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정병국 작가] 주미는 다시 손목시계를 들여다봤다. 약속 시각까지 한 시간 반 정도 남아 있었다.주 대리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외부 업무가 거의 없는 사람인데 오후 내내 보이지 않았다. 책상에는 출판사에서 보내온 소포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는 업무 중에도 틈만 나면 책을 읽었다. 그가 읽는 책은 수필집이거나 명상록이 대부분이었다.

주미는 주 대리와 일 년 가까이 데이트를 하고 있었다. 사원이 몇 사람 되지 않는 작은 무역회사라 가족적인 분위기였다. 그러나 주미는 그와의 약속 장소 선택에 남달리 신경을 썼다. 사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저녁에 그 카페에서 기다릴게.”

화장실 입구에서 마주쳤을 때 주 대리가 말했다. 선약이 있어 안 된다고 말할 틈도 주지 않았다. 화장을 고치고 자리로 돌아왔을 때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주미는 퇴근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좌불안석이었다. 주 대리에게 계속 전화했지만 받지 않았다. 손재민 역시 핸드폰이 연결되지 않았다.

주 대리와 손재민.

두 사람 중 한 사람과는 약속을 취소해야 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 다 연락이 닿지 않으니 낭패였다.

재민과의 만남은 몇 개월 되지 않았다. 밤늦은 귀갓길에 우연히 택시를 합승한 것이 인연으로 이어졌다. 그는 주 대리와는 달리 낙천적이었다. 매사에 망설임이 없었다. 포장마차에서 불어터진 우동으로 저녁을 때우는가 하면, 고급 레스토랑에서 멋진 식사를 즐길 줄도 알았다. 그는 여자들의 화장과 액세서리에도 관심이 많아 이런저런 이유로 화장품과 귀걸이 등을 선물했다.

“이거 어때? 주미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샀어.”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예뻐서, 신기하게 생겨서, 향수의 향기가 너무 유혹적이어서…갖다 붙이는 게 선물 이유였다.

주미는 처음에는 그의 선물이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횟수가 잦아지면서, 또 액세서리를 워낙 좋아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받았다.

재민은 생일 선물로 금목걸이를 주었다. 며칠 후 다시 금팔찌를 채워줬다.

“목걸이와 한 세트인데 가공이 잘못됐어. 그래서 다시 부탁했어.”

주미는 그날 밤, 목걸이와 팔찌를 한 채 나른한 잠속으로 빠졌다.

주 대리는 재민과 정반대였다. 성격이 내성적인 데다 말조차 없었다. 어쩌다 말문이 터져도 읽은 책 내용이 고작이었다. 그는 다양한 분야의 책을 섭렵할 줄 알았지만, 여자에게 장미꽃 한 송이 선물할 줄 몰랐다. 생일선물도 강요해서 받았다. 그게 성현들의 명상집이었다.

낭만과 멋이 없는 그였지만, 자기 관리와 사회생활 자세는 기계처럼 철저했다. 직장의 상사나 동료와의 관계도 원만했다. 한 마디로 근면 성실한 사람이었다.

주미는 탈의실로 들어갔다. 두 회사의 여직원들이 함께 사용하는 탈의실은 제법 넓었다. 창가에 탁자와 소파도 있어 휴게실로 안성맞춤이었다.

그녀는 자동판매기에서 뽑아온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내다봤다. 어둠이 깃을 내린 밖은 말 그대로 불야성이었다.

주 대리와 손재민, 두 사람과의 약속 장소는 동쪽과 서쪽으로 정반대 방향이었다. 어느 쪽으로 가든 서둘러 가야 약속 시각을 지킬 수 있었다.

주 대리.

주미는 주 대리가 내성적이었지만, 조용한 모습을 좋아했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겸손한 몸가짐에서 안정감을 느꼈다. 그와 함께 있으면 편안했다.

손재민.

그는 활달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왠지 신이 났다. 현란한 빛 속을 뛰어다니는 느낌이었다.

그는 주 대리와는 달리 섹시한 화장에 매력을 느꼈다. 머리와 귀, 목과 팔, 손가락, 심지어 허리에까지 액세서리를 주렁주렁 달고 다녀도 못마땅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욕구를 확실하게 표현해 좋다고 했다.

그러나 주 대리는 싫어했다.

“그게 뭐니? 온갖 귀신 다 달고 다니는구나.”

화장도 마찬가지였다.

“화장은 샘물 같은 거야. 여자의 아름다움을 해맑게 비춰주는.”

주미는 주 대리의 핀잔을 귀 너머로 흘리곤 했다. 그러면서도 살짝 거울을 꺼내어 얼굴을 살펴보곤 했다.

갑자기 탈의실이 소란스러워졌다. 두 회사의 여직원들이 옷을 갈아입는다, 화장을 고친다, 난리 법석을 떨었다. 탈의실이 조용해지자 주미는 소파 등받이에 걸터앉았다. 팔짱을 꼈다. 두 남자에게서 각각 한 번씩의 문자가 왔다.

어디야? 빨리 와.

두 남자의 얼굴이 제각각 떠올랐다가 하나로 합쳐지면서 물처럼 흘러내렸다.

주미는 두 남자를 다 사랑했다. 한 남자에게서는 편안함과 아늑함을, 또 다른 사람에게서는 배꼽티 같은 육감적인 사랑을 누렸다. 혼자 있을 때는 두 남자가 동시에 보고 싶었다. 그런 밤이면 두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 대리와 함께 있을 때에는 재민의 이름조차 잊었다. 재민과 있을 때는 그 반대였다. 그래서 두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죄책감이 없었다. 오직 자신을 뜨겁게 하는 남자가 있을 뿐이었다.

주미는 천천히 유니폼을 벗었다. 옷장에서 옷을 꺼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귀걸이와 목걸이, 팔찌, 반지, 벨트 등을 핸드백에서 꺼냈다. 목걸이만 해도 여러 개였다. 목을 살짝 감싸는 실목걸이와 색색의 유리알이 염주처럼 늘어진 것도 있었다.

거울 앞에 서서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평상시대로 모든 액세서리를 제자리에 끼고 걸었다.

멋지게, 신나게, 뜨겁게 살자.

재민의 시원스러운 웃음소리가 길게 밀려왔다.

주미는 탈의실 문을 잠그며 재민의 얼굴을 떠올렸다. 낙천적인 그는 데이트 계획을 바꾸며 기다려 줄 것이다. 그러나 주 대리는 나를 기다리며 조용히 책을 볼 것이다

엘리베이터는 십오 층에 멈춰 있었다. 마음이 급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녀는 4층 비상계단으로 빨려 들어가며 재민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밤 멋진 추억 만들자.

정병국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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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국 작가는...
도서출판 ‘지식과사람들’ 대표, 문예계간 ‘시와 수상문학’ 발행인, ‘시와수상문학 창작아카데미’를 운영하며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정병국 性풍자 콩트는 매주 화요일 연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