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풋사랑이 맛있다

[골프타임즈=박하 작가] “자, 이거 사장님 후배가 쓴 책인데 잘 내 줘.”

국장이 함봉호에게 책 한 권을 내민다.

책 제목이 『당찬 여자가 좋다』라는 수필집이다. 사장의 후배란 말에 대뜸 긴장이 된다. 김미지라는 여류작가가 쓴 책이다. 저자 약력을 보니 미국의 명문대에서 유학 생활을 한 여자이다. 함봉호는 재빨리 감을 잡는다. 사장이 유학중 만난 여자 후배이리라 짐작한다.

함봉호는 가능한 한 상상력을 펼쳐본다. 그의 미지를 향한 나래는 뜬금없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거의 적중한다. 그만큼 그의 판단력은 냉철하고 날카롭다. 과연 그 비결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사장보다 나이가 7살이나 적은 미모의 여자? 그래서인지 함봉호의 입술 사이로 미묘한 웃음이 실실 기어 나온다. 적어도 사장에게 책을 직접 부탁할 정도이면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뜻이다.

책을 대충 훑어보니 문장력이 시원찮다. 그래서 몇 줄 읽기도 전에 짜증부터 난다. 다만 ‘당찬 여자’답게 자신의 자랑만 유창하게 늘어놓고 있다. 도대체 여자가 당차게 산다는 것이 어떤 삶이며, 과연 무엇을 말하려는지 주제가 없다. 개나 소나 다 책을 내는 데 속수무책이다.

평소 같으면 이런 책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그다. 하지만 사장의 후배이기 때문에 마지못해 실어 줄 수밖에 없다. 그것도 ‘화제의 책’이라며 다른 책보다 비중 있게 실어야 한다. 철저한 프로급 위선이다.

“아니, 이런 걸 책이라고 썼으니?! 참, 어이가 없네.”

함봉호가 혼자 중얼거린다.

“무슨 책인데, 그래?”

옆에 있던 구본하가 관심을 보인다.

“사장의 후배라는데, 여자네요.”

“여자!? 혹시 미국에서 유학 생활 중 안 후배인가?”

“글쎄요. 그럴지도 모르지요.”

“쉬잇! 목소리가 너무 커.”

구본하가 주의를 준다.

“선배들, 또 이상한 얘기 한다?!”

어느 틈에 들었는지 박승례가 슬며시 끼어든다.

“아니야, 착각하지 마.”

구본하가 서둘러 적당히 발뺌한다.

그제야 두 사람은 머쓱해 하며 원고 쓰던 일을 다시 시작한다.

구본하는 영화 기사를 쓰고 있다. 오늘이 마감이어서 다들 정신이 없다.

함봉호는 신간 안내를 담당하고 있어 출판사로부터 매주 여러 권의 책을 받는다. 많을 때는 30권 이상의 책이 쌓인다. 출판사 사람들이란 자신들이 펴낸 책이 신문이나 잡지에 소개되기만을 학수고대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 쓴다. 물론 인기 있는 신문의 출판 담당기자에게는 촌지까지 주면서 부탁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함봉호도 어쩌다 가뭄에 콩 나듯 촌지를 받는 경우도 있다.

사실은 영화를 담당하고 있는 구본하의 부수입이 가장 짭짤하다. 영화사에서 기자 시사회 때 보도자료 봉투에다 돈도 함께 넣어 주기 때문이다. 함봉호는 그 사실을 알지만 모른 척한다. 구본하도 그것을 겉으로 내색하지 않는다. 신문 기자 출신인 이한무 부장도 당연히 그런 내막을 잘 안다. 그러나 이 부장도 그에 대해 별다른 불만을 털어놓지 않는다. 어차피 자신도 알게 모르게 챙기고 있는 탓이다.

