 괴롭힌다. 얼굴이 유난히 화사했던 수정은 주황색에 가까운 여자였다. 생물학자답게 모든 사물을 생물과 연관시켜 보길 즐겨했던 까다로운 여자 수정. 그녀는 지나칠 만큼 ‘크산토프로테인 반응(xanthoproteic reaction)’에 편집증적인 관심을 보였다. 이 세상을 마냥 단백질 검출하듯 편협한 시각으로 바라보았던 여자.

시료에 소량의 질산을 넣어 몇 분간 가열하면 황색이 되고, 다시 암모니아수를 넣어 알칼리성으로 하면 주황색이 된다. 페닐알라닌, 티로신, 트립토판 등 아미노산의 벤젠고리가 질산에 의해 니트로화해 황색의 니트로화합물이 되는 것. 결국 이들 아미노산이 없는 단백질은 발색이 없다.

수정처럼 차가운 반면 의외로 따스한 시를 좋아했던 이중적인 성격의 경혜는 남색에 가까웠다. 경혜는 디프 블루(Deep blue), 혹은 페르시안 블루(Persian blue)라고 불러야 더 어울리는 여자다. 어두우면서 둔하고, 수축적이면서 후퇴성이 강한 여자. 가까워지려면 움츠러들고, 멀어지면 아쉬워하는 말미잘을 닮은 여자. 요즘 들어 브라운관에 비치는 탤런트들의 대다수가 그녀와 비슷하다는 사실이 아주 이따금 그를 힘들게 한다. 그것도 인기가도를 달리는 톱 탤런트의 얼굴을. 구본하는 그럴 때마다 새삼스럽게 경혜를 잡지 못했던 것을 후회한다.

보라색 제비꽃(Violet)을 닮은 여자 미경. 아무도 찾지 않는 들판에 홀로 피어나 청초한 아름다움을 살포시 감추고 있는 꽃. 장수꽃, 병아리꽃, 오랑캐꽃, 씨름꽃, 앉은뱅이꽃, 자화지정(紫花地丁)이라 불릴 만큼 다양한 느낌을 주는 바이올렛을 떠올리게 하는 여자. 소박하면서도 함부로 만지지 못하도록 잎 가장자리에 톱니를 단 여자.

욕심을 낼 줄 모르고 늘 겸허한 나머지 손해만 보았던 미경은 그가 버린 최초의 여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가장 그리운, 그러면서도 가장 미안한 여자. 다시 사랑을 시작한다면 그때 그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을 텐데. 후회해 봤자, 이제는 다 부질없는 추억인 것을.

구본하는 눈가에 달려드는 하루살이를 쫓듯 고개를 휘휘 젓는다. 별똥별처럼 무수하게 덤벼드는, 그를 괴롭히려는 악령 같은 생각들을 떨치기 위해서였다. 그 어떤 때도 이처럼 심한 적은 없었다. 한낱 스쳐 가는 작은 물결처럼 잔잔한 파동만 주었을 뿐. 이번의 경우는 그 강도가 제법 컸다. 원인은 모두 여향미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슬몃슬몃 고개를 쳐든 괜한 죄책감이 급기야 그를 송두리째 흔들어놓는다.

구본하는 신촌 로터리에서 여향미를 기다리는 10여분 동안 줄곧 허공을 쳐다보면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쫓으면 도망갔다가 잠잠해지면 다시 덤벼오는 하루살이 떼처럼 끈질긴 그녀들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그는 자기 자신이 마치 거미줄에 걸린 매미와 같다고 생각한다. 날개를 푸드득거리며 한바탕 요란하게 울어 보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거미는 나무 그늘에서 똬리를 튼 채 그저 요상한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다. 발버둥 치면 발버둥 칠수록 깊은 늪 속으로 점차 빠져든다. 어쩐 일인지 쉽게 빠져나올 것 같은데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몇 번인가. 헛헛하게 하늘을 올려다본 것이. 하늘은 잔뜩 찌푸린 채 금방이라도 비나 눈이 올 것처럼 짙은 구름으로 가려 있다. 토요일 오후, 신촌 로터리는 젊은이들로 넘쳐났다. 이제 갓 입학한 대학 새내기들로 보이는 무리들이 한결 많아 보인다. 대학가답게 거리는 젊음과 패기가 넘실댄다.

