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거짓말은 아름답다

[골프타임즈=박하 작가] “여보! 일어나 봐요. 전화 왔어요.”

“웬 여자가 새벽에 전화를 다 한담?!”

함봉호는 아내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났다.

처음에는 몸을 흔들며 까탈을 부렸다. 비몽사몽간에 아내가 또 그 짓을 요구하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일주일 만에 만난 회포를 풀기 위해 초저녁에 한바탕 격정적인 섹스를 나누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내가 또 다시 새벽의 욕망을 꿈꾸는 것으로 착각한 탓이다.

함봉호는 금세 그것을 후회한다.

아내 홍수지는 색(色)을 밝히는 여자가 아닌데…. 교접을 나누자고 칭얼대야 겨우 마지못해 응하는 수동적인 여자인데, 그럴 리가 없다.

모두가 다 잠에서 덜 깬 상태이기 때문이다.

“여보세요?”

“아, 누구시죠?”

“네, 저 조수미예요. 새벽에 급하게 전화해서 죄송해요.”

새벽녘에 단잠을 깨운 사람은 뜻밖에도 객원기자 조수미였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사과해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

“괜찮습니다. 그건 그렇고 꼭두새벽에 무슨 일로…?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겼나요?”

함봉호는 유부녀인 조수미에게 용건만 말하라고 채근한다. 하지만 겉으로 내색할 수는 없다.

그녀는 함봉호가 태국에 가기 전에 이미 먼저 출발한 텔레비전 방송사 PD의 부인이었다. 그녀는 주간지에 기획 기사를 취재해 싣는 객원기자였다.

“네, 오늘 아침 갑자기 태국에 다녀올 일이 생겨서요. 함 기자님이 갔다 오신 지 얼마 안 되어 몇 가지 좀 여쭤 볼려구요.”

“아, 그렇군요. 그나저나 왜 갑자기 태국에 가시는 거죠?”

“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남편이 방콕의 병원에 있다는 전갈이 왔어요.”

“네, 그래요?! 무슨 일이 생겼나 보죠?”

“글쎄요, 더 자세한 이야기는 없구요. 그래도 함 기자님이 그 곳에 갔다 오신 경험이 있어, 혹시라도 뭔가 집히는 것이 없나 해서요?”

“제가 태국에 도착했을 땐 이미 남편께서 미얀마 쪽으로 넘어갔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남편 분을 만나지 못했지요.”

“아, 그래요? 그럼 태국의 병원에 있다면? 무슨 일일까요?”

“글쎄요, 아마 별일 아닐 겁니다. 혹시 말라리아에 걸렸다고 하지는 않던가요?”

“그런 얘기는 못 들었는데요. 그럼 함 기자님은 태국에 갈 때 미리 말라리아 예방주사를 맞았나요?”

“아니요. 그래도 전 아무 이상이 없더라구요. 사실 저도 그게 좀 켕기기는 했지만, 다행히….”

사실 그랬다. 함봉호도 태국에 가지 전에 미리 말라리아 예방접종을 했어야 했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그래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기에 천마다행이었다. 말라리아를 가장 걱정했던 때는 콕강을 타고 고산족 마을을 찾아갈 때였다. 그래서 함봉호는 모기에 물리지 않으려고 긴 팔의 점퍼를 입었던 것이다. 물론 함봉호가 선천적으로 체질이 강한 것도 한몫했는지 모를 일이다.

“참, 태국에 갈 때 어떤 차림으로 가야 하나요?”

“당연히 더운 나라이니까 반팔 옷을 준비하세요. 물론 긴 팔의 얇은 점퍼도 가지고 가야 해요. 그 외는 별다른 것이 없어요.”

“방콕에서의 교통편은 어떤지요?”

“아, 택시를 이용하면 돼요. 택시 기사들이 기본적인 영어를 알고 있어 어느 병원에 가자고 하면 데려다 줄 거에요. 기사들이 가끔씩 바가지 요금을 씌우는 경우도 있는데, 미리 얼마쯤 되냐고 여쭤 보는 것이 현명한 방법입니다. 물론 가이드가 없어 좀 불편하겠지만 그 정도는 웬만큼 각오해야 할 겁니다. 방콕 국제공항에 도착해 현지 여행사 직원들을 살펴보면 한국인도 눈에 띄므로, 그들을 이용하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아, 네. 아무튼 새벽에 잠을 깨워 죄송합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아, 아니…, 천만에요. 아무 일 없을 겁니다. 그럼 잘 다녀오세요.”