아니나 다를까. 저녁 6시가 넘으면 나오는 내일자 초판 신문에 이미 ‘당찬 여자’의 책이 사진과 함께 대문짝만하게 나왔다. 함봉호는 다짜고짜 그 곳부터 읽어 본다. 본지 출판 담당기자의 고뇌를 쉽게 가늠할 수 있다. 억지로 쓴 흔적이 여기저기서 배어나온다. 사장이 내달라는 데 거역할 수 없는 노릇이다.

함봉호도 어쩔 수 없이 그와 비슷하게 쓴다. 노트북에 원고를 쓰면서도 웃음이 연이어 튀어나온다. 여기자들이 가끔 미친 사람 구경하듯 쳐다볼 정도이다. 그러다가 함봉호가 정상임을 간파하고 안도의 미소를 보낸다. 그 마음을 익히 다 이해하고도 남는다는 뜻이다.

퇴근 시간이 넘었는데도 누구 하나 일어나지 않는다. 아직도 기사 마감을 다 못한 탓이다. 이한무도 자리를 지키기 위해 쭈그린 채 소설책을 읽고 있다. 무척이나 재미있어 하는 표정이다. 이 부장은 함봉호에게 오는 책을 읽는 재미로 사는 사람 같다. 그는 의외로 그답지 않게 독서광이다. 사람은 아무리 못났어도 장점 하나씩은 갖게 마련이다.

함봉호는 저녁 약속이 있어 서둘러 원고를 마감해 이한무에게 제출했다. 함봉호가 가장 빨리 원고를 내자 이한무도 놀라는 눈치이다. 저번에 장영웅 부국장으로부터 혼난 사건이 있어 유난히 긴장하고 빨리 쓴 탓이다.

함봉호는 은근슬쩍 장영웅을 훔쳐본다. 그는 할 일도 없으면서 자리를 지키고 앉아 초판 신문을 보고 있다. 그가 이유 없이 신경이 쓰이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구 선배, 나 영화표 좀 줄래요?”

함봉호가 작은 소리로 구본하에게 말한다.

“아니, 저번에 준 거 있잖아?”

“그게 언젠데 아직도 남아 있겠어요?”

“그런가? 몇 장 줄까?”

“한 100장 정도만 주십시오.”

“아니, 어디에 쓰려고 그렇게 많이….”

“다 쓸 때가 있습니다.”

“그래, 알았네.”

구본하는 함봉호의 부탁을 웬만하면 거절하지 못한다.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서 영화 초대권을 한 무더기 꺼내 준다.

함봉호는 헤벌쭉 웃으며 머리를 조아리고 일어난다. 함봉호는 곧장 이한무 부장에게 퇴근한다고 말하고 밖으로 나간다. 여기자들의 눈이 하나같이 휘둥그레진다.

“함 선배, 벌써 원고 마감 다했어요?”

박승례가 부럽다는 눈으로 쳐다본다.

함봉호는 야릇한 웃음으로 대신 화답하고 복도로 나간다.

함봉호는 여기자들의 의아한 눈빛을 익히 알고 있다. 얼마 전에 장영웅 부국장에게 시말서를 쓴 사건이 있으므로 조심하라는 뜻이다. 하지만 함봉호는 그런 실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겠다고 이미 각오한 바 있다.

함봉호는 서둘러 약속 장소인 대한극장 앞으로 갔다. 함봉호에게 먼저 만나자고 약속한 하지혜는 이미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혜는 논설위원 비서실에 근무하는 아가씨로 22살의 애송이이다. 아직도 젖내가 나는 햇병아리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입사한 그녀는 출판국 업무부에서 근무하다가 최근에 논설위원실로 옮겼다.

하지혜는 함봉호를 잘 따르는 편이다. 유부남인 데다 특별히 부담스럽지 않은 함봉호의 성격이 어느 정도 마음에 든 탓이다. 물론 함봉호가 책이며, 영화 티켓이며, 공연 초대권을 잘 준 것도 한몫했다. 그녀는 구본하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과는 잘 교류하지 않는다.

