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박하 작가] 그 방송사는 떠나기 전부터 이미 ‘치앙마이, 현지를 가다’라는 예고편을 방영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홍보하고 있었다.

“원시와 현대가 공존하는 히말라야 산맥의 동쪽 끝자락 치앙마이는 원시림으로 둘러싸인 청정지역이다. 이 곳은 수많은 소수민족들이 원시적인 삶을 살고 있는 지구상 마지막 소수 민족의 보고이다. 이런 오지에 우리와 같은 공기놀이·팽이치기·비석치기 등의 놀이를 하며, 색동옷을 입고 우리와 비슷한 언어구조를 갖고 있는 민족이 있다. 그 민족의 이름은 라후족.”

“우리 민족과 너무나도 닮은 이 민족을 보고 놀라 줄곧 치앙마이에 거주하는 소설가 겸 민족학자가 있다. 그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고서들을 통해 라후족이 고구려의 후예였다는 사실을 발견한 이후 지난 십수년간 아시아의 오지를 샅샅이 뒤지면서 증거들을 수집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소설을 펴낸 신문사에서는 ‘모진 박해와 험난한 정글을 이기고 살아가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읽으면 라후족이 고구려인의 후손이라는 가설을 부정하기 힘들어진다.’고 한 술 더 뜬다.

그저 책만 팔아먹으면 그뿐이다. ‘가설’이란 단어를 적절히 이용하면서 또한 적당하게 도망칠 궁리를 해놓고 있다. 그들은 책에 대한 홍보를 다음과 같이 하고 있었다.

“1300년 전 고구려가 나당 연합군에게 멸망한 뒤 당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고구려인의 후예들이 태국 북부의 밀림 속에서 살고 있다. 그들은 김치와 같은 식생활에서부터 의복생활, 신앙생활, 생활습관, 아이들의 놀이 문화 등에 이르기까지 우리와 똑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1300년에 걸친 이들의 족적을 소설로 부활시킨 대서사시이다. 주인공 킴 사라는 유엔개발계획 관련 국제회의에 참석차 치앙마이에 갔다가 고구려 유민들의 후손이라고 알려진 라후족의 마을에 들어간다. 그는 생활 습관과 언어를 통해 이들이 고구려인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들에게 이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던 중 그는 현대문명에 대한 향수를 이기지 못하고 치앙마이를 떠난다. 그로부터 7년이 흘러 라후족 마을을 다시 찾았을 때 라후족들은 자신의 나라를 세우려는 독립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다시 주인공은 그들과 힘을 합해 라후족 독립전선을 이끌게 된다.”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추리소설적인 기법을 차용해 써 내려간 이 책은 부록을 통해 끊임없이 논란이 제기되고 있는 라후족의 고구려 후손 여부를 상세히 검증한다. 한반도로부터 수만 리 떨어진 공간에서 타민족에 동화되지 않고 고구려 사람의 후손으로 살아가고 있는 라후족의 삶은 우리에게 아련한 감동을 전해 준다.”

어쨌든 ‘소설은 소설일 뿐’이라는 소설의 약점을 적절하게 이용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진정한 소설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죄의 씨앗을 잉태하는 것이겠지만.

함봉호는 방콕에 도착하면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두 시간을 공짜로 벌었다는 점이다. 아무튼 시계를 두 시간 늦춤으로써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하지만 후덥지근한 날씨가 숨을 콱 막히게 했다. 태국은 어느덧 우기로 접어들어 간간이 비를 뿌리고 있었다.

방콕 공항은 국제선과 국내선이 바로 연결되어 편리했다. 태국 제2의 도시인 치앙마이로 가는 비행기는 하루에 10편 정도가 있었다. 별다른 절차 없이 치앙마이에서 입국 수속을 하면 그뿐이었다.

함봉호는 치앙마이로 가는 비행기에 오르면서 마음이 가뿐해졌다. 치앙마이까지의 비행시간은 1시간이 약간 더 걸리는, 우리나라의 제주도와 비슷한 거리였다. 다만 제주도와 다른 것은 기내에서 나오는 후식이었다. 제주도행 비행기는 간단한 음료수만 나오는 반면 치앙마이 행은 그런 대로 먹을 만한 식사가 나왔다.

