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박하 작가] 함봉호는 카메라를 꺼내 셔터를 누른다. 신비한 연못과 이름 모를 꽃, 그리고 은은하게 퍼져 올라가는 안개를 사진으로 남기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사진의 한계 때문에 눈으로 본 만큼의 신비감은 주지 못할 것이다. 그 모습 그대로 담아갈 수만 있다면…. 함봉호는 그러지 못하는 자신이 안타깝다.

마을 입구에는 관광객을 위한 구멍가게가 하나 있다. 이런 깊은 산골짜기에 기념품을 판매하는 상점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이것 또한 풀기 힘든 수수께끼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이곳이 관광 코스로 애용됐다는 증표이다. 저녁 무렵이어선지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밥을 짓고 있다는 징조이다. 닭이며 개, 게다가 돼지까지 집 앞마당을 돌아다닌다. 우리들의 전형적인 시골 모습과 흡사하다.

함봉호는 혼자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이내 작은 한숨을 내쉰다. 이러한 것들이 김 박사를 그렇게 흥분시켰을까. 함봉호도 적지 않게 흥분이 된다. 잠시 착각에 빠질 정도이다.

이들 고산족이 진짜 고구려의 후예들이라면…. 아니 정말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함봉호는 연신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린다. 필름이 모자랄 지경이다. 낯선 풍광, 가뜩이나 환상적인 풍취를 대하면 카메라 포커스는 이성을 잃게 마련이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필름을 많이 가져오길 잘했다고 안위한다.

상점이 있는 마을 입구를 지나 시냇물 징검다리를 건너자 허름한 집들이 나타난다. 낮에 보았던 라후족 관광 마을의 대나무 이층집과 똑같은 형태이다. 함봉호와 김영무는 미리 준비한 손전등을 꺼내 든다. 미명의 빛 사이로 집들이 하나 둘 모습을 나타낸다. 그들 집에서는 어떤 불빛도 나오지 않고 있다. 마을은 온통 쥐 죽은 듯이 고요하다. 이런 곳에 과연 사람들이 살 수 있을까 의심이 갈 만큼 적막하다.

물론 이유 없이 엄습해 오는 뜻 모를 공포감은 어쩔 도리가 없다. 그와 달리 지형에 익숙한 가이드는 용감무쌍하다. 이럴 때는 무작정 따라가는 것이 최선책이다.

함봉호는 문득 어린 시절 한밤중에 공동묘지에서 치를 떨었던 일이 떠오른다. 그만큼 어둠은 사람을 질리게 만든다. 낯선 환경은 다 큰 어른에게도 여전히 두려운 존재이다.

불이 꺼진 몇 채의 집을 지나자 예외적으로 불빛이 새어나오는 집이 하나 나타난다. 가이드는 그 집으로 그들을 안내한다.

“이곳이 이 마을 족장의 집입니다.”

가이드는 함봉호에게 족장을 소개한 후 그에게 뭐라고 태국어로 말한다.

그러자 족장이 함봉호와 김영무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숙달된 인사법이다.

족장이라고 가리킨 중년 남자는 우락부락하게 생긴 근골이 장사 뺨친다. 벗은 웃통의 우람한 근육과 굵은 팔뚝이 그를 입증한다. 그런 반면 사내의 옆에 있는 아내와 두 아들, 그리고 어머니인 듯한 여인은 왜소하다. 재미있는 것은 사내가 입고 있는 옷이다. 그는 어떻게 구했는지 ‘KAL’ 마크가 선명한 천의 옷을 입고 있다. 그 옷은 국내 항공사의 유니폼이 아닌, 사기(社旗)로 만든 것이어서 더욱 이채롭다. 아무래도 이 곳을 찾았던 관광객이 준 것이 아니면 김 박사가 주었을 법도 하다.

대나무 재질의 마루로 된 거실 하나가 이들의 유일한 생활 근거지이다. 거실 한가운데에는 주전자를 올려놓은 화롯불이 하나 있고, 다른 한편에는 부엌이 있다. 그곳에는 초라한 식기 몇 개와 지저분한 집기 가 뒹굴고 있다. 희미하게 빛을 내고 있는 등불은 식용유를 태우는지 그을음이 유독 심하다. 질이 형편없는 기름인 듯하다.

