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박하 작가] 장영웅과 이한무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점심시간을 최대한 써먹는 족속들이다. 하다못해 시간이라도 남으면 사우나에 가서 때를 불린다거나 다방에서 죽치고 앉아 있는 경우가 다반사다.

신문사 사람들은 대개 점심시간을 두 시간씩이나 허비한다. 언제부터인가 그것이 습관처럼 배어 있었다. 석간신문이다 보니 편집국은 오전 시간이면 한바탕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다. 두 시간의 점심시간은 바로 그런 편집국 직원들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은연중 자리 잡은 것이다. 그런데, 그런 타성이 알게 모르게 다른 국의 부서까지 전염된 셈이다.

함봉호는 간단하게 자판을 두들겨 노조 탈퇴서를 작성해 프린터로 출력했다. 최근에 회사에서 바꾸어 준 레이저 프린트는 고급제품이라 인쇄가 빠르면서도 선명하게 잘됐다.

― 본인은 개인 신상의 이유로 노조를 탈퇴합니다. 노조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면서 노조원으로 등재되어 있는 것이 부끄러워 노조 탈퇴서를 제출하는 바입니다. ―

함봉호는 슬며시 사무실을 빠져나와 노조 사무실이 있는 8층으로 올라갔다. 아직도 점심시간이 끝나지 않은 탓인지 노조 위원장은 보이지 않고 여자 총무만 보였다. 폐병 환자처럼 얼굴이 헐쑥한 그녀는 편집국 편집부 소속의 노조 전임 위원이었다. 회사의 월급을 받고 있지만 회사를 위한 일은 전혀 하지 않는 여자였다. 그만큼 노조의 힘은 막강했다.

언제인가 한번 본 그녀의 끼는 보통 이상이었다. 노조 초창기 출범 당시 머리에 빨간 띠를 두르고 오른손을 용감무쌍하게 치켜 올리던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한눈에 척 봐도 대학생 시절에 운동 꽤나 했을 법한, 매일 밥만 먹고 출진가(出陣歌)만 불렀을 성싶은 여자였다. 150㎝ 정도의 단신에다 왜소한 체구임에도 불구하고, 그 어디에서 그런 힘이 용솟음치는지 불가사의할 정도였다.

함봉호는 그녀를 처음 보고 그가 학창 시절에 봐 왔던 전형적인 운동권 출신임을 한눈에 척 알아 봤다. 검은 안경테 너머로 쳐다보는 희멀건 눈동자는 핏기가 적당히 없는 것이, 일순간에 상대를 소름이 조옥 끼치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단 한마디로 그녀의 패에 깃대를 꼽고 싶은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는, 성욕이라고는 조금만큼도 솟구치지 않는 여자였다. 물론 짚신도 짝이 있듯이 그녀를 좋아하는 남자와 결혼한 유부녀이긴 하지만, 남자들이 상투적으로 말하는 여성의 매력을 한 올도 느낄 수 없는 필부였다.

함봉호는 대개 자신의 외모에 자신이 없는 여학생들이 운동권에 뛰어드는 것을 익히 보아 왔다. 그야말로 미인 소리를 들을 만한 여학생들은 눈 씻고 봐도 좀처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함봉호는 나름대로 그에 대해 모종의 결론을 내린 바 있다. 여성으로서의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그녀들의 유일한 해방구가 곧 운동권이었음을. 물론 그녀들이 그런 궤변론을 듣는다면 당장이라도 함봉호의 얼굴에 오선을 글 것이다.

