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정병국 작가] 시월 초 귀국한다. 우리 둘 만의 공간으로 여행을 떠나자.
스물세 살의 나영은 서동호의 편지를 꽃 한 송이 없는 빈 화병 옆에 병풍처럼 접어 세워놓았다. 두 잔째의 커피를 입술만 축이듯 조금씩 마시며 읽고 또 읽었다. 한 달 전에 받은 서동호의 편지는 단 두 줄이었다. 그러나 그의 짧은 글귀는 감당할 수 없는 흥분과 기쁨, 바로 그것이었다.

지독한 무료감과 권태였다. 회사에 출근해도, 친구의 사랑 수다도 재미가 없었다. 한 마디로 만사가 귀찮았다. 어디론가 흔적없이 사라졌으면 싶었다. 그런 난감한 생활의 모든 것을 서동호의 두 줄짜리 편지가 싱그러운 세계로 바꿔놓았다.

예쁜 편지지에 볼펜으로 또박또박 쓴 편지, 그것은 처음에는 낯설었다. 이게 뭐람? 촌스럽게. 문자나 메일을 보낼 것이지. 아니면 영상전화를 하던지. 투덜거리던 나영은 아! 탄성을 터트렸다. 미국에서 연수 중 밤늦은 시각, 책상에 앉아 볼펜으로 데이트 신청을 하는 그의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나영은 서동호의 편지를 가슴에 품으며 연서(戀書)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떠올렸다.

-그래! 이게 바로 사랑의 고백이야.

나영은 출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적당히 흉내나 내던 화장, 대충 챙겨 입던 차림새를 훌훌 벗어던졌다. 아침저녁으로 맵시내기에 정성을 쏟았다. 그러자 몸과 마음에서 온갖 향기가 샘솟았다. 아파트단지 상가 건물에 있는 휘트니스클럽에도 재등록했다. 새벽잠이 많아 중도 하차했던 운동을 이번에는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새벽마다 땀으로 흠뻑 젖으며 그와의 여행을 손꼽아 기다렸다.

“나영아! 너 남자 생겼지?”

퇴근 후 와인클럽에서였다. 입사 동기인 혜림이가 수다를 떨다 갑자기 새치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떻게 생긴 남자니?”

“현빈보다 더 섹시한 남자.”

“정말?”

나영은 서동호에 대한 자랑을 한바탕 늘어놓으려다 참았다. 그의 모든 것을 혼자만의 소중한 비밀로 간직하고 싶어서였다.

“언제 선보일래?”

“선?”

“그래. 내가 면접 봐야지.”

나영은 눈을 흘겼다.

“안 돼.”

“남친 생기면 무조건 내게 쓸 만한 물건인지, 아닌지 검증받기로 약속했잖니?”

“그런 약속 한 적 없어.”

나영은 오른손으로 턱을 고였다. 와인의 감미로움이 실바람처럼 온 몸을 감쌌다. 벅차오르는 숨결에 눈을 감았다. 그와의 여행은 상상만으로도 솜털까지 한껏 부풀어 올라 터질 것만 같았다. 다가오지 않던 남자. 또 다가설 수 없을 정도로 틈을 주지 않았던 그가 해외 기술연수 중 보내온 두 줄의 편지는 기쁨과 흥분의 숲이었다. 그 숲 속에서 한 마리의 작은 새로 여행을 기다리는 초조감은 이미 그의 품안을 파고들고 있었다.

“도대체 뭐하는 녀석이야? 키는 크니?”

나영은 혜림이의 쏟아지는 질문을 들은 척도 안 했다. 여행의 환상 속으로 빠져들다 불쑥 물었다.

“혜림아! 남자들이 깜빡 죽는 여자의 몸매는 어떤 거니?”

“계집애! 단단히 병들었구나. 그 남자가 네 몸매를 거절할 만큼 잘났어?”

“그래. 난 요즘 그 사람이 좋아하는 스타일로 몸을 모두 바꾸고 싶어 미치겠어.”

나영은 목덜미도, 허리도 굵어서 고민이라고 했다. 유난히 하얀 피부에 살까지 포동포동 올라 마치 살찐 닭백숙 같다며 칵 죽고 싶다고 했다. 한순간에 날씬한 몸매가 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목숨이라도 걸고 싶은 심정이라며 징징거렸다.

혜림은 나영이의 안타까워하는 모습에 깔깔거렸다. 책과 수첩, 화장품 등속이 들어있는 가방에서 신문지 한 장을 꺼냈다.

“이 기사 읽었니?”

