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정병국 작가] 채희는 다시 손목시계를 봤다.

준채, 그는 약속 시간을 지킨 적이 없었다. 언제나 삼십분 정도 늦었다.

“미안해.”

그가 자리에 앉으며 짧게 말했다.

오늘도 여느 때처럼 늦은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어쩌다 추궁을 하면 웃기만 했다. 변명 한 마디 없었다. 한 번은 정말 화가 나 밖으로 나갔다. 그는 따라 나오지 않았다. 그 후부터는 따지지 않았다. 기분 상한 표정조차 짓지 않았다.

“어머니는 내려가셨어?”

그가 물었다.

어머니는 시골에 계셨다. 서울에 올라오지 않았다. 준채의 잦은 외박 요구를 피하기 위해 꾸며낸 얘기였다.

“한동안 계실 모양이에요.”

또 거짓말을 했다.

“그래……?”

준채의 얼굴에 실망이 스쳐갔다.

채희는 가슴이 답답했다.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불안이 실안개처럼 밀려왔다가 사라지곤 했다.

아직 이혼 안 했어.

준채의 직장 홍보실에 친구가 근무하고 있었다.

결혼 반 년 만에 별거했어. 그 이유가…….

친구는 주춤거렸다.

“준채, 그 사람은……아니다. 네가 직접 확인해.”

채희는 그때 친구에게 캐묻지 않았다. 스물두 살 나이에 하필 별거 남자냐는 말투에 자존심이 상했다. 만나자 마자 이혼 안 했다는 말에 모욕감마저 느꼈다. 그런 상황에서 별거의 이유를 묻는다는 건 상상조차 싫었다.

채희는 그의 손에 눈길을 던졌다. 준채는 주스가 반쯤 남은 컵을 두 손으로 잡고 있었다. 손을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주스가 컵 벽을 탔다.

“왜 속였죠?”

채희의 거두절미한 물음에 그가 손장난을 멈췄다.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어색하게 웃었다.

그녀도 내심 당황했다. 그가 무엇을 속였는지 알고 있는 게 없었다. 아내와의 별거는 그 스스로 이미 밝혔다. 지난 몇 개월간 약속 시간을 지키지 못하는 것 외에는 이렇다 할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왜 속였느냐고 묻다니…….

“그 여자와 똑같은 질문을 하는군.”

침묵하던 준채가 입을 열었다. 그는 안경을 벗어 손수건으로 안경알을 닦고 다시 썼다. 그새 얼굴색이 붉게 상기돼 있었다. 채희는 직접 확인하라던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무엇을 확인하라는 것인지 모르지만, 내친김에 달리기로 했다.

“왜 속였죠?”

채희는 애써 화가 난 얼굴을 했다.

“적어도 채희만큼은 그녀와 다를 것으로 믿었는데…….”

그가 자책하듯 말했다.

채희는 실소하듯 엷게 웃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 여자, 만났지?”

그 여자? 채희는 별거 중인 그의 아내 뒷모습도 본 일이 없었다. 설사 그녀가 찾아와도 만날 이유가 없었다. 그와 그녀는 이미 남남이나 다름없었다.

“그 여자가 무슨 말을 했어?”

그가 힘없이 말했다.

“우리 사이에 그 여자 끌어들이지 마세요. 기분 나빠요.”

채희는 심호흡을 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뜻하지 않은 상황을 어떻게 수습하나 걱정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그가 감추고 있는 결혼 여섯 달 만에 파탄까지 몰고 온 그 무엇을 반드시 알아내야 했다. 사실 준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택시 정류장에서 우연히 알게 된 그는 저돌적이었다. 충동적인 만남은 곧바로 그의 원 룸에서 섹스로 이어졌다.

그는 자신의 과거와 가족에 대한 얘기는 의식적으로 피했다. 어쩌다 말을 해도 몇 마디에 불과했다. 채희 역시 구태여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만 옆에 있으면 그만이었다.

“채희야!”

그가 불렀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꼿꼿한 자세로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채희는 날 이해 못해. 그 여자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이해보다 난 오빠의 진짜 모습을 알고 싶어요.”

채희는 의도적으로 차갑게 말했다.

“자리를 옮기자.”

그가 딴청을 하자 채희는 신경질을 냈다.

“여기서 얘기 끝내요.”

“꼭 이래야만 하니?”

일어서려던 그가 다시 눌러 앉았다.

“왜 속였죠?”

채희는 또박또박 물었다.

“변명이라도 해보세요.”

“속이지 않았어.”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채희에게 말하지 않았을 뿐이야.”

“잘도 피하네요.”

채희는 탁자 앞으로 쏟았던 상체를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그와의 말싸움이 길어지자 조바심이 났다. 말 한 마디 잘못했다가는 오히려 뒷덜미를 잡힐까, 불안했다.

“언제까지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나요?”

채희는 노골적으로 빈정거렸다. 여차 싶으면 일어나겠다는 의사 표시로 핸드백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 여자가 채희에게 들려준 것들…모두 사실이야.”

채희는 당황했다.

사실이라고? 뭐가?

채희는 그의 안경 속의 눈을 노려보다 고개를 숙였다. 종잡을 수 없는 상념들이 뒤엉켜 돌개바람으로 변했다.

“난 학부 출신도 아니고, 재벌 부모도 없어. 다행이 삽화에 재주가 있어 용케 날 포장했어. 그게 바로 나야.”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서 있다가 커피숍을 나갔다.

채희는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갑자기 키득키득 웃었다. 빛 좋은 개살구라더니 준채가 바로 그 꼴이었다. 문득 그와 별거한 아내, 그 여자를 만나 축배를 들고 싶었다. 그의 수렁에서 빠져나온 기쁨을 그녀와 함께 나누고 싶었다.

삐죽삐죽 새어나오는 웃음 속에 그녀의 전화번호를 모르는 안타까움이 짙게 묻어났다.

정병국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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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국 작가는...
도서출판 ‘지식과사람들’ 대표, 문예계간 ‘시와 수상문학’ 발행인, ‘시와수상문학 창작아카데미’를 운영하며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정병국 性풍자 콩트는 매주 화요일 연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