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박소향 시인] 학교 졸업 후 백수, 상실시대의 아픔을 맛보고 있을 때였다.

친구 은경이가 첫 월급을 받았다며 근사한 레스토랑으로 초대했다. 우리는 건배에 스테이크를 먹으며 실컷 떠들어댔다.

“신입이라 일이 어렵지만, 선배들이 친절해서 괜찮아.”

“다행이다. 정말!” “너도 빨리 취직을 해야 하는데…”

“나도 취직해서 첫 월급 타면 맛난 거 살게.”

나는 농으로 한마디 더 했다. 

“얘! 조의금도 없으니까 나 취직할 때까지 죽으면 안 돼.”

월급 턱을 거하게 낸 친구와 낄낄거리다가 헤어졌다. 얼마 후 나도 취직이 됐다. 그러나 바쁜 탓에 한동안 만나지 못했다. 어느 날 다른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은경이가 교통사고로 죽었대. 벌써 장례도 치렀단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다음날 친구와 은경이 묘를 찾아갔다. 화성읍 서신 어디쯤인가 차에서 내린 후 한참이나 걸어 산 중턱의 천주교 묘지에 다다랐다“은경아! 너 내가 취직하니까 죽은 거야? 조의금 받으려고? 지지배야!”

은경이가 떠난 지 벌써 30년이 훌쩍 흘렀다. 멀리 서해가 보이는 산 중턱에서 쉬고 있는 친구, 그녀의 얼굴이 끝없이 스쳐간다. 

언제 갑자기 떠날지 모르는 목숨, 그날을 위해 오늘밤 유서를 쓴다. 펑펑 하얀 눈이 쏟아지는 겨울 이 밤에…

겨울 밤의 유서 

어느 한 때 체념했던 생의 한 부분도 
여전히 꿈꿀 수 있다고 속삭이던 당신이 
내게 준 최후의 임무를 어떤 언어로 완성해야 할지 몰라 이 밤 유서를 써요 
애꿎은 커피 잔에 꾹꾹 눌러 붙은 루즈 자국이
어디선가 묻어 온 이름 모를 죄목 같아 
뼈 마디마디 견고히 자리한 원죄의 쓴 물을 삼키며
허물어진 중심에서 시작된 빈 영혼의 목소리로
이 밤 유서를 써요
땅 밑까지 쓸쓸한 계절 끝에 서면
눈물은 다시 감미로운 목마름이 될 거라고 
당신이 사해 준 마지막 죄의 값으로 
둥둥 떠다니는 섬처럼 가벼워질 거라고 
낙엽처럼 타는 가슴 발갛게 밀어 올리며
흠집 난 상처도 삶의 일부이기에 사랑한 거라고 
인화된 과거의 영상들이 

얼룩진 삶의 한 페이지를 넘겨줄까 두려워 
더 이상 당신의 안부를 묻지 않을 거라고 
어둠도 없고 길도 없는 금단의 나라에서 
내 정원의 한 편에도 붉은 꽃이 피길 기다렸다가
이 고단한 유서의 여정을 마치고 싶다고
때로는 당신의 범주 안에서 꿈틀대며 외도하는 
지독한 어둠의 색도 
내 기도의 일부였음을 인정해 주시길 바라며 
천국의 배경이 된 상처투성이 별에서도 
당신은 늘 나의 안부를 물어 주세요 
시간의 가지 위에 흰 눈이 내려
마른 언어의 끝에서 노래가 시작되면
짖궂은 삶의 띠도 희망이 되게 하는 당신 앞에
하얗게 무릎 꿇는 긴긴 밤에...

박소향 시인｜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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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박소향은
한국문인협회 회원으로, 시와수상문학 사무국장으로, 스마트폰 전자책문학 ‘파란풍경마을’의 시낭송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며 ‘시사랑운동’에 남다른 열정을 쏟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