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정병국 작가] “해외여행을?”

혜나는 직장 선배 언니의 확인에 고개를 끄덕였다.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자동판매기의 커피는 맛이 없었다. 텁텁하고 느끼했다.

“어느 나라로?”

“모르겠어. 그냥 북유럽이라고만 했어.”

김 팀장은 여행 일정을 말하지 않았다. 혜나도 묻지 않았다. 북유럽 여행이라는 말에 흥분되어 앞뒤를 가리지 못했다. 아니, 해외여행보다 김 팀장과 함께 떠나는 여행에 더 흥분했다. 그와 단둘이 북유럽을 여행하는 기회가 오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었다. 일요일의 작은 산행 기회도 없었는데 해외여행이라니. 그것도 첫 데이트를 북유럽 여행으로 떠나다니 믿기지 않았다.

“북유럽을 다녀오려면 적어도 일주일은 잡아야 해. 그럼 회사는 어떻게 할래?”

선배 언니의 말에 혜나는 암담했다. 회사에서는 일주일씩 휴가를 줄 리 만무했다. 여름휴가조차 일요일을 낀 상태에서 삼박사일이 고작이었다. 여직원의 후생복리 휴가까지 통제하지 못해 가재눈을 하는 게 사장이었다.

“둘 중의 하나는 포기해야 해. 직장? 아니면 김 팀장?”

선배 언니의 놀리는 말투에 혜나는 심각하게 말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잖아?”

혜나는 오후 내내 직장과 김 팀장을 곱씹었다. 둘 중의 하나? 욕망은 김 팀장이 던진 기회를 잡으라고 아우성쳤다. 직장은 또 찾으면 된다. 그러나 유럽여행은 그를 완전히 사로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두 번 다시 그런 기회는 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 첫 데이트를 유럽에서 하자.

이십 대 후반의 김 팀장은 신세대 냄새가 전혀 없었다. 그의 업무는 전자책 프로그램 개발과 운용 관리이지만, 행동과 심성은 구세대 같았다. 그의 업무 지시는 편안했다. 마치 집에서 아빠와 이야기하는 기분이었다. 부원들과 회식할 때도 여직원들의 배려를 잊지 않았다. 어떤 때는 정말 노인 같다는 생각에 웃음이 터졌다.

오늘도 예외 없이 두 시간 연장 근무였다. 동물 시리즈 동화책 제작이 계획보다 지연됐기 때문이었다. 삽화의 밑그림을 잡던 옆자리의 동료가 잠시 자리를 비우자 선배 언니가 다가왔다.

“혜나야!”

선배 언니가 귓속말로 불렀다.

“김 팀장과 잤니?”

혜나는 눈을 흘겼다.

“정말 안 잤어?”

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몸살 났구나.”

선배 언니의 묘한 미소에 혜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배 피우자는 신호로 검지를 내밀어 보이곤 편집실을 나와 휴게실로 들어갔다.

“김 팀장은 지금껏 날 유혹한 적이 없어.”

혜나는 선배 언니에게 담배 한 개비를 뽑아 주며 말했다.

“그래서 거절 못 하는 거니?”

“그건 아니야.”

“그럼?”

혜나는 담배 연기를 깊게 마셨다가 천천히 뿜어냈다. 꿈 이야기를 하려다 삼켰다. 꿈에서는 언제나 자신이 먼저 그를 유혹했다. 그가 섹스를 거절할 때는 마치 강간이라도 하듯 달려들어 그의 옷을 벗기곤 했다. 근래 들어 더욱 자주 꾸는 꿈은 전보다 농도가 짙었다. 꿈에서 깨어날 때마다 현실인 양 온몸이 나른했다. 그와의 뜨거운 정사는 영혼 깊숙이 박혀 밤마다 빠지는 황홀한 세계였다.

“난 그 사람이 정말 좋아. 당장 결혼하고 싶어.”

“단단히 미쳤구나.”

“맞아! 미쳤어.”

혜나는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김 팀장은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남자였다. 출판사의 입사 첫날 그를 보는 순간 반드시 내 남자로 만들 것이다. 만약 유부남이라면 이혼시키면 된다는 생각에 온몸의 솜털까지 폭발하는 흥분을 느꼈다고 말하자 선배 언니는 기가 차다 못해 어이없다는 눈길을 던졌다.

“차 얘긴 안 하든?”

선배 언니가 갑자기 말머리를 바꿨다.

“차?”

혜나는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선배 언니가 왜 갑자기 차 이야기를 꺼내는지 그 뜻을 몰라 기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아직 운전 면허증 없어.”

“그래? 그럼 면허 따면 차 뽑아준다고 하지 않던?”

선배 언니가 묘한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 무슨 뜻이야? 김 팀장이 뭐 여직원 차 뽑아 주는 사람인가?”

혜나는 갑자기 신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언젠가, 회식 자리에서 술을 따라주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때는 그냥 무심히 들었었는데 선배 언니의 차 이야기에 흥분이 밀려왔다. 맞아. 김 팀장은 이미 내게 관심이 있었어. 내가 그걸 눈치 못 챈 거야. 바보같이.

“내게는 빨간색의 중형차가 잘 어울릴 거래.”

“그러면 그렇지. 그 수작 어디 가겠어.”

“언니! 질투하는 거지?”

“그래. 질투가 나다못해 널 죽이고 싶다. 이 멍청한 계집애야!”

혜나는 선배 언니가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가자 따라가 나란히 섰다. 창밖을 내다보는 선배 언니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거리의 밤 풍경을 바라다보는 두 눈이 촉촉이 젖어 있었다.

“너, 내가 시키는 대로 할래?”

혜나는 선배 언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거리의 소음이 창문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결혼신고부터 하자. 그렇게 한다면 함께 떠나겠다고 말해.”

“언니!”

혜나는 기가 찼다. 말문이 콱 막혔다.

“만약 그 인간이 그렇게 한다면 넌 정말 재수 좋은 아이야.”

선배 언니가 이마를 툭 치곤 휴게실을 나갔다. 혜나는 도로의 차량 행렬에 시선을 못 박았다. 선배 언니가 무엇 때문에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김 팀장의 유럽여행 데이트 신청은 지금도 꿈꾸는 기분이었다. 너무 기쁜 나머지 숨조차 쉴 수 없을 만큼 불안과 초조감이 온몸을 조여 왔다.

김 팀장은 내게 행복을 안겨줄 유일한 남자였다. 직장에서의 업무 관계이지만, 그는 늘 친절했다.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필요 이상으로 친절하거나 배려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자책 녹음 때문에 퇴근하지 않은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혜나는 급히 여직원 휴게실을 나와 녹음실로 향했다. 때마침 김 팀장이 녹음실에서 나왔다. 혜나는 “그래요. 우리 유럽으로 여행 가요.” 라고 터져 나오는 말을 황급히 삼키며 한쪽으로 비켜섰다. 김 팀장 뒤를 따라 나온 자주색 원피스의 세련된 아가씨가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얼굴과 섹시한 몸매에서 온통 뜨거운 웃음이 묻어났다.

“오빠! 아빠가 결혼해도 좋다고 했어. 우리 언제 할까?”

정병국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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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국 작가는...
도서출판 ‘지식과사람들’ 대표, 문예계간 ‘시와 수상문학’ 발행인, ‘시와수상문학 창작아카데미’를 운영하며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정병국 性풍자 콩트는 매주 화요일 연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