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정병국 작가] 아예 남은 연월차를 한꺼번에 신청했다.

오 일간의 연월차 휴가 첫날은 인사동의 골목 화랑까지 온통 뒤지고 다녔다. 집을 나설 때는 인사동은 한국의 미술전시회 중심지이니 동물과 새의 민화 작품 정도는 쉽게 접하리라 기대했었다.

크고 작은 미술관은 물론 고미술 판매상에도 원하는 민화가 없었다. 두 마리의 사슴이 노니는 쌍록도나 흰 사슴의 백록도, 혹은 까치와 호랑이의 작호도 등 풍속에서 식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민화가 있었다. 그러나 닭을 주제로 한 민화는 눈에 띄지 않았다. 살아 있듯 섬세한 표현의 닭 무리와 병아리가 있었으나 원하는 민화가 아니었다.

“당신 오늘 웬일이래요? 이렇게 일찍 귀가하고.”

파스텔과 스케치북, 미술용 연필이 들어 있는 쇼핑백을 눈여겨본 아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서재로 곧바로 들어가 두 다리를 책상에 올려놓자 아내의 눈길이 가늘어졌다. 의자에 깊숙이 앉아 두 발을 책상 위에 올려놓는 것은 아내가 가장 질색하는 모습이었다.

“회사에서 무슨 일 있어요?”

“없어요.”

“그럼 그 자세는 뭐예요?”

“아! 이거. 그냥 편해서요.”

책상에 다리 올릴 기회는 아내가 집에 없을 때였다. 시장에 갔거나 친구 모임으로 외출하면 이때라고 싶어 편안한 자세를 취하면 여중생의 딸과 고교생의 아들이 킥킥 웃었다. 녀석들은 엄마에게 꼼짝 못 하는 아빠 모습이 마냥 재미있는지 고자질도 했다. 엄마! 아빠 좀 봐 드리면 안 돼? 너무 불쌍해. 라고 말하면 어김없이 제발 애들 앞에서 아빠의 품위 좀 지키라는 잔소리가 떨어지곤 했다.

“혼자 있고 싶어요.”

“사랑하는 마누라도 귀찮아요?”

눈을 감았다. 그만 나가달라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아내는 여느 때와 달리 순순히 서재를 나갔다. 아내가 나가자 재빨리 방문을 잠갔다. 쇼핑백에서 스케치용 연필을 꺼내어 깎기 시작했다. 연필심을 감싼 나무가 부드럽게 깎이면서 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무엇이라고 꼭 꼬집어 설명할 수 없는 향기에서 옛 추억이 아릿아릿 피어났다.

중·고등학교 시절, 화가가 꿈이었다. 미술대회에 나가 상도 제법 받아 용기백배였다. 그러나 미대에 지원했다가 낙방하면서 화가의 꿈을 접었다. 일단 대학에 합격하고 보자는 계산으로 당시에는 인기학과가 아닌 전자공학에 지원한 것이 평생 직업이 됐다. 화가가 꿈이었던 중고교시절 그림을 그리기 전에 꼭 연필부터 깎았다. 깎지 않아도 될 연필까지 세 자루씩 깎는 것은 그림 그리기에 집중하기 위한 나만의 기도이자 의식이었다.

그때 왜 세 자루였을까? 그러고 보니 오늘도 세 자루였다. 수십 년이 지난 학생 때의 습관이 그대로 되살아나다니 신기했다. 한 자루, 한 자루 연필심을 뾰족하게 다듬다가 빙그레 웃었다. 이 습관을 아내가 안다면 무엇이라고 놀릴까. 십중팔구, 함께 야외스케치 다녔던 여학생이 보고 싶지 않으냐고 할게다. 아내는 기회만 있으면 여학생을 끌어들였으니 분명 그럴 것이다.

