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박하 작가] 세 사람이 어쩔 수 없이 부딪친다. 구본하는 연기를 잘한다. 마치 우연히 만난 사람처럼 눈을 크게 치켜뜬다. 박창세와 조아라가 더 놀란 표정이다. 회사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 시장 골목길에서 조우했으니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더구나 두 남녀는 팔짱까지 낀 상태이다. 조아라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있는 반면 박창세는 백지장 같다.

“아니, 두 사람…, 서로 사랑하는 사이인가 보죠?”

구본하가 빈정거린다.

“아, 아니요.”

조아라가 서둘러 팔짱을 빼며 변명한다.

“그런데, 어떻게 이처럼 다정하게?”

구본하가 고삐를 바짝 조인다.

“아따, 평소부터 잘 아는 사이니까 그러지. 갑자기 나타나 사람 놀라게….”

박창세가 좀은 노련하게 농을 건다. 구렁이 담 넘어갈 테니 좀 봐달라는 뜻이리라.

그는 평소에 구본하와 적당히 말을 놓고 지내는 사이이다. 나이도 엇비슷한 데다 서로 같은 층에 근무하면서 자주 접하는 탓이다. 어떨 때는 마지못해 점심을 같이 먹는 경우도 있다. 물론 그럴 때는 우연히 동행한 동료들과 맞부딪친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다.

“아, 그런가? 하기는 선남선녀가 어디 짝이 따로 정해져 있는감? 아무튼 잘해 보소.”

구본하는 그쯤에서 그들을 놓아 준다.

“그나저나 여긴 어쩐 일이오?”

“아, 그냥 지나가는 길이요. 오늘 일은 그냥 못 본 척할게.”

“아무 일도 아닌데, 뭘 그래? 파하핫!”

박창세가 특유의 너털웃음을 보인다. 끝까지 구본하를 얕보겠다는 심보이다. 하기는 이럴 때는 용감무쌍한 것이 최선의 대응책이다.

“그래, 아무 것도 아니유. 자, 그럼 나중에 또 봅시다.”

구본하가 발길을 돌린다.

“구 선배! 오해하지 말아요.”

조아라가 구본하의 뒤통수에다 한마디 한다. 입단속을 해달라는 애원조의 부탁이다.

구본하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오른손을 들어 흔든다. 걱정 말라는 제스처이다. 구본하는 선술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골목길로 가는 척하다 다시 돌아온다. 함봉호와 함께 술을 마시는 것을 박창세에게 보이기 싫은 탓이다.

“박창세 그 자식, 갔습니까?”

“응.”

“아따, 구 선배는 깡도 좋습니다.”

“뭐, 그 정도야…. 자식이 말야, 너무 건방져.”

“하여간 통쾌하게 복수했습니다. 저 자식, 엄청 놀랐을 겁니다.”

“그래도 그 버릇 남 줄까?”

“그나저나 조아라도 난감했겠어요.”

“조아라도 이만저만 놀란 것이 아니겠지.”

“함 형이 언제 한번 조용히 불러 박창세와 만나지 말라고 해.”

“이미 벌써 엎질러진 물인데요, 뭘.”

“하핫, 그런가?”

“저, 우리도 이제 그만 나가죠. 제법 마셨는데….”

“그러자구. 술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 잡았다고 집사람한테 찍힐라.”

“하하! 그 정도는 아니니까, 걱정 붙들어 매두십시오.”

두 사람은 선술집을 나와 헤어졌다. 함봉호는 곧장 지하철역으로 가고, 구본하는 한잔 더할 요량으로 ‘다사랑’ 카페 쪽으로 걸어간다. 그 틈에 핸드폰으로 여향미에게 전화를 건다. 혹시나 ‘다사랑’ 카페에 있었으면 하는 소망으로. 방금 전에 함봉호가 한 말이 계속 그의 귓전을 괴롭힌 탓이다.

“지금, 어디세요?”

“아직도 회사야.”

“아니, 왜 여태 퇴근을 하지 않았습니까?”

“월말이라 장부 정리가 밀려서….”

“아, 그렇군요.”

“그나저나 무슨 일이야?”

“아따, 여 부장님 섭섭하요. 오랜만에 통화하는 것 같은데….”

“그래? 그럼 오늘 만날까?”

“그래서 전화한 건데….”

“응? 텔레파시가 통했나? 그렇잖아도 언제 한번 보고 싶었는데….”

