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정병국 작가] 여기저기서 사회자를 질타하는 소리가 터졌다.

사회자는 상황을 예상했었는지 곧바로 목소리를 수용하면서 미소 지었다. 아파트단지 재건축조합 설립 총회 진행에서 다반사로 일어나는 분위기라 조금도 부담을 느끼지 않는, 뭐랄까? 이런 대목에서는 이런 항의가, 저런 항목에서는 저런 불만이 터질 것이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는 비웃음 같았다.

슬그머니 분노가 꿈틀거렸다. 기어이 발언권을 얻어 단상 앞으로 나갔다. 사회자에게 고맙다는 인사부터 최대한 정중하게 했다. 젊은 사회자의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표정에 질문을 던졌다.

“사회자의 역할이 뭐죠?”

“예?”

“사회자의 역할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아 예! 회의가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하는 게 제 역할입니다만…….”

그가 무엇이 문제냐고 물으려할 때 말을 가로챘다. 말을 중단당한 사회자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면서 짜증스러운 빛이 피어올랐다. 그 모습을 삼사초 지켜보다가 조금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왜 총회 참석자들의 의견을 듣지 않고 찬성으로 몰아갑니까? 사회자에게는 반대와 찬성 그 어떤 의사 표시도, 결정권도 없음을 설마 모르는 건 아니겠지요?”

참석자들의 박수와 함께 ‘옳소!’ 외침이 터졌다.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가라앉자 사회자가 재빨리 사과했다. 미숙한 사회자라 실수했다며 머리를 조아렸다가 들 때 시선이 맞부딪쳤다. 역시 그는 능수능란한 사회자였다. 맞부딪힌 시선으로 살짝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미소에 깔린 여러 가지 의미를 생각하며 자리로 돌아오는 다리에 맥이 빠졌다. 공연히 앞에 나섰다는 후회도 밀려왔다.

아파트 재건축 조합 창립총회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안건마다 법 조항을 내세워 그 근거로 추진될 것이라는 사회자의 설명이 끝남이 곧 동의와 찬성이었고, 이를 조합장이 선포하며 탕탕탕 봉을 두드리는 통과 절차가 획획 지나갔다.

총회 자리에 더 앉아 있을 필요가 없었다. 모든 것은 재건축 사업 추진자들의 뜻대로 흘러갈 텐데 안건 통과 때마다 박수부대가 되고 싶지 않았다. 회의장을 빠져나오자 굴지의 건설사 직원들이 기다렸다는 듯 몰려들며 종이쇼핑백을 안겨주었다.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르지만, 주는 대로 선물 백을 받아들고 건물 밖으로 나와 심호흡부터 했다. 한겨울의 차가운 날씨가 온몸으로 파고들자 진저리치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잔뜩 흐린 하늘은 금방이라도 진눈깨비를 뿌릴 기세였다.

“커피 드세요.”

젊은 여자였다. 그녀가 내민 자판기 커피를 받으며 다시 하늘을 쳐다보았다.

“잘 될까요?”

그녀의 불안한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꼭 양몰이 당하는 기분이에요.”

그녀의 양몰이 당하는 기분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떡이며 물었다.

“개에게요?”

“아니요. 교활한 늑대 떼에게요. 너무 무서워서 밖으로 나왔어요.”

늑대 떼라는 말에 그녀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엷은 화장의 여자는 아파트재건축조합 창립총회 추진자들을 늑대 떼에다가, 참석자들을 양에다가 비유했다. 양과 늑대, 그 표현이 절묘하다는 생각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질주하는 사회자에게 일침가할 때 정말 통쾌했어요. 감사합니다.”

“아 예…….”

“저 신나게 박수치며 소리쳤어요.”

여자는 힘이 솟았다고 했다. 사회자의 찬성 쪽으로 교묘히 몰아처가는 진행에 어찌할 바를 몰라 겁에 질러 있었다. 그러다가 선생님의 멋진 저지 발언에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며 웃었다.

“앞으로 혹시 불이익 당하시면 어쩌죠?”

그녀의 불안한 말을 들으며 걷기 시작했다. 시민회관에서 조금 떨어진 홍춘천에 스케이트장이 있었다. 겨울철에만 개장되는 노천스케이트장이었다. 어디에 가는지 묻지 않고 따라오는 그녀는 사십대 초반으로 보였다.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먹었을지도 모를 그녀가 관악산에서 굴러 떨어지는 바람이 거칠게 휘감겨오자 코트 깃을 세우며 물었다.

“드디어 전쟁이 시작된 거죠?”

