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박하 작가] 함봉호는 홧김에 몇 순배의 맥주를 연거푸 들이킨다. 차라리 모르는 척하는 것이 현명할 듯싶다. 함봉호는 아가씨와 말이 통하지 않는 바람에 궁금한 것이 있어도 어쩔 도리가 없다. 정말 답답할 따름이다. 그래서 가이드를 통해 몇 가지를 알아본다. 고향은 어디이며, 학교는 어디까지 나오고, 월수입은 얼마이며, 애인은 있는가 하는 그런 시시콜콜한 것밖에 물어볼 수가 없다.

술이 웬만큼 오르자 불현듯 스치는 생각이 하나 떠오른다.

“참, 아까 보니까 교외에 염소가 있던데…. 한국의 염소 울음소리와 똑같겠지요?”

“하핫, 그럼요. 같은 염소인데 당연히 똑같겠지요.”

이명수는 함봉호의 물음에 웃음으로 답한다.

“그럼, 이명수 씨가 이 아가씨에게 제 염소 울음소리를 통역 좀 해주실래요?”

“허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염소 울음소리를 잘 내거든요. 그래서 이 아가씨들을 그걸로 웃겨 볼려구요. 염소 울음소리는 세계 공통어이니까.”

“아하, 그렇게 해서 저쪽 아가씨들까지 끌어모으려구요?”

“하핫, 눈치 하나는 참 빠르시네.”

“좋아요. 해보지요. 우선 이 아가씨부터 뿅 가게 만들구요.”

이명수도 갑자기 신이 나 자신감을 표출한다.

함봉호는 옛날부터 무척이나 염소를 사랑했다. 그래서 염소에 대해 아는 것이 많다. 염소의 특성부터 성격에 이르기까지 웬만해선 모르는 것이 없다. 심지어 염소를 어떻게 잡아야 고기 맛이 잘 우러난다는 것까지 꿰뚫고 있을 정도이다. 무엇보다 그는 염소 울음소리를 잘 낸다.

그 꿈 많던 어린 시절 함봉호는 염소와 거의 살다시피 했다. 장돌뱅이인 아버지가 팔다 떠넘긴 염소는 자연 그의 할당이 되었다. 아침 일찍 학교 가기 전에 염소를 들판에 매놓아 둔 뒤 학교가 파하면 달려가 돌봐야 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때를 가리지 않고 염소를 키우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염소의 울음소리를 터득한 것이다.

사실 그가 염소 울음소리에 대해 관심을 가진 데는 나름대로 사연이 있다. 한번은 새끼염소를 잃어버린 적이 있었다. 그 사실을 아버지가 알면 다리가 부러질 것이 뻔했으므로 어린 소년은 염소를 찾아 나섰다. 결국 한참 동안 헤맨 끝에 특유의 울음소리로 새끼 염소를 찾아 화를 모면할 수 있었다.

아기염소가 사라진 들판과 가까운 마을 골목길을 돌아다니면서 새끼를 찾는 엄마 울음소리를 냈다. 마침내 노부부의 집에서 아기염소의 화답이 들려왔다. 그러나 그 집 할머니는 호통을 치며 자기네 염소라고 우겼다.

그러자 어린 소년은 새끼에게 처량하게 울음소리를 내면서 스스로 목놓아 울었다. 아기염소가 어린 소년에게 반응을 보이자 할아버지는 그제야 노끈으로 묶어둔 새끼를 건넸다. 저녁 무렵 동사무소에서 새끼염소를 찾는다는 확성기 방송을 분명 들었을 법한데도 소년은 그러 돌려주는 데 고마워할 뿐이었다.

드디어 소년이 캄캄한 어둠 속에서 새끼염소를 끌고 오자 술에 취한 아버지는 감탄한 나머지 소년을 세차게 끌어안았다. 소년은 그런 아버지의 따스한 품을 두고두고 기억해냈다.

“으애애애~!”

태국 아가씨에게 첫 번째로 들려준 염소 울음소리는 바로 그것이었다. 새끼 염소가 어미 염소를 잃었을 때 내는 좀 애절한, 가느다란 음정이 끊어질 듯하면서도 이어지는 애달픈 울음소리이다.

이명수가 그 울음소리의 의미를 태국어로 통역해 주자 비로소 그 아가씨는 죽겠다고 웃는다.

이번에는 어미가 새끼를 찾는 울음소리를 낸다. 새끼의 가냘픈 것보다 더 굵은 음이 특징이다.