“치앙마이까지 가는 기차 여행도 괜찮을 것 같은데, 얼마나 걸리지요?”

“아, 기차도 괜찮지만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요. 한 11시간에서 14시간 걸립니다. 나름대로 운치 있기는 하지만….”

김 전무는 여행 전문가답게 태국의 모든 것을 다 꿰고 있다.

“시간이 많다면 해볼 만하지만 역시 너무 지루하겠군요.”

“네, 맞아요. 기차는 서민층에서 주로 이용하지요. 기차를 이용하면 태국 서민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지요. 쾌속, 급행, 특급 열차가 있어 형편에 따라 이용할 수 있지요.”

“그런 대로 기차 여행도 할 만하군요.”

“네, 그럼요. 북부뿐 아니라 남부의 철도망을 경유해서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까지 기차여행을 즐길 수 있으니까요.”

“그것도 괜찮은 여행이군요.”

“나중에 시간 있을 때 한번 해보시지요.”

“하이고, 우리 같이 바쁜 놈들이 어느 천 년에 또 다시 와볼까요?”

“하하핫, 사람 일 알 수 없지요.”

김 전무는 오랜만에 너털웃음을 보인다.

“우리가 가는 치앙마이는 지금보다 좀더 일찍 왔어야 했는데….”

“아니, 왜요?”

“4월 11일부터 15일까지 벌어지는 ‘송끄란’이란 종교적 행사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설과 같은 것으로 물 축제와 꽃차 행렬이 대표적이지요. 축제기간 중에는 온 나라가 온통 물난리를 맞은 듯합니다. ‘송끄란’ 축제는 사원에서 열리는 종교적 색채를 띤 동시에 순수한 축제 형식으로 미인선발대회도 볼 만합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치앙마이는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붉은 황토빛 대지 위의 푸른 나무가 인상적이었다. 함봉호는 속으로 탄성을 내지르며 카메라를 창가에 대고 셔터를 눌렀다. 약간 희뿌연 유리 때문에 선명한 사진이 나오지 않을 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함봉호는 취재여행을 다니면서 사진 찍는 일이 자연스럽게 몸에 뱄다. 이번에도 넉넉한 양의 슬라이드 필름을 준비해 왔다. 총을 가진 병사에게 탄환이 없는 것은 곧 죽음을 말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취재여행 기자에게 있어 필름은 무척이나 소중한 것이었다. 더욱이 태국의 오지를 다녀와야 했으므로 충분한 양의 필름이 필요했다. 뿐만 아니라 카메라 건전지도 두 벌을 따로 마련해 왔다.

난생 처음 보는 풍경을 대하면 그만큼 필름이 헤퍼지게 마련이다. 그 신비로운 순간의 모습을 놓치지 않기 위해 카메라 셔터를 마구 눌러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초보자들이 범하기 쉬운 실수에 불과하다. 숱한 경험과 관록이 쌓일수록 그런 실수는 점차 줄어드는 법이다. 그래도 함봉호는 나름대로 그에 대한 소신을 세워놓고 있다. 무수한 양의 필름을 낭비하더라도 어쨌든 많은 풍경을 담아둔다는 철칙이다.

치앙마이 공항을 빠져나오자 이미 현지 여행사의 가이드가 지프를 대기중이었다. 그 사이에 김영무는 공중전화 박스로 가 저자인 김 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김영무는 뭐라고 투덜거리면서 공중전화 박스에서 나왔다.

“허, 참. 희한한 일이네.”

“뭐가요?”

“이상하게 우리가 왔는데도 반가워하질 않는 듯해요.”

“네? 그럴 리가?”

“그럼 한번 직접 걸어보세요.”

“네, 그러지요.”

함봉호는 김영무가 한 뜻밖의 말에 놀라 자신이 직접 전화를 걸기 위해 공중전화 박스로 갔다.

전화번호는 책의 앞날개에 적힌 것과 똑같았다. 전화를 걸자 역시 김영무의 말대로 당황하는 듯했다.