나영은 혜림이가 건네준, 붉은색 싸인 펜으로 표시된 기사를 읽으며 심각한 표정으로 변했다. 기사 내용은 남자들이 좋아하는 여자의 몸매에 관한 것이었다. 이상적인 몸매, 그것은 남자의 성욕을 불러일으키는 여자의 섹스매력 포인트를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남녀 관계란 어차피 본능의 욕구에서부터 출발하는 게 아닌가. 사랑이란 말도 결국 성적 본능의 결합을 미화시킨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강하게 밀려왔다. 그 순간 터지는 조바심에 온몸이 조여들었다.

“이 기사를 쓴 기자, 정신병자 아냐? 여자 몸이 무슨 섹스 도구니? 미친놈!”

나영은 정말 화가 났다.

“너 충격 받았지? 지금의 네 몸매 24, 165, 48이 아니라서 죽고 싶지?”

나영은 갑자기 와인 맛이 없어졌다. 혀끝을 녹이며 입안 가득히 감돌던 와인의 향기가 사라지고 마늘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카페의 아늑한 분위기도 서리가 하얗게 쏟아진 벌판 같았다. 한 잔씩 더 하자는 혜림이를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아파트에 들어서자마자 샤워한 나영은 알몸으로 거울 앞에 섰다. 어깨에서부터 발가락 끝까지 몸 구석구석을 뜯어보다 침대에 주저앉았다. 편지를 받은 그날 서동호와의 여행을 위해 백화점에서 산 청바지의 허리 치수가 27인치였다.

…남자들이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여자의 몸매는 허리 24인치, 키 165센티미터, 몸무게 48킬로그램으로….

화병 앞에 병풍처럼 세워놓은 그의 편지를 바라다보았다.

-둘 만의 공간으로 여행을 떠나자.

나영은 흥분과 실망의 징검다리를 넘나들며 혼란에 빠졌다. 책장 한쪽에 돌돌 말려있는 하얀 줄자를 꺼냈다. 허리에 감았다. 심호흡을 했다. 어김없는 26인치. 24인치에서 무려 2인치나 오버되는 허리둘레에 기가 막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55키로그램을 웃도는 몸무게가 커다란 바위로 가슴을 짓눌렀다.

이 몸매로 여행을 떠났다가는 그를 실망시킬게 분명했다. 그런 불행한 사태가 발생해서는 절대 안 된다. 어떤 방법으로든 반드시 날씬한 몸매를 만들어야 한다.

그의 귀국이 얼마 남지 않았다. 여자로서의 매혹적인 몸매와 피부 가꾸기에 무심했던 지난날이 눈물이 쏟아질 만큼 후회스러웠다. 침대에 얼굴을 처박고 있던 나영은 혜림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렇게 자신 없어?”

혜림은 비만 성형수술을 하면 간단히 해결되는데 왜 바보처럼 난리냐며 깔깔거렸다. 아! 맞다. 그래! 군살 빼기 클리닉을 받으면 간단히 해결되는 걸. 아랫배와 허리의 거품 살을 빼낸 후 그 부위의 피부가 다시 탄력이 붙을 때까지만 여행을 연기하는 거야.

나영은 서동호의 편지에 입맞춤했다. 내일 당장 적금을 깨는 거야. 그 돈이면 수술비로 쓰고도 상당히 남을 거야. 남은 돈으로는 인공 선탠까지 하자.

가늘어진 허리. 줄어든 몸무게. 색감 넘치는 갈색 피부-.

24인치와 48킬로그램의 몸매는 꿈이 아니다. 얼마든지 현실로 만들 수 있다. 더구나 내 키가 165센티미터 아닌가. 이건 완전 환상적인 몸매이다. 가방에서 신문기사를 꺼내어 제목을 확인했다.

‘24-165-48의 여자’

나영은 춤추듯 알몸을 빙그르르 돌렸다. 침대에 백사처럼 풀어져 있는 흰 줄자를 휴지통에다 처박았다.

거울 앞에 섰다. 흥분으로 상기된 얼굴에 마사지용 크림을 듬뿍 발랐다. 마사지를 신나게 하는 두 손의 움직임에 따라 출렁출렁 등에서 파도치는 긴 머리카락의 간지러움이 서동호의 숨결로 끝없이 밀려왔다.

정병국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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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병국은
도서출판 ‘지식과사람들’ 및 문예계간 ‘시와 수상문학’ 발행인. ‘문예창작아카데미’와 스마트폰 전자책문학 ‘파란풍경마을’을 운영하고 있다. 정병국 性풍자 콩트는 매주 화요일 연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