아무튼 함봉호는 그녀를 보자마자 당혹해 한다. 겉으로 표현만 하지 않았을 뿐이지 솔직히 섬뜩한 느낌마저 인다. 그녀와 직접 대면해 어떤 대화라도 한마디 건넨 적이 없는데도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노조 탈퇴서’라고 적힌 백지를 건네자 그녀는 다짜고짜 함봉호를 째려본다. 매서운 눈이다. 함봉호는 순간 그녀의 눈이 살모사를 닮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함봉호는 뒤로 밀리지 않는다. 이미 예상했던 바였으므로 그대로 밀고 나간다. 두 남녀의 눈이 칙칙하게 교접한다. 어느덧 함봉호의 눈이 그녀를 압도한다. 허락 없이 함부로 대들었던 그녀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린다. 함봉호는 득의만만한 웃음을 던진다. 홀로 떨어진 운동권은 힘이 없는 법이다.

“아, 네…!?”

그녀가 가까스로 한숨처럼 한마디 토한다.

전혀 예상치 않은 일이 터지자 어떻게 수습할지 난감해 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그러므로 더 이상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한다. 다만 그녀는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쓸 따름이다.

“그럼….”

함봉호도 한 소절만 읊조리고 노조 사무실을 나온다.

함봉호는 복도 계단을 내려오면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고 입술을 꾹 깨문다. 노조 탈퇴가 이렇게 통쾌한 것인지 예전에 미처 몰랐던 자신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국내 언론사 최초로 노조 탈퇴를 했다는 자부심도 은근히 한몫 거든다.

‘잘했다, 자식. 너는 큰일을 한 거야.’

함봉호는 자신을 애써 토닥인다.

노조의 탈을 쓴 위선자들의 그늘에서 벗어난 것이 이렇게 속 시원할 줄은 감히 꿈도 못 꿨다. 그에게 노조 탈퇴의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은 놈들의 거짓과 위선이다. 노동운동가 전태일의 똥구멍도 따라가지 못하는 놈들이 감히 전태일을 부르짖으며, 노동 삼권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꼴은 정말이지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다. 오로지 간부들만의 승진을 위해 위선적으로 동료들의 어깨를 휘감고 감히 ‘아침 이슬’을 부르는 그들이다. 승진이란 곧 동료를 짓밟고 올라가는 일이란 평범한 진리를 감춘 악마들이다.

사무실로 들어오는데 때마침 박철수 실장이 국장실에서 나온다. 함봉호는 문을 열고 들어서려다 말고 재빨리 옆으로 피한다. 가벼운 목례를 주었는데도 박철수는 시큰둥하게 받는다. 함봉호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이 충격을 맛본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하지만 함봉호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든다. 착각일 것이라고 위안한다. 함봉호가 노조를 탈퇴했다는 소문이 벌써 박철수의 귀에 들어갔을 리가 없다고. 하지만 좀 전에 본 박철수의 눈치가 여전히 앙금으로 남는다. 과연 그렇게 핫라인처럼 빠를까.

사무실에는 어느새 구본하를 비롯한 기자들이 들어와 자리에 앉아 있다. 원고를 마감한 이후여서 좀은 한가한 모습들이다. 함봉호가 자리에 앉자 구본하가 멍한 시선을 준다. 여전히 무미건조한 눈길이다. 함봉호는 괜한 헛기침을 하며 딴전을 부린다. 쓸데없이 도둑이 제 발 저리는 짓을 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이다.

“오늘은 점심 식사가 좀 늦었네?”

“아, …네, 대학 선배 만나고 오는 길이라….”

“근사한 식사 했나 보지?”

“하이고, 아닙니다. 그냥 간단한 거….”

함봉호는 구본하의 물음에 건성으로 대답한다.

구본하의 단점은 다른 사람에 대해 지나치게 관심이 많다는 점이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함봉호로서는 그렇게 적당히 둘러댈 수밖에 없다. 순진하게 그대로 다 받아 주었다가는 본전도 못 찾는 경우가 다반사다.

함봉호는 더 이상 사무실에 있고 싶은 마음이 싹 가셨다. 답답한 기분이 들어 바람이라도 쐴 요량으로 밖으로 나왔다. 이한무 부장에게는 취재차 외출한다고 말해 놓았다. 늦으면 대학로에서 바로 퇴근할 수도 있다고 귀띔해 뒀다. 보고하지 않고 나갔다가 또 다시 시말서를 쓸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이한무 대신 장영웅이 그런 약점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으므로 더욱 조심했다.