함봉호는 사진 찍기가 민망했지만 프로답게 카메라를 꺼내 든다.

“죄송하지만 사진 좀 찍겠다고 말씀 좀 해주실래요.”

함봉호는 가이드에게 통역 좀 해달라고 부탁한다.

가이드가 족장에게 뭐라고 하자 사내는 씨익 웃는다. 얼마든지 찍어도 된다는 신호이다. 그 웃음은 어디선가 본 듯한 아주 익숙한 종류의 것이다.

어디서 보았을까.

함봉호는 머리가 복잡해진다. 카메라 플래시를 연이어 터뜨리면서도 쓸데없는 잡념이 그를 괴롭힌다.

아, 바로 그거였다. 지하철 입구 계단에서 발견하곤 했던 걸인의 미소다. 얼굴을 최대한 찡그려 상대방으로 하여금 온정을 강요하는 그런 웃음이다.

함봉호는 사진을 몇 장 찍고 습관처럼 족장에게 10바트의 돈을 내민다. 사내는 고개를 조아리며 돈을 받아 쥔다. 많이 해본 솜씨가 엿보인다. 함봉호는 덩달아 꿈틀거리는 두 어린아이에게도 1바트씩 준다. 김영무도 마지못해 나이가 든 여인에게 10바트를 건넨다.

“그만 늦었으니 서둘러 갑시다!”

가이드가 의외로 서두른다.

이만하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 아니냐는 무언의 압력으로 보인다. 그러나 함봉호로서는 성에 차지 않는다. 마치 일을 보고 밑을 안 닦은 사람처럼 어딘가 허전하다. 태국 사람들이라면 항문에 묻은 대변을 손으로 쓱싹 닦아 버리겠지만. 겨우 이 따위를 보려고 그 먼 길을 달려왔나 싶어 좀은 억울한 생각이 앞을 턱 가로막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다.

“그래요, 어서 갑시다. 더 지체했다가는 본전도 못 뽑겠수!”이미 다 엎질러진 물이다.

김영무가 알 듯 말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하하핫!”

함봉호는 대답 대신 웃음으로 대처한다. 겨우 그 정도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몹시 못마땅하다. 남몰래 덤벼드는 허망한 기분조차 막을 수 없다. 그동안 잔뜩 긴장한 데 비하면 얻은 수확이 밋밋한 탓이다. 솔직히 너무 겁을 집어먹었던 것은 사실이다. 특히 에이즈 창궐 지역이라는 말이 가장 그의 신경을 꼬드겼다. 하나 막상 대하고 나니 아무 것도 아니다. 그에 대한 실망감을 어떻게 풀지 요원하다.

마을 입구 어귀를 지나자 어둠 속에서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함봉호는 그 웃음의 진원지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가 이내 눈길을 돌린다. 그 어떤 누구보다 귀가 민감한 함봉호는 그 웃음소리의 주인공이 나이 어린 여자들이란 것을 직감한다. 기이하게도 남자들의 웃음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캄캄한 곳, 그리고 어린 계집애들의 웃음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 김 박사가 지적한 대로라면 일찌감치 성에 눈뜬 젊은 남녀들이 밀애를 나누고 있다는 얘기다. 성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불장난을 하는 아이들.

그 옛날 고구려 사람들도 그랬을까. 종족 번식을 위해 어릴 때부터 성에 집착한다는 이들 라후족을 닮았다면….

함봉호는 엉뚱한 추리를 한다.

또 다시 밀려오는 두려움을 떨치기 위한 그 나름대로의 방책이다. 함봉호는 전보다 훨씬 빨라진 가이드의 발걸음을 바짝 따라붙는다. 김영무도 아무런 말없이 뒤따라온다. 이제 여자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함봉호를 한동안 짓눌렀던 불안감은 지프에 올라타면서 겨우 잦아들었다. 모든 것이 다 허망한 꿈에 불과했다. 그가 생각한 환상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혹시나 했던 기대감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함봉호는 김 박사가 쓴 책 내용대로 고산족 마을에서의 낭만을 꿈꾸었다. 일테면 감성이 여린 소녀들과 모닥불을 피워놓고 고구려의 후예를 증명하는 우리 민족의 옛 가락을 흥얼거리고 싶었다. 우리 민요에만 있는 독특한 음정을 발견하는 희열을 만끽하고 싶었다. 뿐만 아니라 맛깔스런 곡주도 한잔하며 소녀들과 어울려 한바탕 신명나는 춤을 추고도 싶었다. 물론 격식이 없는 춤이겠지만 어느 정도 우리네와 비슷한 춤사위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간직한 채.