문제는 내일 오전에 만나자는 거였다. 멀리서 일부러 찾아왔는데, 그것도 책자 홍보를 위해 수만리 길을 날아왔는데 정말 어이없는 일이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섭섭하다는 뜻을 토로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비치려다가 급히 거두었다. 함봉호는 그대로 미련을 떨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더 이상 전화를 연장했다가는 무슨 실수라도 할 성싶었다.

“역시 그러네요.”

“맞지요? 나야 뭐 그렇다고 해도…, 함 기자한테까지 그럴 필요는 없잖아요.”

“왜요? 김 전무님도 저번에 저자가 한국에 왔을 때 이번 일로 한번 만난 적이 있잖아요.”

“그럼요. 그나저나 성격 탓일까요? 왜 그러지요. 나 같으면 오늘 당장이라도 만날 텐데…. 미안해서라도 말입니다.”

김영무가 오히려 함봉호보다 더 핏대를 올린다.

“에이, 그냥 갑시다. 무슨 일이 있겠지요.”

“그래요. 내일 오전이라도 만난다면….”

함봉호와 김영무는 가이드와 통성명을 나누고 함께 지프에 올랐다. 가이드는 지프를 치앙라이 방면으로 몰았다. 여장을 푸는 것은 치앙마이가 아니라 더 위쪽의 그곳으로 정했던 것이다. 그것은 고산족 주거 밀집 지역을 접근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처방이었다.

지프가 치앙마이를 벗어나자 날은 금방 어두워졌다. 그런데 밤으로 접어들면서 이상하게 두려움이 엄습했다. 참으로 묘한 일이었다. 함봉호는 자신이 스스로 생각해도 담력이 제법 크다고 믿었던 터이다. 아무래도 책 내용을 떠올린 이후부터인 듯했다. 책에서는 은근히 겁을 주는 내용이 있었던 탓이다. 총을 소지하고 있는 소수민족이 문제의 바로 그들이었다.

또한 처음 접하는 낯선 환경도 그랬다. 칠흑같이 캄캄한 밤하늘과 가로등도 없는 길이 그런 기분을 더욱 부채질했다. 어디선가 금방이라도 이상한 동물이 튀어나올 듯이.

“괜히 은근히 으스스하네요.”

함봉호가 먼저 자신의 심경을 털어놓는다.

그러자 김영무는 웃기만 할 뿐 별다른 말이 없다.

저자 때문에 상한 기분이 아직도 연장선에 있는 듯하다.

“너무 기분 상하지 말아요. 원래 무명의 작가들은 어쩌다 운 좋게 한번 뜨면 다들 그런 착각에 빠져 사니까.”

“아, 네.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에요. 후훗, 그리고 너무 겁먹지 말아요. 원래 외국에 처음 오면 괜히 불안해지는 법이니까요.”

함봉호가 위로의 말을 건네자 김영무도 역시 같은 어조로 받는다.

“아이구, 그렇게 겁먹을 필요 없어요. 총을 가지고 있는 고산족들은 이곳 태국이 아니라 미얀마와 라오스 쪽을 말하는 겁니다.”

이번에는 가이드가 함봉호를 달래준다.

“그나저나 김 박사는 무슨 일이 있나요?”

함봉호가 그 찬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재빨리 달려든다.

“글쎄요. 전 아무 것도 몰라요. 그저 시키는 대로 안내만 할 뿐.”

가이드는 금세 말을 바꾼다.

“김 전무님, 우리 숙소는 치앙라이에 있나요?”

함봉호는 머쓱해진 기분을 달래려고 엉뚱한 말을 한다.

“네, 치앙라이에 있는 호텔입니다. 치앙라이가 작은 도시이지만 그래도 있을 건 다 있지요. 술집도 재미있는 데가 많아요.”

김영무가 함봉호의 속내를 알아챘다는 듯이 대답한다.

“허헛, 재미있는 술집이라니요! 뭐, 이상한 덴가 보죠?”

“하핫, 아닙니다. 서울의 미아리 텍사스나 오팔팔을 떠올리면 안 되죠.”

“그럼요?”

“태국의 예쁜 아가씨들이 술 따라주고, 한국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노래방 기기가 있는 술집이지요.”

“아, 그래요? 그거 재미있군요. 이런 태국의 소도시에도 한국의 노래방 기기가 있다니?”

“그만큼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온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그런 델 갈 시간이 있을까요?”

