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박하 작가] 함봉호는 처음 판매국으로 입사한 후 6개월간 묘한 방황 끝에 출판국에 정착한 후 배창호와 함께 출판부에서 근무하기 시작했다. 나이가 7살이나 연상이었으므로 친형처럼 대했다. 그는 술을 즐겨 마실 뿐 아니라 매사에 아는 것이 많았다. 그도 함봉호 못잖게 다방면으로 박식했다. 그런 점에서 두 사람의 대화는 서로 잘 통하는 편이었다.

무엇보다 배창호가 함봉호에게 호감을 갖게 된 동기는 따로 있었다. 물론 그 사실은 나중에 배창호가 고백한 이후 깨달은 것이다.

함봉호가 처음 입사하고 맡은 첫 임무는 추리소설 번역 건이었다. 일본의 한 신문사에서 발행한 『수요공급 살인사건』의 번역본을 다시 손보는 일이었다. 함봉호가 그 책의 교정을 본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그가 예전에 소설을 쓰고 다뤄 보았다는 점이 홍달표 출판부장의 귀에 들어간 탓이다. 그가 들어오기 전에는 그 일을 배창호가 맡고 있었다.

배창호가 보던 교정지를 받아 쥔 함봉호는 물 만난 고기처럼 능수능란하게 문장의 허와 실을 파헤치며 교정을 보았다. 번역본이 어딘가 허술했기 때문에 소설의 원본을 미국에서 구해 와 영어와 일본어를 서로 비교하며 볼 정도였다. 원본은 그 당시 사장이 미국 출장길에 직접 사 왔다. 일본어판이 어딘가 잘못 번역됐다 싶으면 원본을 보고 수정했다. 함봉호가 번역의 오류를 발견하면 영락없이 맞아떨어졌다. 배창호는 함봉호의 그런 모습에 반했다.

함봉호는 한국어로 번역한 문장을 거의 다 뜯어고쳤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일본어를 전문으로 번역하는 환갑이 넘은 촉탁 사원인 김 선생이 무안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함봉호는 그것도 모른 채 막무가내로 완전히 뜯어고쳐 새로운 소설 작품으로 만들었다. 사실 신입사원으로서 부서 분위기를 미처 파악하지 못한 것이 실수였다. 그래도 곧이곧대로 하는 스타일이 함봉호의 특허였기에 부득이했다.

훗날 들은 얘기이지만, 그때 함봉호가 김 선생의 원고를 수정하자 홍달표가 속으로 고소하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일본어에 묘한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던 홍달표는 일본어통인 김 선생에게 모종의 질투심을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다.

시간이 흐른 뒤 김 선생은 사석에서 그 당시의 기분을 토로했다. 처음에는 기분이 불쾌했지만 나중에 다 고친 것을 보고는 수긍이 갔다고 했다. 자신이 번역한 문체는 아주 평범한 데 반해 함봉호가 고친 문장은 소설체로 제격이었다고 칭찬까지 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이후 함봉호는 나이 차가 30살이나 되는 김 선생과도 가까운 사이가 됐다. 어쩌면 김 선생이 적수를 만나 꼬리를 내렸는지도 모른다.

함봉호는 완벽한 번역을 위해 그 방면의 내로라하는 일류급 교수들에게 찾아가 질문하기까지 했다. 명문여대 영문학 교수인 동시에 문학평론가에게도 번역 자문을 구했다. 물론 회사에서 사례금이 나오지 않았으므로 함봉호가 혼자 해결해야 했다. 다행히 그 교수는 함봉호의 고교 선배여서 그것이 가능했다. 마음 같으면 약간의 사례금을 주고 싶었지만, 매사에 윗사람 눈치를 보는 데 급급한 홍달표가 그것을 인정할 턱이 없었다. 함봉호는 그 사실을 사전에 배창호에게 의견을 타진해 봤다. 그도 역시 안 된다고 귀띔해서 애초부터 포기했다.