고개를 끄떡였다. 차갑게 식어버린 종이컵의 커피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비웠다. 종이컵을 꼬깃꼬깃 꾸겨 쇼핑백에 넣었다.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요?”

그녀는 한 손으로 코트 깃 여미며 물었으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우린 이미 전쟁에 진 무력한 포로가 아닐까요?”

재건축 조합 설립 추진자들을 늑대에 비유했던 그녀는 재건축조합을 쓰나미로 표현했다. 모든 것을 한순간에 집어삼키는 쓰나미에 맞설 힘이 자기에겐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아주 낙담한 얼굴이었다.

“세상에 태어나 나만을 위해 처음 내린 결정과 선택이 폭삭 부서지고 있어요.”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폭삭 무너지다니 뭐가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슬그머니 이야기 방향을 틀었다.

“이 길 끝에 뭐가 있어요? 오른 쪽은 정부청사인데…….”

“스케이트장이 있어요. 거기 갑니다.”

스케이트장이란 말에 그녀 표정이 확 밝아졌다. 방금 전의 낙심천만의 무거움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소녀처럼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도 스케이트를 탈 수 있나요? 스케이트를 대여해주는 곳이 있을까요? 애들 꺼 빼앗아 탈 수도 없고. 그녀의 안달 난 모습에 있을 거라고 했다. 뜨거운 국물에 어묵을 파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고 하자 자기가 사겠다고 했다.

“우리 먼저 스케이트를 타고, 그리고 어묵 먹어요.”

그녀의 자연스러운 우리라는 말에 웃음이 나왔지만 참았다. 서로의 성조차 모르는, 아파트재건축 조합창립 총회에서 처음 본 사람인데 우리라니 의외로 넉살좋은 여자다 싶었다. 그게 아니면 무심코 쓰는 어휘일는지 모른다며 붉은 신호등 건널목에서 걸음을 멈췄다.

“오로지 저만을 위해 살기로 했어요.”

그녀는 붉은 신호등이 꼭 늑대 붉은 눈동자 같다며 마치 눈싸움이라도 하듯 노려보다가 외면했다. 그리고는 슬그머니 틀었던 말머리를 되돌렸다.

“대학 졸업한 그 다음 달에 결혼했어요. 두 번 다시없을 신랑자리라는 엄마의 선택이었죠.”

결혼한 후 시댁 어른들의 말씀대로 아들 둘에 딸아이 하나를 낳았다. 남매 둘은 적고 넷은 많다며 셋을 낳으라는 시어머니의 명령에 복종했다. 여자는 서방 잘 만나 살림이 풍족하면 그게 곧 행복이라는 남편의 지론에 군말 없이 따랐다. 바깥출입도 시부모님과 남편의 허락을 꼬박꼬박 받았고, 반찬거리 하나도 자신이 아닌 오로지 가족 입맛에 맞췄다.

“그렇게 사는 게 친정엄마 말처럼 현모양처인 줄 알았어요. 또 여자의 행복이라고 믿었고요.”

파란 신호등이 켜지자 건널목을 건너며 그녀가 쿡쿡 웃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났는지 모르겠다며 또 쿡쿡 웃었다.

“가족이 모두 모인 일요일 저녁이었어요.”

시부모님은 생강차를, 아이들 셋과 남편에게는 커피를 타준 후 엄청난 선언을 했어요. 가족 누구도 예상치 못한 충격적인 폭탄선언, 그게 뭔지 아세요?

“설마……이혼을?”

“맞아요. 이혼선언!”

그녀는 일체의 대화를 거부했다. 남편은 ‘너 미쳤구나.’라는 말 한마디로 20년 부부 관계를 정리했다. 딸아이는 엄마 뜻대로 엄마만을 위해 살라고 했다. 살 섞으며 자식 낳은 집을 나와 부라부라 마련한 것이 아파트였다. 그게 2개월 전이었다. 세상에 태어나 누구의 간섭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의지대로, 자신의 이름으로 가진 최초의 안식공간이었다.

“그런데 재건축이라니…….”

그녀는 속전속결로 추진되는 재건축 앞에 무력한 자신이 한심하다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 눈빛 속으로 눈물이 고였다. 그녀를 위로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겨우 잔뜩 흐린 하늘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눈이 올 것 같지요?”

정병국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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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병국은
도서출판 ‘지식과사람들’ 대표와 문예계간 ‘시와 수상문학’ 발행인. ‘문예창작아카데미’와 스마트폰 전자책문학 ‘파란풍경마을’을 운영하며 월간 현대양계에 콩트를 연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