그런 그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구본하는 급작스런 경적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여향미의 빨간 자동차였다. 짙은 선글라스를 낀 여향미는 아는 사람도 언뜻 보아서는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멋을 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적당하게 위장을 했다. 서울이란 지나치게 넓으면서도 지독하게 좁은 곳이었으므로.

손목시계는 어느새 약속 시간을 20분이나 넘기고 있었다. 구본하는 20여분이나 거리에 서 있었던 것이다. 초봄이었지만 아직도 바람이 차가웠기에 몸이 엔간찮게 얼어 있었다.

“아이구, 미안!”

“오래 기다렸지? 미안, 미안…. 옷 갈아입고 오느라고 좀 늦었어.”

구본하가 차에 오르자 여향미가 애교를 떤다.

여향미는 어느 틈에 화사한 나들이옷으로 변신해 있었다. 신사복인 구본하와 단번에 비교가 되는 옷차림이다. 그 사이에 집에 다녀왔을 리가 없다. 그녀는 아침에 출근할 때 미리 준비했던 것이다.

여향미는 곧바로 차를 강변 쪽으로 몰았다. 주말이라 그런지 거리가 좀 어수선해 한동안 침묵으로 일관했다. 우려와 달리 여향미는 의외로 운전을 잘하는 편이다.

“어디로 가시게요?”

구본하가 잠시 흘렀던 어색한 공기를 깬다.

“호홋…, 겁나나 보지?”

“겁은 무슨 겁이요.”

“구 기자를 납치해 가는 건 아니니까 안심 푹 놔요.”

“납치하면 또 어떻구요?”

“그래, 그럼 오늘 하루는 내가 구 기자를 납치하는 걸로 생각해. 그러니까 내가 어디를 가든 너무 과민반응하지 말고….”

“그래도 어디 바다를 가더라도 행선지 없이 떠날 수 있나요?”

“호홋, 누가 기자 아니랄까 봐…. 집요하네.”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구요.”

“구 기자는 지방 취재를 많이 다녀 잘 알지도 모를 텐데…. 혹시 바다 사막이라고 들어 봤어요?”

“아, 태안 신두리 해수욕장이요?”

“역시 잘 아네. 그래, 언제 한번 가본 적 있어요?”

“아니요. 언제 한번 취재차 가볼까 생각은 했지만 가본 적은 없어요.”

“그럼 잘 됐네. 나도 초행길이지만….”

어느덧 차는 서해고속도로 방면으로 향하고 있었다.

3월은 어정쩡한 계절이다. 그래서인지 행락객들이 그렇게 눈에 띄지 않았다. 산야는 적어도 4월이 되어야 신록을 만끽하려는 사람들로 넘쳐날 것이다. 구본하와 여향미의 일탈 또한 철 이른 바다 여행이다. 세상의 온갖 사물들은 봄을 만끽하려고 온통 마중 나와 손을 흔들고 있다. 회색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풍광, 정갈한 흙냄새가 정신을 맑게 해준다.

서산에서 신두리로 들어오는 길에 감시 카메라가 5대나 되었다. 불로소득을 위한 투망이 지나치게 많은 편이다. 그러는 사이 구본하는 무료를 달래기 위해 줄곧 감시 카메라를 찾는 데 열중했다. 그러다 감시 카메라가 나타나기라도 하면 짐짓 소스라치게 놀란 척하며 여향미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럴 때마다 여향미는 지나친 웃음으로 화답했다.

신두리 해수욕장은 태안읍에서 603번 지방도를 따라 학암포로 가는 중간에 왼편으로 들어가야 한다. 모래와 갯벌이 약간 혼용된 해수욕장으로 경사가 완만한 5㎞의 백사장이 일품이다. ‘한국의 사막’이라는 신두리 사구를 찾아가는 길은 해수욕장 초입부터 예사롭지 않다. 뭔가 이국적인 풍경이 나타날 것 같은 특별한 예감은 신두리 해수욕장 북쪽의 물 빠진 해변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적중한다.