뿐만 아니라 제대로 번역한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를 싣기 위해 유명 시인도 직접 찾아가 만났다. 당시 대학 교수인 시인이 때마침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를 번역해 시집으로 엮었다. 그가 번역한 『상품의 노래』라는 시집 중 일부를 책머리에 실었다.

 

― 도대체 쌀이란 뭔가. 쌀이 뭔지 나는 아는가. 누가 그것을 아는지 내가 알게 뭐람. 쌀이 뭔지 나는 모르네. 나는 그저 쌀값만 알고 있을 뿐.

도대체 솜이란 뭔가. 솜이 뭔지 나는 아는가. 누가 그것을 아는지 내가 알게 뭐람. 솜이 뭔지 나는 모르네. 나는 그저 솜값만 알고 있을 뿐.

도대체 인간이란 뭔가. 인간이 뭔지 나는 아는가. 누가 그것을 아는지 내가 알게 뭐람. 인간이 뭔지 나는 모르네. 나는 그저 인간값만 알고 있을 뿐. ―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집에서 인용한 시구는 아주 간단했다. 그야말로 너무 단순한 어투로 쓴 것이어서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그 내용을 파고들면 의외로 난해한 선에 봉착한다. 일테면 범선이 쉽게 근접할 수 없는 절벽과 같은 장애물이다. 자칫 얕잡아 보고 덤볐다가는 난파선이 되기 딱 알맞다.

쌀값과 솜값은 그런 대로 이해가 간다. 그러나 쌀과 솜의 정체에 대한 물음에는 일순간 당황한다. 아무런 감흥을 느낄 수 없는 물상에 대한 뜻밖의 질문인 탓이다. 문제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 데 있다.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인간 값만 알고 있다’는 작가의 글에 그 당황은 절정에 달한다. 과연 ‘인간의 값’이 얼마나 나간다는 것인지, 암담해지지 않고는 도저히 못 배긴다.

결국 이에 대한 모범 해답은 『수요공급 살인사건』을 다 읽고 나서야 비로소 얻을 수 있다. 하버드대학의 교수임용승진제도도 선상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을 통해 인간의 값이 매겨지기 때문이다. 물론 소설의 말미에서 인간값을 제대로 아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겠지만.

아무튼 함봉호는 첫 작품으로 안타를 멋지게 날렸다. 『수요공급 살인사건』은 출간된 지 두 달 만에 재판을 찍고 곧 3판까지 찍었다. 그 당시에 일류작가의 소설이 아닌, 그것도 번역물 추리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결과 함봉호는 배창호와 친한 사이가 되었고, 드디어 보이지 않게 타인의 눈에도 띄기 시작한 것이다.

남의 눈에 든다는 것. 그것은 곧 불행의 씨앗이다. 일테면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가의 예쁜 꽃들이 빨리 꺾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래서 참나리는 사람이 근접하기 힘든 깊은 산속 절벽 가까이 피어나지 않는가. 그래서 된 사람과 든 사람은 일부러 돋보이지 않으려고 꼭꼭 숨어 있지 않는가. 자칫 명예욕에 눈이 멀어 사람들의 틈새에 끼다 보면 결국 화를 부르듯이.

“아무튼 자네가 그런 결정을 내린 것에 대해서는 내가 왈가불가할 것은 못 되지만…,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 할 걸세.”

“그거야 다 각오한 밥니다.”

“각오라는 게 뭐야?”

“아…, 노조 놈들이 저를 따돌리겠지요. 지가 뭔데 하면서요.”

“당연하지. 그런데 그것을 참을 수 있겠나?”

“그럼요. 어려서부터 그런 일에 아주 익숙해져 있어서요.”

“허! 그래!?”

배창호가 눈을 치켜뜬다. 함봉호가 의외로 당차게 나가는 데 적잖게 놀라는 눈치이다.

외톨이가 되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는 것. 실로 보통 사람들이라면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일이 아닌가.

“선배는 어린 시절 동네 아이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해 본 적이 있나요?”

“글쎄, 나라고 왜 없었겠어? 하지만 그렇게 기억나는 것이 없네. 그러고 보면 그다지….”

