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김기은 소설가] “친 동생은 아니지만, 그래도 새엄마 아들인데 스무 살이나 어린 그 동생을 어떻게 경찰에 신고하겠어. 자수하라고 설득해보려고 시간을 끌다가 잡혀버리는 통에 다 얽혀 들어간 거래. 둘째 삼촌도 교수였거든. 교수단 간첩이란 간첩누명을 쓰고 들어갔데.”

친구는 남동생과 언니 셋이 있었지만, 성이 다 달랐고, 아버지의 존재는 아무도 몰랐다.

“남들이 첩 노릇 한다고 아무리 손가락질해도 나는 엄마 원망 안 해. 자식을 데리고 먹고 살기 위해 어디든 붙어야 했으니까. 머리끄덩이 잡히고 얻어맞고 그러면 또 다른 곳으로 가고... 우리 엄만 그렇게 살았어. 5살 땐가, 쓰레기통에서 옥수수 대공이도 주워 먹어봤다. 죽죽 빨면 단 물이 나오잖아. 그거 빨아먹다가 엄마 생각이 나서 집에 들고 갔던 기억이 나. 그런데 내가 그걸 내미니까 누워있던 엄마가 일어나 앉아 그걸 받아서는 죽죽 빨아 먹더라 우리엄마는 늙은 아버지한테 온갖 귀여움 다 받으며 외동딸로 곱게만 자라서 일도 못하고, 배고프면 그냥 누워서 굶었어. 자존심이 강해서 구걸도 못하고 그러니까, 내가 바가지 들고 가서 이웃집에 가서 밥을 얻어온 적도 있어. 안 그러면 우리 엄마가 죽을 거 같더라. 나는 엄마가 죽을까봐 두려웠지 창피한 건 두렵지 않았어.”

그 친구는 결국 고1때 중퇴했다. 그런 친구에게 그 글을 보여주며 잘난 척 하는 것은 아주 비겁한 짓이다. 그것 역시 폭력이었다.

센 자가 약한 자에게 휘두르는. 힘을 과시하는 폭력. 말하자면 지적폭력이었다.

지적인 힘을 과시하고 싶어 하는 지적 폭력이 아니라면 배운 자들이 그렇게 비비 꼬아가며 일부러 어려운 말들을 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건 서로 피곤 한 거다. 그 단어를 골라 말을 해야 하는 사람이나, 그 단어를 찾아 해석해야 하는 사람이나. 만일 쉬운 말을 몰라서 그러는 거라면 그것이야 무지하거나 미친거다. 미치거나 모자란 사람이 아니고서야 알아듣기 쉬운 말을 두고 굳이 횡설수설할 이유가 없다.

처음 원고를 쓰면서 나는 비비 꼬인 말들을 좀 쉽게 풀어서 써보려고, 이리 뒤집어보고 저리 살펴보고, 다시 잘라도 보고, 도로 이어도 보고하며 끙끙거렸다.

하지만 글은 마치 껌 딱지가 붙어있는 엉킨 머리칼처럼 좀처럼 매끄럽게 풀어지지 않았다. 글의 머리칼을 잘라버리거나 그대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책을 쓴 사람 역시 나와 같은 처지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하자면 자기도 잘 모르는 남의 말을 가져다가, 엉킨 것을 풀지도 못한 채 횡설수설 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결과론적으로 보면 어쨌든 해냈다. 그 횡설수설하는 글들을 몇 번씩이나 읽고 원고지 10매를 채운 것이다.

“써 왔어?”

회합날, 회장은 나를 보자마자 인사도 받지 않고 다짜고짜 손부터 내밀었다.

나는 그 손에 원고지를 쥐어주었다.

정성껏 몇 번이나 다시 써서 삐뚤어진 글씨 하나 없이, 오자 하나 없이 깨끗하게 교정한 것이었다.

훌렁훌렁 미친년 치맛자락처럼 조심성 없이 원고지가 들쳐졌다. 속독이 아닌 다음에야 저렇게 빨리 읽을 수 있나 싶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내 원고지를, 자신의 힘을 원고지에 잔뜩 실어서는 내 앞에다 탁! 하고 내던졌다.

원고지는 거센 힘에 밀려 탁자에서 미끄러지며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바닥은 생천 청소도 않는지 아주 더러웠고 비온 뒤라 밖에서 묻혀온 물기로 질퍽거렸다.

“이게 글이야! 원고지 사용법도 몰라! 국민 학교 안 나왔어? 국민 학교만 나와도 원고지 사용법은 다 익혀! 국민 학생이 발로 써도 이 보단 낫겠네!”

그는 고개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는 그의 분노에 심장이 벌렁거리고 눈물이 차올랐다.

회원들의 눈이 내게 다 쏠렸다. 죽은 듯이 눈치껏 조용히 있었다. 무슨 조폭집단 같았다. 모두들 회장의 눈치만 살피는 집단이었다.

울지 않으려고 양 입술을 꽉 붙이고 참았지만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눈물을 막을 수가 없었다.

나는 울고 또 울었다. 아무도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뛰쳐나가고 싶었다. 이까짓 곳이 뭐라고.

하지만 나는 버티리라. 누가 이기나 보자. 이 수모를 당하고 나갈 수는 없지.

회장이 밖으로 나가버렸다.

안나 언니가 다가와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이해해. 분도형 나쁜 사람은 아니야. 기자라 그래. 원래 기자들은 그 안에서도 처음엔 다 그렇게 혹독하게 훈련받나봐. 우리들도 그런 거 다 겪고 그랬어.”

그녀가 위로했다. 교대생답게 미소를 내비치며 조용조용 위로하는 스타일이 선생님 같았다.

“이거 읽어봐. 도움이 많이 될 거야.”

제본한 얇은 복사 본 책이었다. 표지에 <해방신학의 이해>라고 쓰여 있었다.

“그냥 가져도 돼.”

앞서 읽은 책보다는 상당부분 이해할 만 했다. ‘운전사가 미쳐서 제멋대로 달리고 있는 차가 있다면 뛰어 올라가 운전사를 끌어내리는 것이 옳지 않은가’ 라는 말은 내게 많은 공감을 가져다주었다. <계속>

김기은 소설가｜master@thegolftimes.co.kr
<저작권자 © 골프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