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정병국 작가] 며칠 전의 꿈이 생시 같습니다.
사람들로 붐비는 재래시장의 이곳저곳을 구경하다가 긴 지팡이로 후려치는 노인의 질타에 혼비백산했습니다. 칡덩굴처럼 구불구불 뒤틀린 지팡이와 함께 날아온 목소리, 그것은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외침이었습니다.

“네 이놈! 당장 떠나지 못해?”
뇌성벽력의 호통은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후에도 온몸을 폭삭 부셔버려 진저리쳤습니다. 암 투병은 현몽과 악몽, 개꿈 등 숱한 꿈을 꾸게 했으나 이번처럼 기절초풍하지 않았습니다. 현몽에는 기대감에, 악몽에는 불안 때문에 인터넷의 해몽을 검색했습니다.

췌장암의 재발에 전이된 위 등 주요 소화기관의 절제 수술 이후 악몽이 더 잦아졌습니다. 하룻밤에 서너 차례 이어져 아예 잠을 포기하는 날도 늘어났습니다. 그런 날의 하루는 마치 죽음을 눈앞에 둔 것처럼 손끝이 풀어져 약조차 제때 챙기지 않았습니다.

머리는 악몽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데 가슴은 아니었습니다. 악몽도 현몽처럼 신의 계시로 받아들여 전전긍긍하다가 지쳐 운명을 탓합니다. 백세 천수를 누리지는 못할망정 이렇게 비참하게 죽는 팔자의 원죄가 무엇이냐고 삼라만상의 온갖 신에게 항변합니다.

어떤 신도 대답해주지 않습니다.
메아리조차 없는 항변을 이어가다가 어느 순간 잠이 듭니다. 한두 시간, 때로는 서너 시간 잠들었다가 깨어날 때 곧바로 일어나 앉지 않습니다. 천정에 덩그러니 매달린 등(燈)을, 왼쪽의 벽을, 오른쪽의 책장을, 발쪽의 꺼져있는 컴퓨터를 차례차례 바라본 후 눈을 감습니다.

그까짓 악몽이 뭐라고…….
저 자신이 하도 한심해 주르르 눈물을 흘린 적도 있습니다. 아무리 죽음과 동행하는 중증암환자라지만, 이건 아니다 싶어 뜨겁게 흘린 눈물입니다. 칠십 중반까지 오는 동안 숱한 죽음을 보았습니다. 만수무강의 행복한 죽음 앞에서는 축하의 잔도 올렸습니다.

비록 늙고 병들어 쇠잔한 몸이지만, 마음은 강건하다고 믿었습니다. 림프까지 암이 전이돼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도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항암치료 후유증으로 두 다리의 무릎 밑이 퉁퉁 붓고 걷기 불편해도 의술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그거 참! 허허!”
영정 사진까지 준비할 만큼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는데…현몽과 악몽에 일희일비하는 가슴이 한심하다 못해 부끄러워 헛웃음을 흘립니다. 병은 환자 스스로 먼저 고쳐야 하는데 오히려 역행하고 있으니 오늘도 투병은 헛걸음입니다.

모든 꿈은 개꿈입니다.
신의 운명 계시가 아닙니다.

꿈과 주치의 / 정병국

환청이었나
안개 같은 남자의 목소리
그만 갑시다

이제는 그만 떠날 때라고
앞장세우려는 순간 가위에 눌리며
눈 떴다는 말에

어디였나
구름에 묻힌 산하
홀로 너럭바위에 누운 머리맡에
앉아 계신 아버지
외면한 눈길

꿈에서도 서운해
돌아눕다 끝없는 공간으로 떨어진
간밤의 꿈
주치의가 또 하얗게 웃는다

진료받기보다
생뚱맞은 꿈 이야기만 늘어놓다가
지옥 같은 항암치료실로 간다

소설가 정병국은
도서출판 지식과사람들 대표, 문예계간 시와수상문학 발행인, 한국문협 회원으로 월간 현대양계에 콩트 연재중이다. 시집 ‘새 생명의 동행’, 소설집 ‘제3의 결혼’ 외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