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정병국 작가] “한 병 더하죠?”

“좋아요. 행운의 일곱 병, 채워야죠.”

남자는 넥타이를 풀어 가방에 쑤셔 넣었다.

화장실을 다녀와 무너지듯 앉으며 남자를 바라다보았다. 이 남자가 누구지? 뭐하는 인간이지? 왜 나랑 술 마시고 있지? 기억을 더듬었지만,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얼굴은 어디서 본 듯싶은데 그조차도 아리송했다.

세원이와 백 번째의 데이트 기념으로 영화를 본 후 첫 인연을 맺어준 음식집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었다. 이 음식점이 바로 약속한 그 식당인데 세원은 어디 가고 웬 엉뚱한 남자와 해롱거리고 있지? 세원이랑 눈썹 하나 닮지 않은 사십 대의 남자와 뭐가 좋다고 행운의 일곱 병을 채우자며 깔깔거리지?

세원은 세 살 연하였다. 두 살 연하는 연하 같지 않고, 네 살은 부담이 됐다. 이삼십 대에서는 문제없겠지만, 사십 대로 들어서면 네 살 연하의 남편은 바깥으로 눈을 돌릴 것이라는 우려에 만남 기회가 있어도 피했다. 아무리 열심히 몸매를 가꾼다 해도 사십이 넘은 여자가 젊은 남편의 눈을 꽉 잡아놓기란 하늘의 별 따기일 것이다. 그렇다고 서너 살 나이 많은 남자와의 결혼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차라리 독신으로 자유롭게 연애만 하며 살리라, 다짐하고 맹세했다.

오 개월 전 여고 동창들과의 작은 모임에서였다. 직장에서의 상사 눈치와 일의 스트레스를, 집에서의 시집 못 간 노처녀 구박을 동창들과의 수다로 푸는 자리였다. 화도 내고, 눈물도 찔끔거리고, 자지러지게 웃고 난리법석을 떨며 먹고 마시다가 지칠 무렵 샌님 같은 총각이 나타났다. 술 몇 잔에 홍당무가 된 친구의 이모 아들이었다. 이종 누나의 명령에 두말없이 차를 가지고 달려온 곱상한 총각이 한눈에 들어왔다.

세원이, 너 내일 나랑 만나. 거절하면 죽여 버릴 거야.

술김에 내뱉은 말이 연인의 만남으로 이어졌다. 나이도 기막히게 두 살도, 네 살도 아닌 딱 세 살 연하. 세상에 이런 행운이 있다니 신은 역시 공평했다. 영원히 없을 것 같았던 세 살 연하의 남자, 그것도 누구 눈치 볼 것도 없이 숨 막히게 안아주고 싶은 눈웃음은 온몸의 솜털까지 파르르 긴장시켰다.

그는 한 마디로 착하고 성실한 남자였다. 여자에 대한 배려도 세심하고 따듯했다. 연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이와 관계없이 말을 놓을 만도 한데 아니었다. 깍듯하게 존대어를 쓰면서도 슬쩍슬쩍 말을 놓으며 이어가는 화술이 온몸을 간지럽게 해 쿡쿡 웃음이 터지곤 했다.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스킨십도 이쪽에서 알게 모르게 유도하는 그 선에서 멈췄다. 뭐랄까? 허용 범위를 넘어서는 것은 국경선 침범과 같으므로 전쟁 불사의 마음이 없으니 딱 그만큼만 하겠다는 손길이라 때로는 아쉬웠다.

세원의 그런 절제는 두 가지의 혼돈을 가져왔다. 이 친구, 마마보이 아냐? 라는 의심과 연인을 정말 아끼고 사랑한다는 믿음이었다. 이 의심과 믿음은 만날 때마다 충돌하면서 헷갈렸다. 키가 훤칠한 그는 식사하거나 야외로 나갈 때 자기 취향을 고집하거나 일방적으로 밀어붙이지 않았다. 무엇을 먹고 싶어요? 어디 가보고 싶어요? 누나가 좋으면 난 무엇을 먹든, 어디를 가든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언제나 편하게 말해요. 라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세원의 따뜻한 눈빛은 행복한 믿음을 갖게 했다.

