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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국의 췌장-림프 등 6종 암투병기 18회] 서재의 책장 하나, 온통 의료보조기구로

불안에서 시작된 불신…의사 진료까지 의심해 정병국 작가l승인2021.01.12l수정2021.01.12 0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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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타임즈=정병국 작가] 폭설에 혹한(酷寒), 겨울다운 겨울입니다.
43kg의 암환자만 아니라면 바다이든 산이든 ‘겨울’을 즐기려 훌쩍 떠났을 겁니다. 지난날 유난히 설경을 좋아해 단독 겨울산행으로 가족과 지인들의 빈축 대상이 되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젠 눈이 조그만 내려도 미끄러져 넘어질까 바깥출입은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서재의 책장 하나에 의료보조기구와 기록노트가 가지런히 놓여 있습니다. 2008년 1월 15일 췌장과 갑상선샘 암 수술을 받은 후 통원치료를 하면서 하나가 둘이 되고 셋이 됐습니다. 겨드랑이에 꽂는 온도계부터 혈압과 혈당 측정기, 심폐기능을 훈련시키는 기기 등 뭐랄까, 의료기기 견본 전시 공간 같습니다.

집에서 처음 체온을 잴 때 상당히 불안했습니다. 제대로 재는 걸까? 수은온도계가 제대로 작동하는 걸까? 마음이 놓이지 않아 생산 회사가 다른 서너 종류의 체온기를 구입했습니다. 이런 의심과 불안은 여타 기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5개의 온도계를 비롯해 각각 2개씩의 팔과 손목 혈압측정기, 3개의 혈당측정기, 2개의 심폐기능 향상 훈련기에 만보기까지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또 각각의 기기 옆마다 크고 작은 기록 노트가 놓여 있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파삭 부서질 것 같은 긴장감이 밀려옵니다.

“건너뛰지 마세요.”

“대충 체크하지 마세요.”

“환자의 기록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세요?”

천근만근의 압박입니다.
의사는 진료의 한 과정으로 당부했는지 모르지만, 이 모든 것을 빠짐없이 실행하는 환자의 고통은 한마디로 ‘죽을 맛’이었습니다. 차라리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유혹과 싸우는 것도 감당하기 어려워 부끄럽지만, 눈물을 주르르 흘린 적이 한두 번 아닙니다.

그때마다 따지고 싶었습니다.
내게 이 끔찍한 고통을 준 당사자를 만난다면 다짜고짜 멱살부터 틀어잡고 따지리라, 다짐했습니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가?”

물론 이 분노는 허망한 외침입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분노를 가라앉혀야 그나마 위로가 되기 때문에 터트리는 탄식입니다. 분노와 탄식에 아무도 없는 거실 한가운데 큰 대(大) 자로 누워 절망하다가 어느 순간 피식피식 웃습니다.

갑자기 ‘암 투병’이 삶의 ‘화두’로 다가오자 기가 차 삐져나오는 웃음입니다. 늙은 암 투병 환자에서 수행자로 둔갑한 화두 ‘암’의 결론은 간단합니다. 투병 과정을 통해 암이 주는 삶의 가르침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암은 끝내 죽음에 이르는 절체절절명의 올가미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 사실을 역설적인 시에 담았습니다.

그는 누구이기에

암 화두(話頭)
무엇을 깨닫게 함인가

당치도 않은
수행자 만들어
무엇을 주려는가

삼보삼배(三步三拜)
천 년을 해도 어리석은 중생
풀벌레도 알거늘

작은 바람에 휩쓸려
시냇물에 떠내려가는 목숨
그렇게 보내주면
세상이 무너지는가

그는 누구이기에
오늘도 헛꿈 꾸나

소설가 정병국
도서출판 지식과사람들 대표, 문예계간 시와수상문학 발행인, 한국문협 회원으로 월간 현대양계에 콩트 연재중이다. 시집 ‘새 생명의 동행’, 소설집 ‘제3의 결혼’ 외 다수가 있다.

정병국 작가  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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