“그래요? 잘 됐네요. 저, 다사랑에서 기다릴게요.”

“그래, 내가 한 30분 정도 있다 갈게.”

“네, 그럼….”

구본하는 전화를 끊고 ‘다사랑’으로 들어간다. 오늘 따라 손님들이 제법 들어차 있어 분위기가 왁자하다. 하지만 회사 사람들은 눈에 띄지 않는다. 만약 아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그대로 나갈 작정이었다. 구본하는 무료를 달래기 위해 미리 맥주를 시킨다. 예전의 그 아르바이트 학생은 이제 제법 세련되어 있다. 술집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일조차 시간이 약인 모양이다.

구본하는 맥주를 한잔 따라놓고 목을 축이듯 이따금 마신다. 옆자리의 젊은 여자들이 가끔씩 그를 훑어보듯 쳐다본다. 이상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듯한 표정들이다. 구본하는 그럴 때마다 묘한 눈길로 지그시 응시한다. 그를 마치 정신병자 취급하듯이 쳐다보는 데 대한 복수이다.

‘빌어먹을 년들! 내 얼굴에 뭐, 똥이라도 묻었냐? 자꾸 쳐다보게….’

구본하는 젊은 여자들을 쳐다보면서 간혹 엉뚱한 상상을 하기는 했다.

저런 여자들과는 결혼할 수 없는 것일까.

그래서인지, 그런 얼토당토 않는 상념에 빠진 그를 질책하는 듯한 눈길로 보일 때도 있다. 그러구러 적당한 선에서 이루어지는 착각도 덩달아 꼬리를 흔든다.

여향미가 들어오고 나서야 그런 덩둘한 생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오늘 따라 여향미가 더욱 예뻐 보인다. 오랜만에 만난 탓이리라.

“오랜만이라서 그런지, 오늘 따라 무척 예뻐 보이네요.”

“어머머!”

여향미는 구본하의 말을 농으로 받아들인다.

“벌써 혀가 약간 꼬부라진 걸 보니 일찍부터 마셨나 보네?”

여향미가 정곡을 찌른다.

구본하는 순간 뜨끔해진다.

여전히 여향미의 관찰력은 예리하다. 구본하는 말을 어눌하게 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아, 네. 좀 전에 손님과 한잔 하고 헤어졌어요.”

“그럼, 애초부터 나를 만나겠다는 생각이 아니고?”

“하이고, 아닙니다. 오늘 따라 신경이 좀 날카로운 것 같네요.”

“어머머…. 아니야.”

여향미가 눈을 흘긴다.

여향미가 좀은 무안했는지 맥주를 한 잔 들이킨다. 구본하는 습관처럼 술잔을 채워 준다.

음악이 부드럽다. 여향미의 취향에 딱 맞는 음악이다. 감미로운 음악이 여향미의 앞가슴과 그녀답지 않게 짧은 치마 속을 마음대로 휘저으며 돌아친다.

“여 부장님, 지금부터는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아니, 무슨 일인데?”

여향미가 정색을 한다.

“장영웅 부국장이 우리 함봉호를 괴롭히는 이유가 뭡니까?”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정말 모르세요?”

“구 기자, 정말 그럴 거야? 나를 뭘로 보는 거야!”

여향미가 갑자기 언성을 높인다.

“아니, 뭐 그런 걸 가지고 그렇게 화를 내십니까?”

“마치, 내가 모든 걸 다 아는 사람처럼 그러니까 그러지.”

“아이구, 난 그냥 혹시 아나 싶어서 물어 본 것뿐인데….”

“내가 어떻게 그 쪽 일을 다 알아?”

“그래도 여 부장님이 우리 회사 최고참 아니십니까?”

“어머머, 너무 나를 과대평가하지 마.”

“하하핫! 오해하셨다면 삼 해를 빼세요.”

여향미는 구본하의 조크에 마지못해 웃음으로 화답한다.

“그건 그렇고 장영웅 부국장이 함봉호를 괴롭힌다는 말이 무슨 말이야?”

“아, 네. 오늘 함봉호가 장 부국장한테 시말서를 썼어요.”

“시말서 쓰는 일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인가? 그럴 수도 있지.”

“하이고,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니까 그러지요.”

“왜 썼는데?”

“여 부장님은 글을 다루지 않으니까 잘 모르겠지만요. 시말서까지는 쓰지 않아도 될 일 가지고 그러니까 어이가 없는 거죠.”

“무슨 일인데?”