하지혜는 우선 음흉한 구본하가 싫다고 언젠가 고백한 적이 있다. 그러고 보면 구본하가 하지혜를 음탕한 눈으로 쳐다보았다는 얘기다. 역시 구본하는 천성적인 바람둥이가 틀림없다. 하지만 함봉호는 그런 구본하를 탓한 적은 없다. 그것도 모두 자신만의 프라이버시이기 때문이다.

“많이 기다렸나?”

“네, 아주 많이….”

하지혜가 함봉호의 엄살에 눈을 흘긴다.

하지혜가 흘기는 눈이 무척이나 육감적이다. 어떨 때는 그 눈빛에 포로가 되면 정신이 어찔할 정도이다. 웬만한 남자들은 그 눈빛에 까무러칠 만큼 소스라치게 놀란다.

“미안, 미안! 오늘이 원고 마감이라서….”

“아, 그렇구나. 괜히 바쁜데 제가 불러낸 거 아닌가요?”

“음, 괜찮아. 자, 어디로 갈까?”

“함 선배님, 편한 데로 가시죠.”

“에이, 나는 구닥다리고 하니 지혜가 정하지.”

“어머머, 그렇게 자책할 정도로 세대차가 나는 것은 아닌데….”

“그럼, 어디 근사한 레스토랑에 가서 저녁이나 먹자구.”

“저기 베이스캠프로 갈까요?”

“좋아. 그러자구.”

두 사람은 레스토랑 ‘베이스캠프’로 들어간다.

‘베이스캠프’란 등산할 때, 근거지로 하는 고정 캠프를 뜻한다.

함봉호는 이 레스토랑 이름이 그런 대로 잘 지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식사하고 술 마시는 장소와 등산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마는, 오히려 그 역을 찌른 것이 우수했다는 평가이다. 다만 지하층이라는 점이 옥의 티이다. 등산과 지하층과는 어떠한 연관도 이루어질 수 없는 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이스캠프’에는 손님들이 많았다. 이름만큼이나 실내장식이 다른 데보다 돋보인 점이 매력을 끈 탓이다. 함봉호도 결혼 전에는 한동안 사귀던 애인과 자주 들리던 장소였다. 회사에서 가까운 데다 그 당시에는 그만한 분위기의 레스토랑이 드물었다. 물론 지금의 아내는 그때 만나던 그 여자는 아니었다.

하지혜는 식사로 간단하게 정식을 시키고 맥주도 주문한다.

젊은 여자 치고는 술을 제법 잘 마시는 축이다.

“더 좋은 거로 시키지? 내가 사는 건데….”

“이 집 정식도 맛있어요.”

“그래? 이 곳에 자주 오나 보지?”

“네, 가끔요. 친구들이랑….”

“여긴 좀 구시대적 냄새가 나는데…. 명동이 바로 옆에 있는데?”

“물론 명동에도 잘 나가요. 참! 영화 초대권 몇 장 있어요?”

하지혜가 눈웃음을 친다. 역시 도발적이다.

“자, 100장이야. 그나저나 이 많은 걸 어디에다 쓰려고 그래?”

“어머, 선배님은? 친구들에게 인심 쓰려는 거죠.”

“좋은 친구이군.”

“어머, 선배님 이용해 선심 쓴다고 비아냥거리는 뜻으로 들리는데요.”

“자식, 어린놈이 별걸 다 아네.”

“어머머! 어리다니요. 저도 어엿한 22살 성인이라구요!”

“그래, 그래. 축하한다. 자, 건배하자구!”

“무엇을 축하한다는 말이지요?”

“지혜의 22살 성인 기념을!”

“어머, 저는 아직도 생일이 두 달도 더 남았는데….”

“까짓 거, 생일잔치를 꼭 생일날만 하란 법 있나?”

“어머, 선배님은 역시 재치가 뛰어나요.”

“자, 한잔!”