함봉호는 애써 조수미를 위로한다.

함봉호는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동안 어안이 벙벙하다. 그대로 잠시 넋을 잃고 아내의 화장대 거울 속의 놈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무슨 일이에요?”

침대에 누워 눈을 말똥말똥 굴리던 아내가 고혹적인 살을 이불 밖으로 끄집어내며 묻는다.

거울에 반사된 아내의 반라(半裸)를 발견한 함봉호는 눈길을 창밖으로 돌린다. 어느새 미명의 그림자가 기웃거리고 있다. 함봉호는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괜스레 발동 걸리는 유혹을 떨쳐내기 위한 자신만의 몸부림이다.

“응, 우리 주간지 객원기자인데….”

“그런데 무슨 일로 남의 여편네가 꼭두새벽에 잠을 깨워 난리람?”

“응, 자기 남편이 태국의 방콕 병원에 입원해 있다면서 나에게 자문을 구한 것일 뿐야. 무슨 엉뚱한 생각 말라구!”

여자들의 질투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함봉호는 어제 오후 3시쯤 공항에 도착해 집으로 돌아왔었다. 오늘은 태국을 다녀온 이후 처음으로 회사에 출근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하필 이런 때 불길한 사건이 터진다는 것이 엔간찮게 신경 쓰인다.

함봉호는 그 이후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조수미가 태국 현지까지 굳이 가야 할 사안이라면 뭔가 심상찮은 일이 벌어졌다는 뜻이다. 처음 조수미와 통화할 때는 담담했었는데 막상 전화를 끊고 난 이후부터는 별의별 생각이 다 드는 것이었다. 여독으로 인해 눈두덩을 짓누르던 졸음도 삽시간에 사라졌다.

그제야 함봉호의 머리를 섬광처럼 스쳐 가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방송사 프로듀서가 사망했을지도 모른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다. 그가 함봉호가 갔던 탐방 코스만 택했다면 그런 추리를 떠올릴 수 없을 터이다. 그러나 김 박사는 그가 분명히 미얀마 쪽으로 떠났다고 함봉호에게 말했었다.

함봉호는 그가 미얀마 쪽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가늠할 수 있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콕강을 타고 고산족이 있다는 곳을 직접 가보고 나서야 그런 심증을 굳혔다. 그도 당연히 상술적인 콕강의 고산족 코스를 답사했을 것이다. 그는 김 박사가 책에 쓴 내용처럼 뭔가 굉장한 발견을 하고 싶었지만 소기의 달성을 이루지 못하자 미얀마 쪽으로 강행군했을 터이다. 방송사 프로듀서로서의 사명감을 다하기 위한 특유의 탐험 정신이 발동되었을 법하다.

결국 그런 목표를 가지고 겁 없이 미얀마로 들어갔다는 자체부터 위험한 짓이었다. 더욱이 미얀마 지리를 잘 아는 가이드가 안내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안전사고를 유발한 동기였을 것이다. 그 문제는 함봉호로서도 쉽게 수긍이 가지 않았다. 아무리 색다른 취재원에 목말라 있다손치더라도 방송사 PD라면 그런 무모한 짓을 할 만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얀마는 태국보다 훨씬 미개한 지역인 데다 아직도 불안한 요인들이 많이 산적해 있었다. 그런 만큼 말라리아나 콜레라 등의 전염병에 걸릴 확률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양귀비를 재배하며 연명하는 미얀마의 고산족들이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총기를 소지하고 있다는 점도 위험 인자였다.

하지만 함봉호의 머릿속에 확연히 그려지는 그림은 없었다. 아무튼 둘 중의 하나가 분명할 듯싶었다. 그래도 무게가 더 기우는 쪽은 총기 사고였다. 그러면서도 함봉호는 내심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속으로 은근히 기대했다.

함봉호는 더 이상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짐을 정리하며 아침을 맞았다. 그동안 찍은 필름을 정돈하고, 일일이 기록했던 메모 수첩을 다시 확인하면서 기억을 더듬는 일이었다. 물론 귀국 길에 쇼핑센터에서 사온 선물도 체크해야 했다. 그가 사 온 선물은 나름대로 등급이 있었다. 주석으로 만든 화병과 재떨이 등 고가의 선물이 있는가 하면 놋쇠 수저와 열쇠고리 등 저가품도 있었다.