아무튼 오늘 같은 날은 심기가 불편한 관계로 안정을 되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문제는 노조 탈퇴서를 제출한 데서 비롯됐다. 함봉호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현관 수위실에서 배창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녁에 「충무로돼지갈비」에서 만나 소주 한잔하자고 확인하는 절차였다.

함봉호는 그동안 대학로에 나가 연극 한편을 관람하고 올 작정이었다. 근무시간에 연극을 보는 것도 업무의 연속이었으므로 하등 문제없는 일이다. 초창기에 영화를 담당했던 함봉호는 요즘 연극을 맡고 있다.

연극은 기자들이 웬만하면 하기 싫은 인기 없는 분야 중의 첫째이다. 왜냐하면 연극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대개 가난한 탓에 어느 분야보다 인색했기 때문이다. 촌지는 감히 찾아볼 수가 없는 희귀한 데가 연극계였다. 배우는 물론 연출가들이 자신의 연극적인 끼만 고집하며 근근이 연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므로 연극 담당 기자들은 아예 연극 기사를 선심 쓰듯이 써주곤 했다. 그런 반면에 그들은 다른 분야의 사람들보다 정이 훨씬 넘쳐났다.

솔직히 어떨 때는 미안할 지경이다. 취재를 위해 부득불 텅 빈 공연장에서 관람하다 보면 측은한 마음까지 든다. 그렇다고 티켓을 끊고 들어간다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함봉호가 식대와 술값을 내는 경우도 있다. 연극은 여간 해서 성공하기 힘들다. 하지만 한번 뜨면 공전의 히트를 지속하는 경우의 수가 파생한다.

함봉호는 그런 그들의 아픈 마음을 알고 난 이후 웬만하면 지면을 크게 할애해 써주려고 노력한다. 주간지 「피아」 독자 중 상당수가 프로급의 문화생활을 즐기고 있어 그 기사 효과는 제법 괜찮다. 그런 얘기는 연극 담당자들로부터 수없이 들어 잘 아는 바다. 신문이나 방송 등 유수 언론들이 음지의 그들을 외면하는 반면 「피아」 만큼은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함봉호는 연극계의 유명 인사들과 친분을 많이 쌓고 있다. 인기 있는 유명 여배우나 연출가들과 격의 없이 전화 통화까지 할 정도이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쉽지 않은 경로가 있었다. 촌지와 무관하게 기사를 잘 써준다는 것을 인식시키기 위한 일종의 보이지 않는 힘겨루기였다.

함봉호는 연극을 구경한 이후 신인 여배우와 간단한 인터뷰를 마치고 서둘러 충무로로 돌아왔다. 배창호와의 약속 시간이 약간 지난 탓이다. 배창호는 이미 「충무로돼지갈비」에 와 앉아 있다.

“아까 오후에 나가는 것 같더니…, 어디 갔다 오는 길인가?”

“아, 내가 말 안 했구나. 저, 대학로에 가서 연극 한편 보고 오는 길입니다.”

“참, 좋네. 연극도 맘대로 구경하고….”

“연극 구경하는 것이 일인데요, 뭐.”

“하긴 그렇지. 그나저나 나도 언제 연극 구경 좀 시켜 줘. 아니, 젊고 예쁜 여배우와 저녁 때 술 한잔하게 연결해 줘.”

“하이고, 선배님?! 어디 그게 맘대로 됩니까?”

“아따, 자네 실력이면 충분히 되지 않나? 내가 알기로는 연극계의 마당발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하핫, 그렇습니까? 알았습니다. 언제 한번 기회가 되면…. 하지만 이상한 짓은 금물입니다.”

“어허, 내가 무슨 카사노반 줄 아는가!”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알량한 농담을 나눈다. <계속>

박하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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