두 사람은 맥주잔을 부딪친다. 함봉호는 단숨에 마셔 버린다. 목이 마르던 차에 마신 맥주여서 그런지 목으로 넘어가는 분위기가 남다르다. 하지혜도 역시 수준급이다. 한 번에 차가운 맥주를 마실 줄 아는 것이 보통은 넘는다.

함봉호는 상대가 알아채도록 짐짓 감탄한다. 그러자 하지혜가 그 특유의 웃음을 또 준다. 고혹적인 그녀만의 전매특허는 그야말로 혼을 빼놓는다.

다행히 때마침 나온 음식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 준다. 허기가 절정에 올라 있던 함봉호는 서둘러 식사를 한다. 하지혜는 게걸스럽게 먹는 데 열중한 함봉호를 쳐다보면서 이따금 재미있는 웃음을 준다.

함봉호는 그 웃음이 무엇을 말하는지 잘 안다. 유부남이란 다 그렇다는 뜻이리라. 예전의 연애하는 분위기라면 여자 앞에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될 행동이다. 되도록이면 조신하게 나이프와 포크를 써야 하고, 하다못해 스프를 마시는 데도 일종의 격식을 따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사내들이란 다 그렇고 그런 법이다.

어쩌면 하지혜는 함봉호에 대해 실망감을 느꼈을는지도 모른다. 자신과 같이 매력이 넘치는 젊은 여자를 앞에 두고 전혀 관심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남자는 처음 보았을 수도 있다. 물론 함봉호는 젊은 처녀와 저녁 식사를 하면서도 여느 사내들과 같은 엉뚱한 상상은 하지 않는다. 더욱이 직장 동료인 하지혜 앞에서 만큼은 당연한 처신이다.

그러나 남녀 사이에 진정으로 편안한 관계가 있을까. 과연 마음을 터놓고 아무런 부담 없이 지내는 남녀가 얼마나 될까. ‘계집 녀’에다 ‘놈 자’를 합친 한자어가 ‘좋을 호(好)’인 것을….

함봉호와 하지혜는 한동안 식사를 하면서 별다른 대화를 하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에 하지혜는 술잔을 몇 잔 비우고 맥주를 더 시킨다. 어린 나이에 비해 제법 술을 잘하는 편이다. 그런 반면 함봉호는 애초부터 오늘만큼은 적당량의 술만 마시기로 작정해 술잔 비우는 속도가 느리다.

“지혜는 남자 친구가 없나?”

“남친 없는 여자가 요즘 어디 있어요?!”

“그런가? 우리 때는 안 그랬는데….”

“아니죠. 그때도 다 내숭 떤 거라구요.”

“엉? 그게 무슨 말이야.”

“여자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 똑같다구요.”

하지혜가 술 탓인지 말이 술술 나온다.

하지혜의 얼굴이 발그레한 것이 귀엽다. 함봉호는 낙천적인 그런 지혜가 재미있다.

“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인지?”

“옛날 여자나 현대 여자나 내숭 떠는 것은 다 매일반이란 뜻이에요.”

“하하핫!”

함봉호는 무심코 너털웃음을 짓는다.

“아무튼 재미있는 말이네. 난 지혜가 마냥 어린 아가씨인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 그게 아니네.”

“호호, 그렇다고 너무….”

“참, 이런 말 하면 좀 뭐하지만….”

“무슨 말인데요? 제가 답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지혜가 우리 회사 창업주와 인척 관계라며?”

“그게 아니고 이사장님과 좀 아는 사이죠.”

“아하, 창업주의 미망인 쪽이군.”

“네, 맞아요. 그런데 무슨?”

“아니, 그냥 궁금해서….”

“그게 아닌 듯한데….”

하지혜가 말 속에 뼈를 박는다.

함봉호는 그쯤에서 멈추고 맥주잔을 들이킨다. 난처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것을 겉으로 내비칠 수는 없다. <계속>

박하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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