그런데 가관인 것은 아가씨의 웃음소리가 유난히 크다는 점이다. 그래서 무슨 재미난 일이 있나 싶어 일본인들과 어울리던 두 아가씨가 함봉호 일행 쪽으로 다가왔다.

새로 온 아가씨들은 재미난 사건이 함봉호의 염소 울음소리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한번 간청한다. 조금 전에 한 새끼와 어미의 서로 다른 염소 울음소리를 다시 들려달라는 것이다.

함봉호는 짐짓 거드름을 부리며 한 번 더 그 울음소리를 낸다. 그러자 아가씨들이 자지러질 듯 허리를 부여잡고 깔깔 웃는다. 일본인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쳐다볼 뿐 별다른 반응 없이 술만 마신다. 어쩌면 속으로는 기분이 나쁠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함봉호의 경우처럼 적개심을 품지 않을 수도 있다. 일본인들은 한국인들과 서로 입장이 틀리므로.

아가씨들은 함봉호에게 다른 울음소리도 최촉한다. 함봉호는 이명수의 주문에 약간은 시간을 벌면서 술잔을 비운다. 일단은 대성공이다. 일본인들이 다 차지하고 있던 아가씨들을 꼬드겨 세 명 모두 짝을 맞춘 탓이다. 세 명의 아가씨들이 함봉호에게 맥주잔을 연거푸 따라 준다. 술잔을 교환하다 보니 적당히 취기가 오른다. 이제부터는 그야말로 경지에 오른 염소 울음소리를 낼 수 있다. 함봉호는 알맞게 술이 들어가야 그 울음소리를 더욱 잘 낸다.

암컷 염소가 수컷 염소에게 사랑을 고백할 때, 그리고 수컷이 암컷을 꼬드길 때 내는 웃음소리를 낸다. 서로 다른 암·수컷이 각기 내는 발음이 묘하게 다르다. 이번 경우는 어딘가 자신들의 생각과 통했던지 아가씨들이 목젖까지 보일 만큼 웃어젖힌다. 너무 웃으면 배가 아프다는 것을 확인이라도 하듯 실제로 그녀들을 배꼽을 부여잡는다.

이 밖에도 기묘한 차이의 염소 울음소리를 더 들려준다. 몸에 이상이 생겨 불편할 때, 먹이가 별로 없는 곳에 밧줄을 맸을 때, 자신에게 해를 끼치려는 적이 나타났을 때, 건너기 싫은 냇물 징검다리 앞에 섰을 때…. 염소들은 놈이 스스로 앞장서서 걷게 해야 잘 간다. 그러나 염소는 사람이 앞장서서 끌고 가면 잘 따라오지 않고 버둥댄다. 염소를 많이 키워본 함봉호는 아직도 그런 염소의 고집을 이해할 수 없다.

염소 울음소리를 잘 내려면 묘하게 떨리는 성대에 악센트를 주어야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얼굴 표정이다. 아가씨들은 울음소리를 듣기 전에 먼저 함봉호의 얼굴 표정을 읽는다. 어떨 때는 울음소리가 울리기도 전에 벌써 웃는 아가씨도 있다. 어느새 얼굴 표정으로 대화의 벽을 허물 수 있게 된 터이다. 어쩌면 그녀들은 진지한 함봉호의 진정성에 이미 마음을 빼앗겼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아가씨들도 끝내 이해하지 못하는 울음소리가 있다. 한겨울 풀이 별로 없는 논바닥에, 그것도 얼음이 있는 곳에 묶어놓고 갔을 때의 울음소리이다. 이명수가 자세히 설명해도 막무가내로 도무지 못 알아듣는다. 나중에서야 아차 싶었지만, 함봉호는 태국이 열대 지역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챈다. 그러니 얼음을 이해할 턱이 없다. 그만큼 웃는 일에 흠뻑 빠진 탓이다.

아무튼 함봉호의 염소 울음소리는 술집에서 크게 히트했다. 그러는 바람에 뒤늦게 합류했음에도 노래방 기기를 일본인으로부터 뺏는 데 성공한다. 함봉호는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설사 자신이 노래를 잘 부르지는 못하더라도 같은 일행에게 노래를 부르게 했다는 사실이 즐겁다.

함봉호는 아가씨들의 성원과 김영무의 요청으로 마지못해 「울고 넘는 박달재」를 부른다. 음정이며 내용을 알 도리가 없는 아가씨들은 그저 박수만 치며 웃기만 한다. 좀 전에 염소 울음소리로 이미 마음을 빼앗은 전과(戰果)가 있다.