인터넷에서 민화의 닭과 호랑이를 검색했다. 조상들은 호랑이를 마치 귀여운 도깨비처럼 순화시켜 그렸는데 닭은 아니었다. 이 세상에 없는,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색상의 닭으로 표현했다. 대가리도 색상만 강렬하게 칠했지, 부리와 벼슬의 해학적 변형을 하지 않았다. 우연일까. 색상과 농도가 십장생도와 닭 민화가 하나의 작품처럼 닮았다.

“아빠! 엄마랑 다퉜어?”

저녁 식탁에 앉은 딸아이가 입을 삐죽거리며 물었다. 아들도 엄마 아빠의 눈치를 살피며 조금은 긴장한 표정이었다.

“아니. 싸운 것처럼 보이니?”

“응. 아빠가 서재에서 엄마 내쫓고 문까지 잠갔잖아.”

아내의 얼굴을 쳐다보자 외면하는 표정이 굳어 있었다. 가족은 늘 아내의 품속에서 행복했다. 학교 공부 외에는 자유로운 취미 활동에 아르바이트도 하는 아이들은 구김살이 없었다. 이렇게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왜 표정이 저럴까, 답답해도 아이들 앞이라 물을 수가 없었다. “아빠! 어디 아파?”

“아니.”

“그럼 왜 출근 안 했어?”

“아 그건…….”

연월차 휴가 중이라고 대답하려다가 아내를 쳐다보았다. 내 입에서 무슨 대답이 나오나, 긴장하던 아내가 찌개가 식는다며 저녁을 재촉했다. 아들도 학교에서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며 말머리를 돌려주었다.

아이들이 허락 없이 서재를 들락거리지 않지만, 혹시나 싶어 스케치북을 책장 뒤에 감췄다. 오랜만에 잡은 연필이 뜻대로 나가주지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은 닭 밑그림을 얼마나 뜯어냈는지 스케치북이 얇아 감추기가 쉬웠다. 뜯어낸 켄트지도 서랍에 잘 숨긴 후 밖으로 나갔다. 아파트단지 가까운 곳에 숲이 무성한 공원이 있어 산책하기 안성맞춤이었다.

아내가 따라나섰다. 추위가 풀렸지만, 밤공기가 만만치 않았다. 손과 귀가 시렸다. 공원의 전등 불빛에 따뜻한 입김을 뿜어내자 하얗게 사라졌다. 몇 차례 입김을 내뱉으며 서 있자 아내가 피식 웃었다.

“뭐 하는 거예요?”

“당신도 해봐요. 재미있어요.”

“관둬요. 내가 애인 줄 아세요?”

아내의 애인 줄 아세요, 라는 말에 이번에는 입김이 아닌 한숨을 쉬었다. 나도 모르게 나온 깊은 한숨이었다. 요즘 들어 이유 없이 우울해지거나 숨을 몰아쉬곤 했다. 가족 모두 건강하고 직장생활에도 불만이 없는데 문득문득 불안한 생각이 밀려오곤 했다. 뭐랄까. 이 안정이 얼마나 갈까? 라는 걱정에서부터 건강검진에서 발견되지 않은 못 쓸 병이 쑥쑥 자라고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었다.

오 일간의 연월차 휴가를 한꺼번에 낸 것은 전에 없이 감정의 변화가 심하고 무거워진 나를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처음에는 혼자 여행을 떠날까 했지만, 어느 순간 민화를 그려보자는 욕심이 생겼다. 학창시절의 화가 꿈을 민화에서 찾는 것도 좋겠다 싶어 물감이 아닌 파스텔화를 선택했다. 민화를 파스텔로 표현하면 새로운 분위기가 형성되어 재미있을 것 같아서였다.

“당신에게 부탁이 있어요. 이유는 묻지 말고 무조건 들어줘요.”

아내의 표정이 빠르게 변했다.

“큰 부탁은 아니니까 지레 걱정하지 마요.”

뚫어지게 바라보던 아내의 눈길이 땅으로 떨어졌다.

“며칠간 나를 내버려둬요. 끼니도 알아서 챙길 테니 그리 말아요.”