설사 족장이 나이 어린 소녀를 헌납할지라도 절대로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여육(女肉)을 범하는 실수를 하지 않으리라고 다짐도 했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족장의 딸을 잘 설득해 고이 돌려보내리라 마음먹었다. 그리고 여자는 자고로 몸을 함부로 굴리면 안 되는 것이며, 적어도 18살 이상은 된 이후에 남자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충고도 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신만의 착각이었다. 그런 일이 벌어질 만한 필요충분조건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도대체 얼토당토 않는 소설 내용만 믿고 그런 상상의 나래를 펼친 자신이 우스꽝스럽기만 했다.

함봉호는 보트를 타기 위해 지프에서 내리면서도 내내 자신을 꾸짖는다. 어딘가 된통 당한 느낌이다. 미친놈처럼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주체할 길이 없다. 그러다 가까스로 정신을 추스린 것은 보트가 캄캄한 강물 위를 달리면서부터였다.

달도 별도 없는 밤에 칠흑같은 어둠을 뚫고 거침없이 달리는 보트가 신기하다. 만일의 경우 바위에 부딪치면 보트는 산산조각일 날 만큼 빠른 속도이다. 흘러가는 강물을 따라 내려가면서 속력이 가중된다. 그런 만큼 강바람도 차갑다. 밤낮의 기온 차는 예상했던 것보다 상당하다. 이럴 때 몸을 잘못 관리하면 탈이 나기 딱 알맞다.

함봉호는 고개를 푹 숙였으면서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눈을 크게 뜨고 전방을 응시한다. 혹시도 있을지 모르는 총격에 대한 두려움도 슬몃슬몃 찾아든다. 만에 하나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야말로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는 개죽음이다. 김영무는 아예 고개를 푹 파묻고 잠이라도 자는 듯 말이 없다. 김영무는 함봉호에 비하면 훨씬 대범하다. 이렇게 태연한 것도 모두 그만의 경험 탓이다.

보트를 운전하는 가이드의 솜씨는 보통 이상이다. 그는 장애물이 없는 시야가 툭 트인 곳에서는 속도를 최대로 높이는가 하면 그 반대의 경우에는 속도를 대폭 줄인다. 그야말로 눈을 감고도 갈 만한 실력의 소유자이다. 그는 콕강에서의 보트 운전 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물이다. 그는 앞으로도 계속 이 콕강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타고난 재능의 소유자이다. 김영무의 여행사가 치앙마이 상품을 개발하면 결국 그와 손잡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보트에 탈 수 있는 인원은 5명 정도였으므로 많은 관광객이 올 경우는 여러 대를 운영할 것이다.

함봉호는 함부로 김영무의 심중을 떠볼 수는 없다. 괜히 그의 심기를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없는 탓이다. 아직까지는 김영무의 마음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다. 함봉호로서는 여행 사업이 성사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속마음이다. 물론 그것을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다. 서울로 돌아가 회사에 보고할 때도 차마 치앙마이의 비밀을 까발릴 자신이 없다. 주간지에 치앙마이 탐방 기사를 쓸 때도 마찬가지다.

함봉호는 그에 대해 한동안 괴로워할 것이다. 선배인 구본하에게는 어느 정도 고백할 수는 있겠지만 국장이나 부장에게는 차마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이미 진작부터 그렇게 마음먹고 있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일반인들은 기자의 이중성을 이해하지 못할 터이다. 촌지를 받으면 거짓말처럼 약해지는 기자의 마음을 쉽게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일말의 양심을 느끼지 못하는 기자의 속셈을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다행히 보트는 1시간이 약간 더 걸려 선착장에 도착한다. 올라갈 때보다 배 이상 단축된 것이다. 그동안 이를 얼마나 부딪쳤는지 치아가 시큰거릴 정도이다. 어느새 온몸이 물에 젖어 있다는 사실을 새삼 발견한다.

