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정병국 작가] 지금도 선명합니다.
“어쩌면 좋아요? 어르신!” 당황해 안절부절 못하던 암환자 입원실의 6년차 간호사 얼굴이 생생합니다. 사건(?)의 발단은 다음날 6시 수술부위 CT촬영으로 처방된 금식에서 비롯됐습니다.

입원실 암환자들의 금식은 다반사입니다. 4시간에서 8시간, 그 이상의 금식도 ‘검사’라는 진료 앞에서는 절대 명령입니다. 이를 따르지 않을 환자는 없습니다. 있다면 그는 어떤 불만 때문에 치료를 거부하는 행위입니다.

병상 머리에 금식 팻말이 걸리면 불안합니다. 수술 환부에 문제가 생겼나, 아니면 새로운 암 덩어리가 발견되어 정밀검사를 하려는가? 별의별 상상을 다 하며 좌절하고 절망합니다. 그렇게 병상에서 뒤척이다가 자정이 넘은 시각에 간호사들의 근무 공간으로 찾아가 ‘금식 이유가 무엇이냐’고 조심스럽게 묻기도 합니다.

금식으로 저녁을 굶은 밤 9시쯤이었습니다. 야간근무 간호사가 금식 팻말을 거두며 난감한 얼굴로 말했습니다. 금식은 착오였다고. 그래서 급히 환자음식 조리부에 연락했으나 이미 조리사들이 퇴근한 후라 음식을 준비할 수 없었다며 빵과 우유를 사오겠다고 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속으로 쾌재를 외쳤습니다. 지하 제과점에서는 커피도 있습니다. 멀건 죽에서 밥으로 바뀌자 커피가 간절했지만 금기 음료이므로 마실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금식 착오의 핑계로 커피맛 빵을 커피에다 찍어먹을 수 있는 호재에 손을 내저었습니다.

마음이 급했습니다. 야식을 먹은 적 없어 제과점이 몇 시까지 영업을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서둘렀습니다. 지상 8층에서 지하 1층까지 내려가는 엘리베이터가 어찌나 느리던지,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웃음이 나옵니다.

다행히 마지막 손님으로 빵과 커피를 사들고 입원실로 돌아왔습니다. 그때까지 나를 기다렸는지 옆 병상의 직장암 환자가 일어나 앉으며 “환자를 생떼같이 굶긴 간호사를 호되게 야단쳐야지. 왜 물렁하게 넘어갑니까?” 아주 못 마땅해했습니다.

만약 커피빵과 커피의 유혹이 없었다면? 아마 간호사에게 싫은 소리를 했을 겁니다. 어쩌면 와락 짜증까지 냈을 겁니다. 암과 죽음, 그 가운데 끼여 있는 환자는 솔직히 어디로 튈지 모릅니다. 실내화 끄는 소리에도 진땀이 날 만큼 날카로워지니까요.

“커피가 그렇게 마시고 싶었나요?” 직장암 환자가 이번에는 웃으며 대답을 기다렸습니다. 암요! 얼마나 먹고 싶었는데요. 보세요. 아까워서 마시지 못하잖아요. 능청치자 참 싱거운 사람이라기에 미소 지었지만, 그 말에서 옛 기억 하나를 찾았습니다.

반세기도 더 전의 기억입니다. 잔인할 정도로 독하지 못할 거 차라리 싱거운 사람으로 살자며 허름한 찻집에서 베토벤의 운명을 청한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 음악은 듣지 못 했습니다.

그날 밤, 저는 823호 입원실에서 빵도 커피도 먹지 않았습니다. 암과의 잔인한 싸움보다 차라리 싱거운 사람으로의 여생동행을 또 결심했습니다.

‘암환자 입원실 823호’

블랙커피에
커피 빵을 사 들고
암병원 입원실로 돌아온다

금식 착오의 저녁
두 손 모아 감사하며
온몸으로 맡는 커피 향기

밖은 눈이 날리고
암이 점령한 가슴은
젊은 날 추억의 찻집을 찾는다

반세기도 더 지난
안개의 숲속 허름한 찻집
베토벤의 운명을 청하고
블랙커피를 기다리던
하얀 자리

그날의 그 자리처럼
암환자 입원실 823호 창가의 병상
하얀 자리에 눕는다
커피를 포기하고
베토벤의 운명을 떠올리며

소설가 정병국은
도서출판 지식과사람들 대표, 문예계간 시와수상문학 발행인, 한국문협 회원으로 월간 현대양계에 콩트 연재중이다. 시집 ‘새 생명의 동행’, 소설집 ‘제3의 결혼’ 외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