“하이고, 우리 함 기자님이 원하신다면야 제가 모시고 가죠.”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구요.”

“아닙니다. 최대한 시간을 절약해 답사를 마치고 방콕으로 돌아오기 전에 한번 가는 방향으로 합시다.”

“허, 참….”

함봉호는 혀를 약간 말았지만 속으로 알게 모르게 호기심이 당기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한동안 지루할 만큼 어둠 속을 빠른 속도로 내달린 지프는 치앙라이 시내로 들어서면서 속도를 늦추었다. 치앙마이에서 치앙라이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은 3시간이나 걸렸다. 그나마 빨리 온 덕분이다.

인구 4만여 명의 치앙라이는 태국에서 가장 먼 북부 지방의 시골 도시답게 한적했지만 중심지는 여느 관광지처럼 활기가 넘쳤다. 80%가 산으로 둘러싸인 쿤탄산맥 자락의 해발 580m 지점에 있는 치앙라이는 15세기 이전에 지어진 사원들과 주변의 아름다운 시골 도시들이 인상적이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메콩강의 지류인 콕강은 130km로 함봉호 일행이 앞으로 탐험해야 할 강이다. 콕강가에 고산족들이 흩어져 살고 있는 탓이다.

13개의 군으로 이루어진 치앙라이는 북서쪽으로 미얀마, 북동쪽으로 메콩강과 라오스와 국경을 접하며 황금의 삼각지대를 이루고 있다. 긴 세월 동안 미얀마 북서부와 콕강을 통해 교류하며 생활한 관계로 치앙라이 인접 지역은 현재도 라오스와 깊은 문화적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가이드가 안내해 준 호텔은 일류급은 아니었지만 분위기가 아늑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함봉호와 김영무는 여장을 풀고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한국에서 출발한 이후 이곳까지 도착하는 동안 너무 오랜 시간을 소비한 탓에 피로감이 극도에 달해 있었다.

두 사람은 한 객실을 사용했지만 침대가 두 개인 탓에 그리 불편한 것은 없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욕탕에서 몸을 씻고 온 김영무는 알몸 그대로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는 것이다. 처음으로 낯선 사람과 함께 숙박을 한 함봉호는 일순간에 어안이 벙벙해진다.

“함 기자님, 이해하십시오. 난 이렇게 알몸으로 자는 버릇이 있어 나서….”

김영무가 눈치를 챘는지 그에 대해 재빨리 해명한다.

“아, 그래요? 아닙니다. 괜찮아요.”

“하하, 뭘요. 처음에는 다들 황당해 하던데….”

김영무는 함봉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하는 듯 농담을 한다.

“허허, 그나저나 김 전무님은 언제부터 그렇게 홀라당 벗고 자기 시작했나요? 그게 버릇이라면 아주 오래 전부터 그랬다는 얘긴데….”

함봉호도 딴죽을 친다.

이대로 무너졌다가는 기세 싸움에서 패배할 듯싶었다. 물론 함봉호로서는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말이 나온 것이다. 일종의 습관이다. 뭔가 빼앗긴 것 같은 기분에 대한 상쇄의 의미일 따름이다.

“젖먹이 때부터요.”

“네? 설마, 그럴 리가….”

“정말이라니까요. 어릴 때부터 이상하게 옷 입는 것을 싫어했어요.”

“그럼, 아프리카에 태어나는 게 더 좋을 걸 그랬군요.”

“허허헛!”

김영무가 힘없이 한번 웃고는 더 이상 아무런 반응이 없다.

함봉호의 반격에 두 손 번쩍 들었다는 듯.

아닌 게 아니라 함봉호는 솔직히 처음에는 기분이 안 좋았다. 심지어 김영무가 잠자는 사이에 자신을 덮칠지도 모른다는 생게망게한 생각까지 들었다. 아무리 화끈한 성격의 남자라 하더라도 초면에 알몸으로 같은 방에서 잔다는 것은 말도 안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이어 마음을 고쳐먹는다.

어쩌면 저런 것들이 여행전문가들만의 비법이 아닐까. 상대와 최대한 빠른 속도로 친해지는 또 다른 전술이리라. <계속>

박하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 저작권자 © 골프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