“고생하셨습니다. 다음 기회에 또 만납시다.”

김영무가 가이드에게 악수를 청하며 인사한다.

“네, 좀더 일찍 오셨어야 했는데…. 아무튼 고생하셨습니다.”

가이드가 허리를 최대한 굽히며 계면쩍어 한다.

김영무는 지갑에서 100바트를 꺼내 가이드에게 준다. 함봉호는 속으로 숨을 몰아 내쉰다. 사실 김영무가 팁을 안 주었다면 함봉호가 주어야겠다고 이미 계산했다. 그저 무사히 사고 없이 살아 돌아온 데 대한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함 기자님, 고생 많았지요? 자, 이제 어서 빨리 호텔로 돌아갑시다. 배도 고프고, 술도 고프고….”

“하이고, 고생은요? 당연한 걸 가지고…. 오히려 김 전무님이 고생 많았습니다. 괜한 걸 가지고….”

“아니, 괜하다니요? 좋은 구경 했는데요.”

“그래요?”

함봉호는 김영무의 예상 못한 말에 당황한다. 오히려 자신이 민망해진다. 쓸데없이 부스럼을 긁을 필요는 없는데.

“자, 이제 치앙마이는 오늘로 끝입니다. 내일 마지막으로 방콕 주변 관광을 마치고, 모레 아침 일찍 서울행 비행기를 탑시다.”

“아, 그래요? 난 이대로 태국 관광이 끝인 줄 알았는데….”

“에이, 그럴 리가요? 이렇게 일부러 오기도 힘든데 볼 거는 다 봐야지요. 함 기자님은 언제 다시 올 기약도 없는데…. 앞으로 관광객을 위한 코스 또한 이대로 진행될 겁니다.”

“그럼 내일은 어디를 가는 거죠?”

“내일 보면 알겠지만 방콕이 동양에서 가장 이국적인 도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방콕은 현대적인 발전을 추구하면서 과거의 영광을 증언하는 풍부한 기념물들을 그대로 보전하고 있지요. 왕궁, 에메랄드 사원, 새벽 사원, 그리고 방콕에 소재한 400 군데 이상의 불교 사원들을 보면 경외심마저 느끼게 될 것입니다. 라차버핏 사원은 황금빛 첨탑, 사각 누각, 원형의 수도원 등으로 구성된 특이한 건물 배치가 일품이지요. 태국의 젖줄인 짜오 프라야강과 크고 작은 톤부리의 운하들도 충분한 볼거리이지요. 또한 음식 예술의 정수로 알려진 태국 음식을 맛보는 즐거움도 굉장한 경험이 될 것입니다. 튼실한 새우, 싱싱한 바닷가재, 다양한 어류 등 풍부한 해산물 요리를 매운 태국식이나 색다른 유럽식으로 드실 수 있습니다. 갈거리의 포장마차에서부터 우아한 레스토랑, 유람선상에서의 낭만적인 식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메뉴를 갖춘 여러 종류의 음식점들을 기호에 따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방콕에서 약 80Km 떨어진 아유타야 유적도 볼 만합니다. 1767년 멸망할 때까지 400여년 동안 태국의 수도로 번성했던 아유타야는 17세기에 동양에서 가장 융성한 도시였습니다. 방콕 서부 나콤파롬에 가면 세계 최고 높이를 자랑하는 불교 기념물, 또 2차세계대전중 연합국에 의해 만들어진 콰이강의 다리가 있습니다. 방콕과 나콤파롬의 중간 지점에는 태국의 휴양지이자 전통생활 양식을 소개해 주는 문화 센터인 로즈 가든이 있고, 그 근교에는 삼프란 코끼리 집과 동물원이 있습니다. 방콕에서 남서쪽으로 30Km 떨어진 지점에는 3만여 마리의 파충류가 서식하는 악어농장이 있습니다.”

김영무는 해외여행의 달인답게 줄줄 외우다시피 말을 잘한다.

함봉호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려는 김영무로부터 친구 이상의 애틋한 감정을 느낀다. 그와 함께 비로소 침묵의 참뜻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서울에 돌아가서도 김영무의 우정에 대한 예의로 침묵을 지키기로 다짐하면서…. 침묵은 금이요, 방언은 은이기 때문에. <계속>

박하 기자｜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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