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김기은 소설가] 남자가 일어섰다. 바지 아래 가랑이가 축축이 젖어있었다.

1년 쯤 전인가. 올케와 이혼하고 혼자 살던 오빠가 오랜 만에 전화를 했다.

“내복 좀 사서 보내라. 거동이 좀 불편해서 내가 오줌을 자꾸 싼다.”

목소리가 어눌했다. 풍이 약간 왔다고 했다.

“그리고 소고기 넣고 고추장볶음도 좀 해서 보내라. 그게 먹고 싶다.”

“그건 할 줄 모르는데. 고추장볶음은 언니가 잘하잖아. 언니한테 해 달래지.”

“됐다. 관둬라. 네 언니랑은 얘기하고 싶지 않다.”

오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올케한테 고추장 얘기를 했더니 길길이 화를 냈다.

“참, 염치도 좋다. 내보고 해달라카라 카드나?”

“그게 아니라...”

“됐다 마. 도대체 무슨 염치로 그런 소릴 한다카드노. 내가 미쳤나. 이혼한 전 남편 고추장볶음까지 해 주그로.”

“사채 빚 때문에 위장 이혼 했다던 올케는, 시간이 지나며 완전히 달라졌다. 정말 남남이 되어버린 것이다.”

오빠를 찾긴 찾아야겠지만, 나는 영등포 그 길을 다시 기웃거리고 싶지 않았다.

“돈도 없고 중풍으로 몸도 안 좋다면서 대구에서 서울까지 왔으려고?”

“갈라카면 가지 와 못 가노. 거기가 원래 지 살던 동넨데. 무궁화호 타면 몇 푼 한다고. 기차 타면 영등포역에 딱 내리겠네. 텔레비전 보니까 미국 거지들은 비행기타고 하와이까지 간다더라.”

나는 시간 나면 한번 가보겠다 그랬다.

그러고 말았다. 가보지 않았다. ‘언제 한 번’이 이년이 되어 버렸다. 핑계라면 내 앞의 노숙자처럼 모든 것에 지쳐있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우울증이 온 듯 세상의 어떤 것에도 무관심했고 심드렁했다. 차라리 중이 될까 생각도 했지만 그것도 생각뿐이었다. 딱히 엄마의 죽음을 슬퍼한 것도 아닌데, 마음이 공황상태에 빠졌다.

어떤 비극도, 기쁨도, 슬픔도 내 것이 아닌 타인의 것이란 인식이 나를 지배했다. 아마 지진이 났다고 누가 알려줬더라도, 김정은이 핵을 던져 전쟁이 터졌다 하더라도 “그래?”하고 심드렁하니 드러눕고 말았을 것이다. TV에서 흘러나오는 처참한 지진 형상을 보며 인상을 찡그리고, 때로는 눈물도 찔끔 짜내면서도, 손으로는 과자 봉지에서 감자 칩을 꺼내 먹고, 일어나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먹듯이, 모든 것은 나랑 상관없는 다른 곳에서 행해지고 있는 타자(他者)의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이번만큼은 “그래?” 할 수가 없었다.

어제는 엄마의 3번째 제삿날이기도 했다. 제삿날만 돌아오면 난감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나는 엄마 살아생전에 철저한 불효자였으니까, 새삼 죽음의 장막 뒤에 서서 효자인척 연기하기도 싫었다. 그래봐야 그 연극을 볼 관객도 없었다. 더욱이 엄마가 돌아가시고 얼마 안 되어 오빠가 이혼하는 바람에 조카들은 제 엄마랑 착 달라붙어 연락도 잘 안 했다. 나는 철저히 혼자가 됐다.

첫 제사 때는, 올케야 이혼했으니 시어머니 제사에 무관하다 치더라도 조카들은 할머니 제사를 기억해야 되지 않을까싶어 전화를 했었다. 사실 말이 이혼이지, 결혼 생활을 20년 넘게 한 마당에 고모 조카와의 관계마저 무 자르듯 할 수는 없었고, 올케와 나 또한 필요에 따라 아주 가끔 연락은 하는 상황이었다. 마찬가지로 그때만 해도 오빠는 애들, 심지어는 올케와도 아주 가끔은 통화를 한 모양이었다.

“고모 우린 딸 손자들인데 무슨 제사야. 원래 딸은 조상 제사 안 지내잖아. 그리고 엄마가 집안에 우환이 있으면 제사를 안 해도 된데.”

엄마 아빠가 이혼한 가정문제를 집안의 우환이라고 했다.

안에서 울컥 화가 치밀었다. 죽어서 제사상조차 얻어먹지 못할 팔자인 엄마의 기구한 삶에 순간적으로 설움이 일었다. 나 혼자 광장시장에 가서 전이랑 고사리 도라지, 시금치, 고사리를 볶아놓은 나물 반찬 세트며 북어포, 엄마가 늘 사놓던 알록달록한 왕사탕도 한 봉지 샀다. 왕사탕을 보니 어릴 적 생각에 웃음이 났다. 엄마는 언제나 왕사탕을 커다란 봉지로 하나 사놓고는 아주 가끔씩 딱 한 알씩만 주곤 했다. 한 봉지 있는 걸 아는데 그렇게 딱 한 알씩 만 감질나게 쥐어주는 엄마가 언제나 야속했다. 욕심쟁이처럼 찬장에 감춰놓고 혼자만 야금야금 먹는 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한 봉지로 한 반년 간 주었는지도 몰랐다.

엄마는 뭐든지 아꼈다. 먹을 건 더 그랬다. 식구도 없었지만, 나는 한 번도 푸짐하게 담겨진 음식을 접해보질 못했다. 자반고등어 한 마리를 사면 한 토막씩 며칠씩 두고두고 먹었다. 분명 엄마가 나랑 같이 시장엘 갔다 오다가 좌판에서 사과를 한 무더기 사왔는데도 어디엔가 감춰놓고는 꺼내놓질 않았다.

우리 집은 한복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늘 방문이 열려있었다. 그래서 낮에는 늘 이웃 사람이 끊이질 않았다. 주인집 여자가 와서 문턱에 앉아 수다를 떨다 가기도 하고, 옆방 여자가 와서 떠들기도 하고, 한복을 찾으러 온 포목점 점원이나, 한복 수선을 맡긴 동네 아줌마, 할머니들이 늘 들랑거렸다.

가끔 주변에 사람이 없고 조용할 때면 엄마는 어디선가 사과 한 개 꺼내 와선 말없이 깎았다. 그러나 그 사과를 어디서 꺼냈는지를 나는 한 번도 보질 못했다.

언제나 내가 방 밖에 있거나 다른 짓을 하고 있을 때 꺼내서 알 수가 없었다. <계속>

김기은 소설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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