여름철이 가장 적합한 제철이겠지만 겨울철에는 북서풍이 정면으로 닿아 사나운 겨울 파도의 진수를 조망할 수 있는 해변이다. 옥색의 작은 파도가 하얀 거품을 일으키며 끊임없이 육지를 넘보고, 물결을 닮아 얼룩말 무늬처럼 선명한 연흔(漣痕))이 드넓은 해변에 부조처럼 새겨져 있다. 해변을 걷다 보면 어디서 나타났는지 게들이 집게발을 앞세운 채 CF 주인공처럼 당당하게 포즈를 취하면 귀엽기까지 하다.

해변으로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고, 그 사이로 해수욕장 입구로 난 길이 있다. 이곳은 사람들의 발길이 많지 않아 아직까지는 깨끗한 자연의 상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비록 국내 유일의 천연비행장인 백령도 사곶 해수욕장만큼은 못했지만 신두리 해수욕장도 비행기가 불시착하는 데 이상이 없을 만큼 모래사장이 단단했다. 실제로 백사장을 질주하는 자동차들이 눈에 띄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지 얼만 안 된 신두리 사구 일대는 바깥세상과 전혀 다른 풍채가 돋보인다. 해변 뒤쪽 산 너머에 있는 ‘신두사장’은 사막 같은 곳이다. 원시적인 생명력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소중한 사장이다. 망망한 바다에 접해 15000년을 살아온 사구는 색다른 신비감을 전해 준다. 서식하는 갖가지 동식물은 원초적인 생명력을 느끼게 해준다. 왕 쇠똥구리, 금개구리, 개미귀신, 해당화, 통보리사초 등이 그렇다.

한때 신두리 사구는 환경보전과 개발이라는 명분 아래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바람에 실려와 만들어진 모래 언덕이 바람의 방향에 따라 위치를 옮겨 다니며, 크기 또한 수시로 바뀐다. 주변에는 빨간 해당화 군락이 형성되어 파란 바다와 극명한 대조를 이뤄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는다.

고공비행하는 갈매기 무리의 날갯짓이 고고하다. 북서풍은 해변에 상륙하자마자 지친 여독을 풀 겨를도 없이 생명의 모태인 금빛 고운 모래를 품어 모래 언덕으로 나르고 또 나른다. 사막의 하루는 이렇게 반복된다. 아득한 태고부터 늘 그래왔던 것처럼.

신두리 사구의 주인은 바람이다. 모래 품은 바람이 구릉을 만들고 원하는 대로 모양을 바꾸는 '바람의 땅'이다. 파도가 해안으로 모래를 밀어내고, 바람은 그 모래를 육지로 끊임없이 실어 나른다.

농사짓기 위해 경운기나 트랙터가 오간 듯 해안에서 500m쯤 떨어진 곳에 바퀴 흔적 선명한 모랫길이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다. 구릉 위로는 갯그령, 통보리사초, 갯완두 등 희귀한 사구 식물들이 초록의 계절을 꿈꾸며 발갛게 말라 있다.

사구는 황량해 보이지만 희귀한 동식물이 서식하는 생명의 땅이다. 사구 식물들은 하나같이 뿌리가 깊다. 건조한 데다 바람이 강하고 염분이 많은 척박한 환경이라 뿌리를 깊이 내리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해당화 군락은 가늘고 촘촘한 가시를 무기 삼아 인간이나 동물의 접근을 거부하고, 접시만한 갯눈쟁이는 모래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자란다. 어느 곳이든 몇 미터만 파면 물이 나온다. 고운 모래가 물을 머금고 있어 가뭄 때는 농민들이 웅덩이를 만들어 농업용수로 사용하기도 한다.

워낙 지역이 넓고 비슷비슷한 구릉이 많아 한 번 들어가면 되돌아 나오기도 쉽지 않다. 미로에 갇혔다고나 할까. 사구 북쪽 끝에는 바다와 연결된 인공수로가 있고, 이 수로를 따라 억새밭이 펼쳐져 있다. [계속]

박하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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