아내의 커다란 눈이 천천히 다가왔다. 눈물이 그렁했다.

“엉뚱한 상상 말아요. 며칠간 서재에 있을 거니까.”

발길을 돌렸다. 그때 아내가 팔을 잡았다.

“그냥 당신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아요.”

아내를 쳐다보았다.

“당신이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렇게 해요.”

“알았어요. 생각해 볼게요.” 다음 날부터 마치 묵언 수행 같은 시간이 흘렀다. 휴가 둘째 날에는 하루 한 끼로 시장기를 달랬다. 아내가 단단히 주의시켰는지 자식들도 서재에 얼씬하지 않았다. 민화의 호랑이는 그런대로 해학의 표현이 되는데 닭은 아니었다. 닭 귀신까지 신의 힘을 빌려 철저히 방어하는지 그리는 그림마다 성황당 나무 같았다. 색깔만 울긋불긋했지, 따뜻한 정감이 흐르지 않았다. 넷째 날에도 마찬가지였다. 미대 낙방으로 손을 놓았다지만, 닭이 아니라 괴물로 채색되곤 했다. 스케치는 실패를 거듭할수록 감각이 조금씩 살아났으나 색감은 아니었다. 파스텔만이 낼 수 있는 색의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하지 못하고 무너지곤 했다.

고층아파트의 13층, 창가에 서서 폭설로 하얗게 변한 관악산을 바라볼 때 문득 아내의 말이 떠올랐다. 그냥 당신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아요. 당신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렇게 해요. 마치 옆에서 속삭이는 것 같았다. 왜 그런 말을 했지? 무심히 아내의 말뜻을 헤아리다 깜짝 놀랐다.

서재 문을 열고 황급히 나가려다 멈췄다. 이제 휴가도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 이십팔 년 만에 다시 시작한 그림이 며칠 동안에 성공할 리 없었다. 호랑이와 닭 민화 그리기는 젊은 날의 꿈 찾기 출발로도 충분히 위로가 됐다. 마음에 들지 않은 닭을 뜯어 방바닥에 버리는 횟수가 거듭되면서 실소가 조금씩 도전 의지로 변했다. 그 도전의 집념을 확실히 하기 위해 아내의 오해 풀어주기를 하루 뒤로 미뤘다.

아내는 내가 실직한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해고이든 명퇴이든 관계없이 가장으로서 차마 말 못하는 심정만 헤아려 ‘그냥 당신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아요.’라고 위로한 거였다. 얼마나 놀라고 당황했을까. 그 심정을 이해하지만, 아내의 아픔과 절망을 하루 더 외면하기로 했다.

마침내 오 일간의 휴가 마지막 날 저녁, 온 식구를 서재로 불렀다.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서재로 들어오던 아내와 아들, 딸이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방바닥에는 호랑이와 닭 민화가 붉은 꽃잎처럼 널려 있었다.

“이게 다 뭐예요?”

“뭐라니? 나쁜 귀신을 물리치시는 호랑이와 닭, 벽사이시다. 벽사!”

예……?”

“마음에 드는 호랑이와 닭을 챙겨 각자의 방문에 붙인다. 마침 며칠 있으면 이천십칠 년 새해이니 잘 붙이도록. 알았나?”

아내가 와락 안기다시피 다가와 큰 소리로 물었다.

“당신 목 잘린 거 아니었어요?”

팔을 벌리며 두 아이에게 외쳤다.

“애들아! 아빠 실직한 거 아니야. 엄마가 오해했어.”

정병국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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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병국은
도서출판 ‘지식과사람들’ 및 문예계간 ‘시와 수상문학’ 발행인, 문예창작아카데미와 스마트폰 전자책 문학 파란풍경 마을을 운영하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 2017년 정유년 닭띠 해를 맞아 ‘닭을 주제’로 정병국 테마콩트를 10일부터 매주 화요일 새롭게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