그래도 명색이 회사 대표로 태국을 다녀온 만큼 상사와 동료 직원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것은 관례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에 대한 함봉호의 기분이 썩 좋지 않다는 데 있었다. 그가 취재차 태국을 다녀오는데도 말이 많았듯이 해외여행 경비 문제도 껄끄럽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그의 해외 취재에 일조한 사업팀장인 배창호가 상신한 해외여행 경비가 박철수 실장으로부터 반려되고 말았던 것이다. 협찬사인 중원여행사에서 해외 여행비를 다 대주기 때문에 개인 용도의 경비는 필요가 없다는 요상한 지론이었다. 물론 그 중간에는 으레 이간질하는 놈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것은 어이없게도 해외여행을 갈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놓친 데 대한 분풀이였다.

“함 기자, 그 따위 선물은 왜 돌려?!”

구본하는 함봉호에게 대뜸 핀잔을 준다.

“…….”

함봉호는 대답 대신 웃음으로 화답했다.

역시 구본하는 함봉호가 국원들에게 돌리는 선물을 못마땅해 했다. 겨우 10만원의 국비만 받아들고 해외여행을 떠났으면서 무슨 선물이냐는 투다. 사실 함봉호도 처음에는 솔직히 선물을 사 오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러다가 가까스로 귀국하는 마지막 날에 마음을 바꿔먹고 사비로 선물을 산 것이다.

“다마네기한테는 뭘 주었나?”

“놋수저요.”

“흐흣, 아주 잘했네 그려.”

“…….”

“장영웅하고, 이한무에게도?”

“네.”

“흐이익…, 고소해라.”

구본하는 뭐가 그리 기분 좋은지 연이어 웃는다.

구본하가 느끼는 감정은 일종의 대리 만족이다. 함봉호의 알 듯 말 듯한 분풀이가 그렇게 고소할 수가 없다. 구본하도 애초부터 해외여행 경비가 반려된 데 대해 불만이 많았다. 다른 사람들이 갈 때는 일당까지 쳐주고 기타 경비까지 더해 주면서 굳이 함봉호에게만큼은 예외로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선임자로서 홍달표 부장에게도 따져 보았다. 하나 홍 부장의 둘러대는 달변을 당할 재간이 없었다.

그때 구본하의 웃음소리가 컸던지 여기자들의 눈길이 우루루 달려든다.

“또 만났네! 오늘 두 선배들, 또 한잔하겠네요!? 둘이 만나면 뭐가 그리 좋은지….”

박승례가 예의 호기심이 발동해 한마디 던진다.

그 말끝에 여기자들이 한바탕 까르르 웃는다.

다행히 이한무와 홍달표 부장을 비롯한 간부진은 국장실에서 회의 중이다. 월요일 아침이면 으레 열리는 회의이지만 오늘은 긴장감이 엿보인다. 우연찮게 함봉호가 태국에 다녀온 첫 날 요상한 일이 터졌기 때문이다. 함봉호보다 앞서 취재를 간 공중파 방송 PD 사건이 문제화된 것이다.

“함 기자, 혹시 치앙마이에 가서 조수미의 남편을 못 만났나?”

“네, 못 만났는데요.”

“하기는…. 서로 약속하고 떠난 사이도 아닌데….”

“내가 치앙마이에 도착하기 전날, 미얀마 쪽으로 넘어갔다고…, 김 박사가 말하더군요.”

“아, 그랬구나. 난 가보지 않아 잘 모르지만, 미얀마는 위험하다고 하던데…?”

“네, 그래요. 그런데, 조수미 남편이 어디 잘못이라도?”

“음…. 글쎄, 아직은 자세히 모르지만…. 죽었다는 소문이 있더라구.”

“네에!?”

함봉호는 구본하의 충격적인 말에 화들짝 놀란다.

“쉬잇….”

구본하가 서둘러 함봉호의 입을 막는다.

구본하는 그와 동시에 여기자들을 힐끗 쳐다본다. 눈치를 살피는 것이다. 아직은 여기자들에게 비밀로 부칠 필요성이 있는 탓이다. 일순간에 와르르 터지는 것이 여자들의 입이므로 조심해야 한다.

“이따 얘기하자구.”

구본하는 함봉호에게 귓속말로 말한다.

함봉호는 가슴이 급작스럽게 답답해진다. 뭔가 둔기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얼얼하다. 조수미가 당황한 목소리로 새벽에 전화를 걸었을 때만 해도 설마 했었다. 감히 그녀의 남편이 죽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계속>

박하 기자｜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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