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정병국 작가] 췌장담도암센터 소화기외과분과 환자대기실.
오전 10시 40분 1번 진료방 대기표를 확인한 후 화장실을 다녀옵니다. 환자대기실에 앉으면 소피가 자주 마리고 목도 더 탑니다. 검사 결과의 확인 진료는 암 투병 14년 차에게도 불안과 초조감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오히려 초진 때보다 더 긴장합니다.

예약한 진료 시각보다 늦어질 때 환자들을 슬그머니 살펴봅니다. 천정만 바라보는 중년의 여인, 아예 눈을 감고 있는 초로의 남자, 두 손을 배에 모으고 고개 숙인 젊은이, 팔짱을 낀 채 미동도 않는 사십 대 중반의 남자에게서 분노가 느껴집니다.

환자 보호자의 표정도 살핍니다. 대기실 뒤쪽에 서서 진료안내 전광판을, 가족인 환자를 번갈아 보는 그들의 눈길은 불안과 안타까움으로 파삭 부서질 것 같습니다. 묵주를, 염주를 돌리며 기도하는가 하면 끝없이 발만 동동거리는 이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환자나 보호자의 그 모습들이 보기 싫었습니다. 짜증에 화까지 났습니다. 신이라는 신은 모두 싸잡아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화장실의 거울 속 긴장으로 핏기 없는 초췌한 얼굴을 발견한 후 환자와 보호자를 바라보는 눈길이 달라졌습니다.

뭐랄까? 짜증의 눈길이 가슴 아림으로 변하자 옆자리의 환자에게 말도 걸게 됐습니다. 사실 환자대기실에서 암 환자에게 말을 건네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입니다. 실제로 몇 차례 민망함을 당한 후 뜻밖에 젊은 여자 친구가 생겼습니다.

췌장암 주치의가 같고 진료 일정도 비슷한, 사십 대 초반에 쌍둥이를 낳았다는 그녀가 오늘은 보이지 않습니다. 세 번에 한 번은 마주쳤는데 어쩌면 오늘은 오후 진료일는지 모릅니다. 스스럼없이 어르신이라 부르며 생뚱맞은 질문으로 사람을 황당하게 만드는 늦둥이 엄마입니다.

“어르신! 췌장암 바이러스도 연애할까요?”
“어르신! 쟤네들도 하나님을 믿겠죠?”
“있잖아요. 암, 그놈은 몇 살까지 산대요?”
“어르신! 암과 술자리 잡을까요?”

그녀는 오른손 검지로 왼손 바닥을 쿡쿡 누르더니 통화를 합니다. 요즘 술 고프지? 좋아! 내가 쏜다. 오늘 저녁 곱창전골로 취하자. 뭐? 사람 안주가 아니면 안 마신다고? 야! 미쳤니? 내 생명을 떼 주게. 전화를 끊은 그녀가 바보처럼 삐쭉삐쭉 웃습니다.

이런 엉뚱한 행동으로 웃음을 안겨주는 그녀가 고맙습니다. 콧등이 찡해지면서 눈 가장자리가 뜨거워져 슬그머니 외면합니다. 그녀는 어쩌면 친정아버지와 동년배일는지 모른다는 생각에 아둔한 말장난으로 늙은 암 환자를 위로하는 착한 여자입니다.

그녀는 현명한 쌍둥이 엄마이고, 저는 우문에 현답을 주어도 알아듣지 못하는 늙은이입니다.

환자의 우문현답 / 정병국

2019년 5월 14일
암병원 혈액종양내과 분과진료실
주치의가 손을 잡습니다
-지금 살아계시잖아요

빚 없이 떠나고 싶은
중증암환자의 아름다운 정리
-남은 날이 얼마나 될까요

서둘러 출판한 제3의 결혼

췌장암 재발에
주요 소화기관까지 다 들어냈으니
곧 죽음이죠
주치의가 고개를 젓습니다
-지금처럼 일하세요

환자는 절망을
의사는 희망을
우문현답에 부끄러움으로 일어섭니다

소설가 정병국은
도서출판 지식과사람들 대표, 문예계간 시와수상문학 발행인, 한국문협 회원으로 월간 현대양계에 콩트 연재중이다. 시집 ‘새 생명의 동행’, 소설집 ‘제3의 결혼’ 외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