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김기은 소설가] “언니 뭐 아는 거 있어? 난 오빠가 오락가락 해서 헛소릴 한 줄 알았는데.”

“고모 니, 진짜 모르나?”

나는 눈만 껌벅거렸다.

“느그 아버지 얘기 들은 거 하나도 없나?”

이게 무슨 소린가. 갑자기 가슴이 쿵쾅거렸다.

올케가 막내를 시켜 가방을 가져오라더니 뒤적뒤적 뭔가를 찾았다. 수첩이었다.

“오빠 옛날 수첩이다. 웬만한 옛날 번호는 여 다 있다. 부고 연락할 때 더 있을까싶어 가(가져) 왔다.”

올케는 수첩 커버 안쪽에서, 꼭꼭 접혀있는 빛바랜 종이 하나를 끄집어냈다. 올케가 그걸 나에게 건네주었다.

“피 봐라.”

어찌나 오래 됐는지 흐느적거리는 모양새가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 같았다. 그것은 아주 오래 된, 말하자면 삼십년도 더 된, 한자로 써 있는 주민등록등본이었다.

한자로 쓰여 있는 내가 읽을 수 있는 건, 성씨 최(崔)자와, 대구(大邱) 라는 글자뿐이었다. 올케가 자기 때는 문교부에서 한자를 없애 안 배울 때여서 모른다고 했다.

핸드폰을 찍어 찾아보니 세대주 이름은 최치국이었다. 그리고 아들 최경수 밑으로 몇 명의 이름이 이어져있었다.

“옛날 고려짝 주소라 아직 거기 살기야 하겠나? 거기 본적도 있으이까 알아봐라. 오빠말로 상주사람이라 카데. 버릴라카다가 혹시 몰라서 뒀다 아이가. 어무이가 오빠더러 대구가면 동회에 가서 그것 좀 떼오라고 시켰는갑더라. 그때만 해도 본인이 아니라도 다 띠(떼어) 줬잖아. 그땐 뭔지도 모르고 시키는 대로 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이 그게 니 아부지 주소였던 갑더라. 그땐 몰랐는데 그게 느그 아버지 거란다.”

등본에는 당당히 처도 있었고, 딸 셋 아들 셋이 있었다.

무방비 상태에서 해머로 뒤통수를 된통 얻어맞은 것 같았다.

“엄마가 바람피운 거야. 첩이야, 그럼?”

그리고 난 첩 딸이야? 하려다 그 말만은 꿀꺽 삼켜버렸다.

“바람피우고 그런 건 아인 거 같다. 나도 어무이 돌아가시고 나서야 들었는데. 아버지도 이북에 있다카는 데, 어린 네가 있으이 안 얄궂나. 그래서 나도 어무이가 바람 핀 줄 알았는데 아이다. 우짜다 보니 그래 된 거지. 그느 엄마가 삼촌 땜에 잡혀갔던 건 알제. 금쪽같은 아들도 있고, 삼촌도 살리고 그럴라카면, 그 방법밖에 더 있었겠나. 돈이 있나 빽이 있나. 여자가 할 수 있는 게 뭐겠노. 그래서 다 풀려난 거 아이가. 오빠보고 니한테 말하지 말고 묻고 가라켔단다.”

“근데 이걸 왜 떼어봤을까?”

“내 생각엔 널 그 집에 보낼라고 그라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다 자란 아들딸이 잔뜩 있으니까 구박 받고 클 거 같아서 그만 안 보냈는 갑지 싶다. 그라고 남편도 시집식구도 없는데 누가 뭐랄 사람이나 있나”

올케의 말이 이명처럼 윙윙거리며 들렸다.

“내도 그 이상은 모른다. 미주알고주알 캐물어도 느그 오빠도 시시콜콜하게는 모르는 거 갔더라. 17살이나 먹어서 알려고 들면 알아냈겠지만, 뭐 좋은 거라고 그랬겠노. 마 잊아뿌라. 이제 와서 시시콜콜 알아 봐 뭐하겠노. 모르겠다. 그 집에 재산이나 많아서 한 밑천 뜯어낼 생각 있으면 함 찾아서 만나보던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요즘에사 찾을라 카면 얼마든지 찾지. 컴퓨터 들어가면 일분도 안 걸릴 기다. 그 정도까지 알고 있는데 못 찾을 거 뭐있노?”

“근데 뭐 살아나 있겠나? 100살까지나 살면 모르까. 또 다 늙은 아버지 이제와 찾으면 뭐하노. 경찰 하던 사람이 재산이 있으면 얼마나 있을라고, 안 글나(그렇나)? 있어도 자식들이 여섯이나 있는데 있더라도 벌써 다 나눠 갖았겠다. 그깐 다 늙은 아버지 알아서 뭐하노. 솔직히 개자식이다. 그집 식구들 널 반가워 할 리도 없고. 마 그런가보다 하고 궁금증만 풀고 잊어뿌라.”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나왔다.

그동안 올케가 내게 왜 그렇게 무례했는지 이해가 갔다. 결혼 초부터 함부로 반말을 하고, 시누이라기보다는 자기 동생 대하듯이 함부로 소리치고 야단하고 그랬다. 어쩌면 결혼 전부터 나에 관해 이미 모든 것을 오빠한테 다 들었을 수도 있다. 오빠랑 올케는 4년이나 연애를 했으니 무슨 비밀이 있었겠는가.

“울지 마라. 울 것도 쎗다. 니 몰랐드나? 이북에 남편 두고 어무이 혼자 피난 나왔는데, 오빠랑 17살이나 차이나면서, 바보 아닌 다음에야 친오빠라고 생각하진 않았을 거 아이가. 이런 저런 생각 말고 고모 니도 시집이나 가라. 부모가 있나 형제가 있나, 그렇다고 친척이 있나, 니도 외롭을 거 아이가. 따질 것도 없이 웬만하면 대충 잡아서 가라.

솔직히 고모 볼 거 뭐 있나? 돈이 있나, 집안 볼 게 있나. 달랑 몸둥아리 하나 아이가. 그 나이면 옛날 같으면 재취자리도 없었겠지만, 요즘은 장가 못간 늙은 총각도 많더라. 내 친구 동생 보이까 이혼까지 하고도 더 어린 총각 데꼬 살더라. 쉰이 다 되 갖고, 참 세상 좋제. 나도 남자 소개 시켜준다고 난리다.”

“아이고, 엄마! 좀 그만하소! 아무리 그래도 아빠 장례식에서 뭔 소린교!”

큰 딸이 눈을 흘기며 한마디 했다.

“뭐! 가시네, 지랄한다. 내 이혼한지 언젠데.”

올케가 구시렁거렸다. <계속>

김기은 소설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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