그러나 스킨십은 아니었다. 유도한 범위가 고작이었다. 그 이상의 진도를 스스로 나가지 못했다. 어느 때는 그 이상도 상관없다는 듯 몸을 밀착시켰지만, 딴청으로 슬그머니 빠져나갔다. 밤을 함께 보낼 수 있다는 눈치를 주어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이 남자 정말 여자를 모르는 건가? 아니면 여자가 하나에서 열까지 리드해야 가능한 섹스 천치바보인가? 의심하게 했다.

서른 번째의 데이트, 토요일 오후였다. 바쁘다는 세원을 납치하다시피 차에 태워 속초로 달렸다. 처음에는 난감해하더니 서울을 벗어나 영동고속도로로 접어들면서 고갯짓까지 하며 흥얼흥얼 콧노래를 불렀다.“기분 좋아?”

“예! 아주 많이요.”

“그래? 오늘 속초에서 잘 거야.”

“예?”

“오늘 속초에서 잔다고. 너랑 나랑 단둘이서.”

단둘이서 잘 거라는 말에 세원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크게 당황하지는 않았지만,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 줄 몰라 뚫어지게 쳐다봤다. 운전 때문에 세원이의 눈빛을 맞받지 못하고 힐끔 살폈다. 미동도 하지 않는 눈길에 아차 싶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차의 속도를 높였다. 빠르게 스쳐 가는 차창 밖 풍경을 바라보던 세원이가 고개를 돌렸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한참 만에 토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나는 나랑 자고 싶어요?”“그래. 넌 싫으니?”

“아니.”

“그럼 됐다. 자! 달린다.”

그날 우리는 속초에서 자지 않았다. 바닷가의 허름한 작은 횟집에서 오징어 회 한 접시만 비우고 서울로 올라왔다. 속초에서 잔다는 말은 농담이었다고 하자 그럴 줄 알았다는 세원이의 웃음에 맥이 빠졌다. 농담이라니요? 전 아닙니다. 라고 서울행을 거부하길 바랐으나 오히려 잘 됐다는 표정에 기가 찼다. 세상에! 호박 채 굴러들어온 떡을 미련 없이 차버리다니 자존심보다 화가 났다. 착하고 성실한 것도 좋지만, 남자라면 우악스럽게 굴 줄도 알아야 하는데 이건 영 숙맥이다. 속초까지 왔으면 핸들을 빼앗아 어느 호텔로 차를 몰아야 박력 있지 않은가. 올라갈까? 마음이 불편하면 돌아가자는 말에 냉큼 고개를 끄덕이다니 바보 같은 놈. 너 결혼할 때까지 내 몸에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할 줄 알아.

무산된 속초의 유혹은 상처로 남았다. 세원을 만나면서 예쁜 여자로, 매력 넘치는 섹시한 연인으로 그의 가슴에 각인되기 위해 몸매와 피부 관리에 정성을 다했다. 옷도, 화장도 삼십 대 중반이 내일인 여인의 세련된 모습보다 이십 대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조금이라도 발산하도록 꾸미고 가꿨다.

이런 내게 그는 목마른 눈길을 보내곤 했었다. 그런데 내가 먼저 연 문을 그가 닫았다. 이런 상황은 상상도 못 한 충격이었다. 그는 나의 바다에서 한 마리의 싱그러운 물고기로 황홀하게 유영해야 했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욕망의 폭발이며 나를 사랑하는 증거였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화가 가라앉으면서 민망해졌다. 먼저 유혹하는 게 아니었어. 그가 애원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문을 열어야 했어. 공연히 나이 먹은 티만 냈잖아. 생각이 예까지 미치자 이번에는 약이 올랐다. 네가 언제까지 참고 견디는지 두고 보자며 만날 때마다 곱지 않은 시선을 던졌다. 묻는 말마다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어느 날은 의도적으로 약속을 지키지 않고 바람을 맞혔다. 그러나 세원은 왜 그러느냐,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느냐, 따지지 않았다. 눈치만 살살 보며 곁을 빙빙 돌았다. 그 모습이 마치 잘못을 저지르고 엄마의 눈치를 보는 일곱 살 사내아이의 행동 같아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너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긴 해?”