“선배같이 평범하고 덩치 큰 사람은 따돌림을 당하지 않지요. 저같이 좀 모난 놈들이나 그럴까….”

“그럼, 자네는 왜 그리 모나게 사는가?”

“그렇게 사는 게 더 좋아서요.”

“허허, 참…. 자네는 정말 재미있는 친구야.”

“선배! 그러나 정작 따돌림을 당하는 쪽보다 상대 놈들이 더 어렵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엉? 그건 또 무슨 말이야? 갈수록 재밌네.”

배창호가 복어매운탕 국물로 만든 냄비 바닥의 볶음밥을 박박 긁다 말고 멈춘다. 건성으로 듣는 듯하던 귀가 그쯤에서 번쩍 뜨인 모양이다. 자칫 함봉호의 말이 철학적인 측면으로 기울 수 있는데도 얼마든지 자신 있다고 득의만만한 표정이다.

“난쟁이든…, 언청이든…, 벙어리든…, 그들 비정상인들은 정상인들이 자신들을 따돌린다는 것에 징그러울 만큼 익숙해져 있어요.”

“어디, 그런 사람들만 따돌림을 당하는 것은 아니잖아?”

“물론 그렇지요. 그들은 그런 대로 괜찮아요. 그런데 문제는 평범한 사람까지 따돌림을 당한다는 데 있지요. 공부를 잘한다거나, 얼굴이 예쁘다거나, 잘난 척한다거나, 괜히 예쁜 짓 한다거나, 누군가에게 편애를 받는다거나, 이유 없이 밉다거나 그러면 작당해서 따돌림을 주잖아요.”

“그런데…?”

“당하는 그들보다 그들을 따돌리려는 놈들이 더 힘든 이유는…, 놈들은 따돌림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알고 그것을 손수 실천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런 과정이 더 힘들다는 얘기입니다. 심적 고통이 따르게 마련이지요. 그러나 놈들은 그 고통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는, 또 다른 고통을 서너 번 더 겪는 겁니다.”

“햐!?”

“결국 부처님의 윤회설이 여기서도 통하는 셈이지요.”

“어이구…, 너무 힘들다. 자, 그만 나가지. 이따 저녁에 술 한잔함세.”

“좋습니다. 그리고, 오늘 일 고맙습니다.”

“에이,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배창호가 머리를 긁적인다.

두 사람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서로 헤어진다. 배창호는 은행에 가서 일을 보아야 한다며 반대 방향으로 갔다. 함봉호는 그의 속마음을 넉넉히 읽을 수 있다. 회사 동료인 두 사람이 점심 식사를 마치고 당연히 사무실에 함께 들어가야 하지만, 오늘만큼은 배창호가 적당히 거리를 두어야 하는 이유를 말이다. 만약 오늘 두 사람의 행보를 누군가 발견한다면, 훗날 그들의 간계는 적당히 오해를 받을 수도 있음을….

함봉호는 사무실로 들어가 자리에 앉자마자 노트북을 켠다. 노조 탈퇴서를 작성하기 위한 것이다. 사무실은 점심시간이어서 아직도 썰렁하다. 대부분의 자리가 비어 있다. 여기자들도 오랜만의 여유 시간을 즐기는지 아무도 없다. 아무래도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한창 떨고 있을 시간이다.

여민수만 혼자 앉아 뭔가 노트북의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어쩌면 기사를 쓰고 있을 터이다. 조용한 성격의 여민수는 거의 혼자 밥을 먹는 경우가 허다하다. 편집국에서 쫓겨 올라온 전직 기자 출신인 데다 워낙 조용한 성격이어서 누가 쉽게 근접하지 않는 탓이다. 게다가 계약직 사원인 여기자들에 비해 월급이 4~5배 많은 것도 한 요인이다. 물론 그것에 가장 예민한 여기자들이 그를 가장 피한다. 그것은 참으로 슬픈 장애물이다. 함봉호에게는 더욱 아픈 상처이다. <계속>

박하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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