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정병국 작가] 종일 비가 쏟아 졌다. 비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지영은 더 이상 문장을 이어가지 못했다. 일요일 오후 다섯 시, 글을 다 쓰기 전에는 연락하지 않겠다던 약속이 이틀 만에 깨졌다.

“알았어. 지금 바로 갈게.”

지영은 재빨리 스마트폰의 전원을 껐다. 왠지 그가 다시 ‘못가, 아내가 돌아왔어’라고 전화할 것 같아서였다.

그는 샤워를 끝내고 머리를 말리려고 할 때 노크를 했다.

“이 호텔에서는 다시 안 만나기로 했잖아. 벌써 잊었어?”

지영은 고개를 저었다.

“알면서 이 호텔의 이 방을 잡았어?”

지영은 살짝 웃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모호한 미소였다.

“그 술 있겠군.”

그는 냉장고를 열었다.

“역시 안주도 똑같고.”

지영은 작은 여행용 가방에서 컵 두개를 꺼냈다.

“오면서 생각했는데, 넌 결국 자살할거야. 그렇지?”

지영은 그의 말을 무시했다. 백포도주를 두개의 잔에 따랐다. 백포도주를 마시는 건 섹스 전의 유희이며 예식이었다. 지영은 백포도주 없이는 열정을 느끼지 못했다. 설사 몸을 허락한다 해도 석녀에 불과했다.

“그새 원고를 다 썼어?”

지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왜 연락했어? 난 지영이에게 초능력이 있는 줄 알았어. 이틀 만에 삼백 매를 쓰다니.”

지영은 침대의 베개 밑에 감췄던 원고지 한 장을 꺼냈다. 반으로 접힌 원고지를 그에게 내밀었다.

“겨우 한 줄 쓰고 난 부른 거야?”

지영은 창가로 다가가 밖의 풍경에 시선을 못 박았다. 어제부터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다. 바람이 많이 약해졌지만 그래도 가로수 가지를 휘어놓곤 했다.

“포기해.”

“안 돼! 난 쓸 거예요.”

지영은 그가 룸으로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의 빈 잔에 술을 채워주며 웃었다.

“아내가 없었나보죠? 곧바로 달려오게.”

“아니. 있었어.”

“일요일인데 용케 빠져나왔네요.”

“그냥 말없이 나왔어.”

지영은 그의 빨간색 넥타이를 풀며 가볍게 키스했다. 그의 입에서는 언제나 담배와 은단냄새가 났다. 담배냄새 때문에 은단을 먹는 모양인데 제각각의 냄새가 선명했다.

“일요일 저녁의 정장 외출, 의심할 텐데요?”

“지영은 정장이 아니면 짜증을 내잖아.”

“그랬나요? 오늘부터 그 속박에서 풀어드릴게요.”

지영은 그의 빨간 넥타이를 풀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아내가 물으면 잃어버렸다고 박박 우기세요. 싫으면 바람 피우고 정표로 주었다고 얘기하시던지.”

이번에는 그가 말이 없었다. 그는 몸 구석구석을 샅샅이 어루만졌다. 손이 지나간 자리마다 그의 두툼한 입술과 혀가 기어 다니면서 불꽃을 지폈다.

지영은 꺼지지 않는 불길이었다. 그녀 스스로 끄지 않으면 남자는 결국 타죽을 수밖에 없었다. 지영은 답답하거나 짜증이 날 때, 그를 그런 식으로 괴롭혔다.

“난 섹스 중독인가 봐요. 이제 겨우 스물두 살인데.”

지영은 점차 안정을 찾는 그의 배 위에서 말했다.

“이러다가 직업여성이 될지 몰라요. 어떤 때는 나보다 당신의 오르가슴 몸부림이 더 좋아요.”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뜨겁게 경직됐던 몸이 솜처럼 풀려 푹신한 요 위에 엎드려 있는 기분이었다.

“아직 자기 외의 남잔 몰라.”

지영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손으로는 그의 털끝이 만져지는 턱을 쓰다듬었다. 그가 눈을 뜨며 밀쳐내려 하자 지영은 목을 끌어안았다.

“가만히 있어요. 난 지금 우는 중이에요.”

울고 있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그런데, 그 말을 하는 순간 울컥 눈물이 터졌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멈추지 않고 그의 가슴을 적셨다.

“지영아!”

그의 부름은 따뜻함이었다.

“정말 내 곁을 떠나고 싶니?”

그의 두툼한 손이 머리 결을 쓰다듬었다.

“네가 떠나도 난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가끔은 만나자.”

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곁을 언제 떠나게 될지 알 수 없지만, 어차피 함께 살 수 있는 운명은 아니었다. 꼭 부부가 되어 아들 딸 낳고 살아야 행복한 사랑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불륜은 역시 불행일 수밖에 없었다.

“우린 불륜이죠?”

지영은 하고 싶지 않은 말을 기어이 입 밖에 냈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겠지. 하지만 난 아냐.”

“저도요. 그러나 불륜은 불륜이잖아요.”

그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호텔 룸을 나설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지영이 역시 침묵을 지켰다. 그가 나가고 문 닫히는 소리가 났을 때 벌떡 일어났다.

문을 멍하니 바라보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접힌 원고지를 집어 들었다.

두 줄의 원고 다음 행에 볼펜으로 기도하듯 또박또박 썼다.

그가 문을 열고 다시 들어왔다.

정병국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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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병국은...
도서출판 ‘지식과사람들’ 및 문예계간 ‘시와 수상문학’ 발행인. ‘문예창작아카데미’와 스마트폰 전자책문학 ‘파란풍경마을’을 운영하고 있다. 정병국 性풍자 콩트는 매주 화요일 연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