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김기은 소설가] “이렇게 되니까 애들이 철이 참 빨리 들더라고요. 큰 애는 벌써부터 도서실 처박혀서 공부만 파고들어요. 공부 잘해서 수석으로 지방대 들어가면 장학금에 기숙사비에 용돈까지 다 받으며 공부할 수 있다 그러더라고요.”

일자리가 생겼다며 그는 강원도로 내려갔다. 벌목 현장에 가서 나무를 베는 일이라고 했다. 셰익스피어를 전공하신 영문학 박사께서 나무를 베신다. 그는 거기가면 외국인 노동자도 많고, 그 중에는 자기처럼 공부를 많이 한사람도 섞여있다고 했다.

그가 다시 나타난 것은 거의 1년 만이었다. 온 몸은 벌레물린 자국과 여기 저기 긁힌 흉터 투성이였다.

그는 그 일을 그만 하기로 했다고 했다. 몸만 망가지고 돈도 안 된단다.

비오면 쉬고, 겨울이라고 쉬고, 장마철이라 쉬고. 일단 받아봤자 쉬는 날 빼면 죽도록 고생해도 몇 푼 되지도 않아요.

“몸으로 하는 일이라 얼마나 위험하고 힘든지 몸만 다 망가져요.”

그는 벌초인지 벌목인지 자격증을 따겠다고 했다. 그러면 큰 공원이나 공공시설 같은 곳에 계약직으로라도 일할 수 있게 해준다고 아는 사람이 그랬단다. 그러면 공원 시설물에 있는 숙소에서 먹고 잘 수도 있고, 밤이면 별을 보며 시를 쓸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러고 얼마 쯤 지금 자격증 시험을 보러와 있다고 전화가 왔다.

다음 날 그가 나타났다.

“합격 했어요?”

“아직 모르겠어요. 나한테는 적성에 안 맞아요. 나무를 베려니까 불쌍해서 못 베겠어요. 어떻게 베요. 그렇게 오래 동안 그 자리까지 올라가려고 얼마나 모진 풍파를 이기고 견뎌냈겠어요. 내 팔이 뚝뚝 잘려나가는 것 같아 도저히 못하겠더라고요”

셰익스피어가 엄살을 부리는 말투로 말했다.

“아! 정말 요즘은 뭘 해서 먹고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시를 쓰고 싶다면서요? 하고 싶은 거 하고 사세요.”

“시가 돈이 되요? 돈 안 돼요.”

“될 수도 있죠.”

“에이! 시인이 우리나라만 해도 얼마나 많은지 알아요? 수천 명일 거예요. 거기서 시 써서 먹고 살 만큼 시집이 팔리는 사람은 모르긴 해서 아마 고작 한두 명 정도일 거예요.

그럼 소설 쓰세요. 언제가 소설도 쓰고 싶다 그랬잖아요.

“그렇긴 한데, 마땅한 소재거리가 없어요.”

“제 얘기를 들려줄게요.”

그가 웃었다.

“사람들은 다 자기 얘기가 소설 거리라고 생각해요. 어르신들이 자기 얘기로 소설을 써도 몇 권은 썼을 거라고 그러잖아요. 그렇지만 들어보면 다 비슷비슷해요. 고생한 얘기, 남편 바람피운 얘기, 시집살이 한 얘기, 사람 사는 게 다 비슷비슷해요. 그런 것들하고 상대도 안 되는 정말 비극적이고 희극적인 얘기들을 몇 백 년 전에 셰익스피어가 이미 다 해버렸잖아요. 모든 인생사의 희비극은 그 안에 다 들어있어요.”

그는 한참동안 셰익스피어를 예찬했다. 매사가 그런 식으로 되어 버린다면 죽을 때까지 글 한 줄 못 쓸것이 분명했다. 세상엔 오직 셰익스피어 작품 몇 개만 남아있으면 되는 거였다. 그래서 내가 그랬다. 당신은 죽을 때까지 글 한 줄 못쓸 거라고.

그럼 직접 쓰세요. 글 쓰잖아요.

그러나 나는 내 손으로 내 이야기를 쓰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을 있는 감정에 빠져버릴 것 같았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다 노출해버릴 것 같았다. 소설이 아닌 수기가 돼 버리는 것이 두려웠다. 다른 사람이 내 거지 같은 인생을 적당히 비틀어 주기를 바랬다. 기왕이면 경쾌하게. 발라드처럼 분위기 있게. 구질구질 우중충 한 것이 아니라 같은 거라도 분위기 있고 멜랑꼴리하게 만들어 주길 바랐다.

그는 한참 생각하더니 소설은 자신 없지만 한번 써보겠다고 했다.

나는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조건을 내걸었다.

소설을 공모해서 혹시 당선이 되면 나와 함께 사막여행을 떠나자고. 어쩌면 이곳으로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김삿갓처럼 우린 방랑자가 되는 거지만, 이 좁은 땅을 도는 것이 아니라 우선 사막을 횡단하고서 인도나 아프리카나 혹은 다른 어떤 낯선 땅으로 발길 닿는 대로 다닐 거라고. 거기 가서 살지 않겠냐고 했다.

그는 아마 아이들이 보고 싶을 거라고 했다.

“여기 있으면 가끔이지만 연락도 하고 만나잖아요.”

“모계 사회라면서요. 걔들한테는 엄마가 있잖아요.”

거기서도 연락은 할 수 있고, 찌질 하게 여기서 궁상떨며 사는 모습 보이는 것보다는, 아빠가 세계를 돌고 있다 그러면 똑같은 실업자로 방랑생활을 해도 아이들은 뭔가 더 멋있게 생각할 거고, 뭔가 더 느낌이 있어 보이지 않느냐고 설득했다.

“집착을 버리고 여행객으로, 방랑자로 산다면 가난은 문제가 되지도 않고 흉도 되지 않아요. 분명 우리는 훨씬 더 행복해 질 거예요. 여행객에겐 가진 게 많으면 오히려 짐이 되고 거추장스러울 뿐이에요. 머물고 사니까 돈과 권력이 필요해지는 거예요.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는 건 머물지 않고 사는 것 밖에 없어요.”

내 말에 그도 공감했다, 그렇게 셰익스피어를 설득해 동행자가 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여행을 떠나기 전 꼭 내 이야기의 소설을 마쳐달라고 했다. 실은 너무도 무거웠던 나의 지난 삶을 싹 털어내서 이 땅에 아주 묻어버리고 싶다고.

그는 알았다고 했다. 그리고 조금 생각하더니 벌써부터 설렌다며 이내 소년처럼 즐거워했다. <계속>

김기은 소설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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