“함봉호가 맡고 있는 독자의 편지 중에 ‘50사단’이란 말을 빼라고 했는데 빼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빼라면 빼야지, 왜?”

“문제는 빼지 않아도 상관없는 말이니까 그러지요. 박정희나 전두환 때처럼 군바리들이 설칠 때야 당연히 빼야 하지만 요즘 같은 때 그게 무슨 소용이 있냐 이 말입니다.”

“그건 그렇군.”

“어쩌면 장 부국장이 그 당시 검열 받았던 아픈 기억을 떠올리는, 그가 곧 피해망상증 환자가 아닌가 싶어요.”

“설마, 거기까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아무래도 제가 볼 때는 뒤에 누군가 있는 거 같아요.”

“그게 누군데?”

“혹시 박철수 실장 아닐까 싶은데….”

구본하가 화살을 돌리자 여향미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어머머! 구 기자는 항상 무슨 일 있으면 박철수 실장을 물고 늘어지더라. 꼭 물귀신 작전 같이.”

“허허…, 물귀신을 본 적이라도 있나요?”

구본하는 좀은 신경질적인 여향미를 가라앉히려고 농조로 말한다.

“장 부국장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 설마 함봉호를 표적으로 괴롭힐까.”

“바로 거기에 문제가 있어요. 장 부국장이 이제 올라온 지 얼마 안 되는 사람이라는 점이지요.”

“이 부장한테 함봉호에 대해 들었겠지. 일하는 것이 시원찮다고 그러던데….”

“어? 여 부장님도 함봉호에 대해 좀 아는 것 같군요.”

“좀 알지. 더구나 함봉호는 매달 보험회사 판촉비를 50만원씩 받잖아.”

“아, 회사 돈 지출하는 것은 모두 여 부장님 소관이니까 당연히 알 수밖에요. 그 판촉비도 나올 때가 되면 귀신같이 이한무 부장이 알고 부서 전체 회식을 유도하죠. 그러나 함봉호가 일하는 것이 시원찮다는 것은 중상모략이라고요.”

“구본하 씨!”

여향미는 그쯤에서 갑자기 고음으로 경고를 한다.

째려보는 눈길이 오늘 따라 더욱 매섭다. 구본하는 화들짝 놀라 움찔한다. 여향미는 무안했던지 단숨에 술잔을 벌컥 비운다.

“구 기자는 왜 그렇게 함봉호를 두둔하는 거지? 마치 친동생이라도 되는 것 같아. 엄연히 구 기자가 선배 아니야?”

“…….”

“여기서 내가 굳이 두 사람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함봉호를 너무 감싸지 마. 그러다 괜히 오해 사면 어떡해. 함봉호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게 무슨 뜻이지요?”

“구 기자나 잘하라는 뜻이야. 알고 보면 직장 동료들이 서로 친한 듯하지만, 결국 나중에는 살아남기 위한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어.”

“음….”

구본하는 입 안에서 작은 신음을 내뱉는다.

구본하는 여향미가 여전히 함부로 얕볼 상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한다. 마치 뭔가 도둑질하려다 들킨 사람처럼 급속도로 침몰한다. 캄캄한 해구를 향해 돌진하는 주검의 그림자가 된 기분이다. 그것은 틀림없는 그의 속내였다.

구본하는 진작부터 함봉호에게 묘한 질투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선배인데도 불구하고 모든 것에 뒤처지는 듯한 패배감에 젖어 있었다. 그는 주간지를 확장하는 일도 함봉호에 못미쳤다. 매달 한 부씩의 의무 부수를 채우는데도 허덕였다. 그런 반면 함봉호는 다부수는 물론 어떤 곳이든 취재를 한번 갔다 오면 구독으로 연결시켰다. 그것은 분명 남다른 재주였다. 판매부서 직원들조차 그에 필적할 만한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다만 함봉호는 다른 기자들보다 원고 마감을 늦게 하는 편이다. 물론 잘 쓰든 못 쓰든 무조건 빨리 막고 보는 것이 원고이다. 그러나 정작 함봉호를 자세히 파악하면 원고 마감이 늦는 이유를 알 수 있다. 문제는 이한무 부장이나 장영웅 부국장이 그것을 인지하지 않는 데 있다. 그 누구보다도 신문사 사람들은 의외로 보수적이며, 오히려 콱 막힌 데가 더 많았다.