“잘못? 내가요?”

“그래. 잘못도 아주 큰 잘못이야.”

“설마……? 내가 누나를 얼마나 무서워하는데. 그럴 리 없어요.”

“너 정말 몰라? 알면서 미안하니까 꿍치는 거지?”

아니었다. 눈빛과 표정, 말투 모든 게 속초의 일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오히려 누나가 왜 화가 났는지 몰라 당황스럽다며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남자 나이 삼십에 취할 자세는 아니었지만, 차라리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이 핑계 저 핑계 둘러대는 것보다 귀엽다 싶어 웃음이 터졌다.

“너 제법이다.”“뭐가요?”“여자 화 푸는 솜씨.”

“에이! 저 숙맥인 거 잘 알잖아요.”

다시 웃음이 쿡쿡 터졌다. 숙맥? 정말 그렇다면 내가 세원에게 호박넝쿨이 아니라 그가 내게 복덩어리였다. 서른네 살의 여자에게 이런 순진 무궁한 세 살 연하의 남자가 걸리다니 말 그대로 횡재다. 평생 먹여 살려도 상관없다. 돈 좀 버는 사내랍시고 바람피우는 남편보다 오로지 아내 품속이 무릉도원인 연하의 남자가 백번 낫지 않은가. 인제 그만 속초의 사건은 잊기로 한다. 다가오는 여름을 즐겁게 보내면서 가을에 결혼할 수 있도록 모든 걸 준비하기로 마음을 다잡는다.

“좋아! 용서하는 의미로 선물 하나 할게.”

“다음에요.”

“왜? 난 지금 사주고 싶어.”

술 취한 남자가 가방에 쑤셔 박았던 붉은 넥타이를 꺼내더니 용케 맸다. 몇 번 넥타이 매듭을 손보다가 물었다.

“연하의 남자에게 자동차라도 뽑아 줬어요?”

“아니요. 아무것도.”

남자의 물음에 대답하며 세원의 회상에서 빠져나왔다. 반쯤 남은 술잔을 한 모금에 비우고 다시 가득 따랐다. 남자도 빈 잔을 채우더니 앞으로 내밀었다. 잔을 부딪쳤다.

남자는 마흔 살이라고 했다. 오늘 여자와 맞선을 보았는데 딱지맞았다고 했다. 서른네 살의 노처녀 주제에 어찌나 당당하게 구는지 황당했지만, 결혼할 요량으로 애써 참았다가 망신만 당했다며 피식피식 웃었다. 소개한 분의 체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맞선 자리에 나왔다는 그녀가 뭐라 했는지 알아요? 재혼녀나 찾아보래요. 그쪽도 그렇게 생각해요? 내 얘긴 그렇고. 남자가 상체를 앞으로 내밀며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연하의 남자랑 언제 결혼해요? 미리 축하해도 됩니까?”

진정으로 하는 말은 아니었다. 너도 나처럼 퇴짜 맞은 것 아니냐는 빈정거림의 미소가 입가에 흘렀다. 이 남자에게 사실 여부를 밝혀야 할까 망설이다가 휴대폰을 꺼냈다. 약속 장소로 나오지 않은 세원이가 보내온 문자를 술 취한 남자에게 내밀었다.

누나! 나 뱀띠잖아. 이종 누나가 닭띠와 결혼하면 안 된대. 우리 그만 만나.

정병국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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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병국은
도서출판 ‘지식과사람들’ 및 문예계간 ‘시와 수상문학’ 발행인, 문예창작아카데미와 스마트폰 전자책 문학 파란풍경 마을을 운영하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