김영무와 이명수도 분위기에 따라 신나는 뽕짝을 부른다. 그 틈에 일본인들이 기분이 상했는지 술값을 치르고 나간다. 함봉호는 속으로 진하게 한번 웃는다. 쪽발이들을 이긴 성취감이 극에 달한다.

이만하면 목표는 달성된 셈이다. 역시 뜻한 바를 이루고 나면 모종의 뿌듯한 마음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와 함께 찾아오는 또 다른 적은 허무감이다. 함봉호는 그런 양곤마의 갈등에서 벗어나고자 마음을 추스른다.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제법 많이 마신 탓일까. 정신이 어찔어찔한 것이 갈피를 잡기조차 힘들다.

“허 참! 함 기자님은 언제 그런 기막힌 재주를 익혔다요?”

“별거 아닙니다.”

“아무튼 여기 태국 아가씨들이 다들 웃겨 죽겠다고 배꼽을 잡지 않았습니까?”

“허허, 일본 쪽발이들에 대한 나쁜 감정을 발산한다는 것이 그만 우습게 되었군요.”

“아무튼 재미있었습니다. 자, 오늘은 이제 그만 들어갑시다. 더 이상 마셨다가는 내일 일정에 좀 무리가 따르겠는데요.”

“그러지요.”

김영무가 먼저 함봉호에게 술자리를 이쯤에서 파하자고 제안한다. 어쩔 수 없는 후퇴란 뜻이다.

사실은 듣던 중 반가운 말이다. 이쯤에서 술자리를 그만두고 싶기는 함봉호도 마찬가지이다. 아직도 피로감이 누적되어 있는 탓이다.

두 사람은 술집을 나와 어젯밤에 묵었던 그 호텔로 들어갔다. 이명수는 내일을 기약하고 그가 묵고 있는 치앙라이 동쪽 오거리로 갔다. 함봉호는 객실로 들어오자마자 그의 아내에게 안부 전화를 한다. 아내는 국제전화비가 많이 나온다면서 되도록 통화 내용을 짧게 하라고 먼저 선전포고부터 한다. 쓸데없는 성화이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그래, 태국 여행은 재미있어요?”

새삼스럽게 들려오는 아내의 목소리가 이방인 같다.

“응, 그런 대로 괜찮아. 그나저나 당신과 함께 왔더라면 더욱 좋았을 걸.”

“마음에도 없는 말 하지도 말아요.”

“아니, 진짜야. 다음에는 꼭 같이 해외여행을 오자구.”

“어머, 정말인가 보네. 말만이라도 고마워요.”

“참, 지수는 잘 있나? 지수에게도 잘 있다는 안부 전해 줘.”

“네, 알았어요. 벌써 잠에 빠져들었네요. 태국이 여기보다 두 시간 더 빠르지요?”

“응, 지수랑 잠깐 통화 좀 하려고 했더니만….”

“국제전화비 많이 나와요, 그만 끊어요. 그 대신 엽서 좀 보내요. 아마 재미있을 거에요. 당신이 귀국하고 나서 뒤늦게 받아보는 엽서가….”

함봉호는 그쯤에서 아내와 전화를 끊는다.

그는 속으로 신기해 한다. 엄청나게 멀리 떨어진 이국 땅에서 통화하는데도 옆에서 하는 것처럼 잘 들리는 것이 그렇다.

“국제 엽서를 어디서 팔지요?”

함봉호는 아내로부터 주문받은 뜻밖의 엽서 문제를 김영무에게 묻는다.

“아, 그건 호텔 로비에 가면 공짜로 구할 수 있어요.”

“아, 그렇군요. 굳이 엽서를 살 필요가 없군요.”

“하지만 이 호텔에서 주는 엽서는 호텔 홍보를 위한 것으로 그렇게 기념이 될 만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 대로 괜찮은 엽서는 호텔 지하 1층의 면세점에 가면 살 수 있어요.”

“아, 그래요? 그냥 호텔 거로 쓰지요, 뭐. 저 잠깐 내려갔다 올게요.”

함봉호는 호텔 로비로 내려간다. 로비에는 그야말로 놀라 자빠질 만큼 예쁜 미인이 반기고 있다. 피부가 거무죽죽하고 눈이 움푹 파인 전형적인 태국인이지만 그녀가 가지고 있는 조건은 완벽하다. 우선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탄력 있는 피부가 가장 눈에 띈다. 함봉호는 솔직히 그 부드러운 피부를 한번 스쳐 가면서 부딪치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순전히 마음일 뿐 감히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 불과하다. 풍만한 젖가슴, 지나치게 잘록한 허리, 미끈하게 빠진 다리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함봉호는 속으로 저 여자를 한번 품어 봤으면 하는 상상을 떠올린다. 그도 어쩔 수 없는 남자였으므로, 잠시나마 그런 상념에 빠진다.