우선 가장 큰 원인은 함봉호가 부수적으로 맡고 있는 일이 다른 사람보다 훨씬 많다는 데 있다. 그는 판매관리부에서 해야 할 일까지 맡아 처리했다. 그것은 그가 다부수로 확장한 생명보험사의 3만부를 관리하는 일이다. 배가 아픈 판매부서 사람들이 남의 일을 쉽게 맡을 턱이 없다. 함봉호는 마지못해 판매 관리 일까지 겸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는 쓸데없이 다부수를 확장한 데 대해 후회할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원고 양은 다른 기자들과 엇비슷했다. 게다가 ‘독자의 편지’ 같은 잔일은 물론 퀴즈 협찬 상품까지 맡아 처리했다. 또한 토요일마다 한 번씩 구본하와 교대로 필름 교정을 보러 인쇄소에 가 늦게까지 일했다. 그러므로 원고 마감이 늦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도 윗사람들은 한결 같은 잣대로 구본하와 함봉호를 평가했다. 그와 달리 구본하는 여우같이 원고를 빨리 막아 그런 점에서는 피해 갈 수 있었다.

여향미가 한 뜻밖의 말은 구본하의 숨겨진 음모를 들춰내 일깨웠다. 구본하는 한동안 음악소리를 듣는 척하며 침묵을 지킨다. 어떤 말을 해야 파도처럼 끊긴 불협화음을 연결할까 고민 중이다.

“함봉호와 회사 간에 무슨 원한 관계 같은 게 있나요?”

“응? 무슨 또 뚱딴지같은 말을….”

여향미가 다시 한 번 놀란다.

구본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자신의 계략이 어느 정도 들어맞은 데 대한 쾌감이다.

뭔가 분명히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 여향미가 놀라는 것이 분명 눈에 띈다.

“그래도 여 부장님은 웬만한 회사 비밀은 다 알잖아요.”

“어머, 생사람 잡지 마.”

“그런데 뭘 또, 그렇게 놀라세요.”

“떽! 또 그놈의 똥 같은 기자 정신?!”

“하하핫!”

구본하는 대충 웃음으로 넘긴다.

여향미가 도망칠 수 있는 여유를 주기 위한 배려 차원이다.

그 틈에 여향미는 맥주잔을 비운다. 어느덧 술잔을 제법 비운 그녀이다. 하지만 흐트러진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제가 관여할 부분은 아니지만….”

“또 무슨 말을 하려고 그렇게 뜸을 들인대?”

“며칠 전에 강남의 모 호텔에 갔었지요?”

“나라고 호텔에 가지 말란 법 있나?”

“박 실장과 함께….”

“어머머, 그걸 어떻게 알아?”

“아주 우연히 봤지요.”

“그래, 맞아. 갔었지. 그게 어째서?”

여향미가 의외의 반격을 가한다.

구본하가 당황하는 것은 당연하다. 여향미가 순순히 꼬리를 내릴 줄 알았는데, 그것은 완벽한 오판이다.

“질투하나 봐.”

여향미는 한 술 더 뜬다.

“질투라니요? 저번에 말하길, 다시는 밀회하지 않는다 했잖아요.”

“그래. 그게 마지막이었어.”

“마지막이라면서 왜?”

“구본하! 너무 앞서 가지 마. 더 이상 그 사람 얘기 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이 회사를 떠나지 않는 한 그것이 그렇게 쉽겠어요?”

“그 사람은 유부남이야. 내가 밖에서 따로 만나지 말자면 안 만나.”

여향미가 좀은 화가 났는지 언성을 높인다.

“그러니까 두 번 다시 그 사람 얘기 하지 마.”

여향미는 갑자기 톤을 낮춘다.

불현듯 옆자리의 젊은 여자들을 의식한 탓이다.

“그래요. 그 사람은 분명히 유부남이지요.”

구본하도 목소리를 죽인다.

“그런데 왜?”

“박 실장이 지금의 부인과 결혼하기 전에 저지른 사건 모르시죠?”

“그게 무슨 말이야?”

“이사장 오빠의 딸과 결혼하기로 결정 나기 전에 이미 딴 여자가 있었데요. 심지어 임신까지 시켰지만 자신의 출세를 위해 그 여자를 버렸데요.”

“아니 그걸 어떻게?”

“처음 듣는 말이지요?”

“그래, 금시초문인 걸. 그런데 그걸 어떻게 누구한테 들었어?”

여향미의 눈이 커지면서 목소리가 더욱 작아진다. <계속>

박하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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