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정병국 작가] 마을 어르신들이 사람 노릇 못할 거라고 했습니다.
그때마다 치마폭으로 감싸며 두 귀를 막아주시던 어머니의 손길이 아련합니다. 유난히 잔병치레가 많은 약골 아들에게 보내는 마을 사람들의 안타까운 눈길에 어머니는 남몰래 하늘과 땅이 꺼지도록 우셨을 겁니다.

“아범! 잘 먹고, 잘 자고, 뒤가 편해야 장수하네. 명심하시게.”
어느새 오십이 훌쩍 넘은 아들의 밥상 곁에서 이것저것 챙겨주시던 어머니가 오늘 따라 더 그립습니다. 한복 삯바느질로, 대나무 뜨개질로 6남매를 수발한 어머니는 저세상에서도 중증암환자의 자식 걱정에 또 정화수 기원을 하실 겁니다.

칠십 중반의 적지 않은 나이에도 어머니의 그리움 앞에서는 재간 없이 어린 자식이 됩니다. 아내와 자식들에게, 지인 누군가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없는 암과의 전쟁, 그 아픔과 두려움을 어머니에게는 울먹이며 꼬치꼬치 일러바칠 수 있습니다.

남들은 하나인데 나는 왜 이렇게 많아요?
잘라내고 몽땅 드러내고 이번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지금도 힘들어서 엉엉 울고 싶은데
또 암이 덮쳐오면 어떻게 해요?

하루에 한 끼만 먹으면 안 되나요?
혈당과의 전쟁, 암 투병보다 더 힘들어요.
지난 4월 20일 병원 검사에서 식전 156, 식후 279 수치에 얼마나 당황했는지 몰라요. 주치의는 복용 약의 용량을 높여 처방했지만, 만에 하나 몸 어딘가에 합병증이라도 일어나면 어떻게 해요?

마치 철딱서니 없는 아이처럼 시시콜콜 칭얼거리다가 한숨을 길게 쉽니다. 살아계실 때 효도 한 번 제대로 못 한 채 늙고 병든 몸으로 징징 짜는 저 자신이 한심했습니다. 이승도 아니면 저세상의 어머니에게 근심 걱정만 안겨드리는 저는 분명 불효자입니다.

책장 한쪽에 진료 자료가 수복하게 쌓여 있습니다. 많이 버렸는데도 라면 상자 하나로는 부족할 영수증, 처방전, 진료 후 설명서, 환자대기표 외 암 슬기롭게 대처하기, 화학요법 항암치료의 안내서, 당 관리 식단안내서, 혈압기록부, 혈당 체크 기록장, 섭취 음식 기록장 등을 바라보다가 옷을 갈아입습니다.

봄 햇살이 화사하지만, 내복에 겨울 복장으로 아파트를 나섭니다. 어제와 그제, 비가 온다는 핑계로 포기했던 식후 산책 겸 운동을 오늘은 평상시보다 조금 일찍 나섭니다. 힘들고 귀찮아도 식후 운동을 꼭 하라던 주치의 당부를 가스에 다시 새깁니다.

식후 두 시간 뒤 당 수치가 200이 넘으면 인슐린 주사 처방한다는 주치의 경고에 암 환자 입원실 복도를 부지런히 걸었던 그 날을 떠올립니다. 내일이면 퇴원하는데 인슐린 주사 한계선의 당 수치 200에 걸릴까 땀 맺히도록 걸었습니다.

오늘은 그날보다 더 많이, 더 열심히 걸을 것입니다.

퇴원 하루 전 / 정병국

퇴원 후
췌담도 위암 수술 후 일상생활
암 슬기롭게 대처하기
화학요법 항암치료의 안내

차라리 모르는 게 약이라는
그 속 깊은 속담을 아느냐는 질문에
의학과 의술은 첨단과학이라는 간호사
예쁜 얼굴이 한순간 곰 같다

점심시간 입원실로 달려온 아들
병상 탁자의 안내서를 한아름 챙긴 후
혈당 관리 보호자 교실에 다녀오겠다며 나간다

식후 두 시간 뒤
당 수치가 200이 넘으면
인슐린 주사를 맞아야 한다는
대사내과 주치의 협박 아닌 협박

정오 45분
뿔대 없는 자유로운 몸으로
복도 걷기에 나선다

※ 정병국 암 투병 시집 49쪽 전문

소설가 정병국은
도서출판 지식과사람들 대표, 문예계간 시와수상문학 발행인, 한국문협 회원으로 월간 현대양계에 콩트 연재중이다. 시집 ‘새 생명의 동행’, 소설집 ‘제3의 결혼’ 외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