“How can I help you?”

뿐만 아니라 그녀는 영어 발음도 유창하게 한다.

하지만 함봉호는 그에 대한 답을 금방 주지 못한다. 정말 답답한 노릇이다.

해외여행을 경험하는 도중에 가장 먼저 느끼는 애로 사항이 영어 회화라는 말을 새삼 피부로 느낀다.

“Please…, I need postcard!”

함봉호는 가까스로 되지도 않는 영어를 겨우 꺼낸다.

“Hear you are.”

그녀는 어떻게 알아듣고는 금세 엽서를 한 장 내준다.

함봉호는 속으로 당황해 한다. 한 장의 엽서만 달랑 내주는 것에 대해 심한 좌절감을 맛본다. 그런 탓일까. 그는 자신도 모르게 급한 마음에 열 개의 손가락을 내보인다. 그러면서 미안하다는 뜻의 미소도 함께 보낸다. 그제야 그녀가 웃으며 엽서를 더 내준다.

함봉호는 엘리베이터에 타고 나서야 한소끔의 웃음을 토해낸다. 누군가 이런 모습을 보았다면 황당했을 터이다. 다행히 홍당무가 되어 버린 그를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

함봉호는 침대에 엎드려 엽서에다 펜을 굴린다.

“―사랑하는 지수 엄마에게.

막상 엽서를 띄우려니 무슨 글부터 써야 할지 난감하구려. 좀 전에 전화로 말한 것처럼 다음에는 진짜로 함께 여행을 오도록 합시다. 회사 일로 혼자 오게 되었지만 솔직히 당신이 맘에 걸리는 것은 사실이오. 여기는 치앙라이에 있는 호텔이오. 드디어 내일 아침 고산족들이 산다는 산악지대로 들어간다오. 막상 오지 탐험을 한다며 오긴 했지만 사람인 이상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오. 하지만 그렇게 걱정할 만큼 위험한 것은 아니요. 다만 모든 것이 처음 대하는 것들이어서 좀은 부담스러울 뿐이오.

그런데, 좀 실망스런 부분이 있소. 책을 쓴 저자가 이 곳 치앙라이에서 여행사를 한다는 사실이오. 그 전에는 그 사실을 몰랐는데, 막상 와보고 제법 놀랐다오. 당신에게는 그것이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닐지 몰라도 나로서는 큰 충격이었소. 뭔가 속은 듯한 배심감이 들기도 하고, 왠지 보이지 않는 어떤 농간에 넘어간 것만 같고….

아무튼 정신이 혼란스러울 정도라오. 어쨌든 아직은 뭐라고 확정지어 말할 수 없는 입장이오. 나중에 귀국해서 더 자세히 설명하리라. 그럼 다음에 또.―”

다음날 아침 함봉호와 김영무는 약속된 시간에 김 박사의 사무실로 갔다. 오늘 아침 식사는 어제만큼 그렇게 부담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이 딱 맞았다. 그래서인지 안남미 쌀밥도 그런 대로 먹을 만했다. 우리의 김치와는 확연히 다른 태국식 김치도 먹었다. 고춧가루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을 수 없는 백김치였다. 호텔에서 나름대로 한국인을 위해 만든 음식이지만 정작 전통의 김치 맛은 없었다.

김 박사는 약속대로 함봉호 일행과 함께 지프에 올랐다. 함봉호는 김 박사의 눈치를 살피는 일에 골몰한다. 김 박사는 마지못해 끌려오는 소처럼 힘이 없다. 그는 은연중 되도록이면 말을 피하는 눈치이다.

좁은 이차선 도로를 따라 시속 80km 정도의 속력을 내다보니 이따금 오줌이 질금질금 나올 지경이다. 이명수는 무엇이 그리 급한지 서부의 무법자마냥 난폭하게 운전한다. 하지만 누구 하나 티를 내지 않는다. 그러면 단번에 자신이 소심한 놈임을 인정하는 꼴이다. 가뜩이나 차들이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마구 내달리는 바람에 더욱 그렇다. 무엇이 그리 급한지 모를 일이다. 그런 틈에 김 박사가 태국 사람들이 좀 급한 편이라고 귀띔해 준다. <계속>

박하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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