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박하 작가] “자, 여기 열쇠…. 열어 주세요.”

하지혜는 핸드백에서 열쇠를 꺼내 준다.

함봉호는 문을 열면서 한순간 긴장한다. 누군가 나와 금방이라도 멱살을 잡을 것은 두려움을 맛본다. 그러나 아파트 거실에는 누구 하나 인기척이 없다. 거실 소파에 널린 옷가지와 주방의 널브러진 식기들이 한눈에 척 봐도 지저분하다. 함봉호는 금세 눈치를 챈다. 하지혜가 혼자 살고 있다는 것을.

하지혜의 집에 처음 와본 것이므로 함봉호가 그것을 알 턱이 없다. 물론 하지혜도 그 사실을 그에게 털어놓은 적이 없다. 굳이 그런 사생활을 말해 봤자 득이 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함봉호도 일부러 그것에 대해 질문할 처지가 못 된다. 그저 모른 척하는 것만이 최선이다. 물론 하지혜 혼자 사는 집이 30여평이나 된다는 점이 좀은 이상하지만 조만간 알게 될 것이다.

하지혜는 거실로 들어서자마자 스커트와 블라우스를 벗어 버린다. 얇은 한 겹의 옷이 흘러내리자 그대로 속옷뿐이다. 하지혜의 몸이 눈부시다. 역시 젊은 여자의 몸매는 비너스처럼 환상적이다.

함봉호는 애써 눈길을 돌린다. 가슴이 천둥치듯 우당탕탕 아우성들이다. 속의 몹쓸 놈들이 찌르고 쑤시고 야단법석이다. 놈들이 그의 위선에 대해 한바탕 데모를 벌이는 중이다.

하지혜는 여전히 비틀거리며 안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몸을 던진다. 서너 번 출렁거리는 틈에 그녀의 하얀 패가 보인다. 은밀한 그녀의 수렁에서 음한 바람이 불어온다. 더 이상 바라보는 것조차 힘이 들다. 아무래도 뾰족한 팻감이 없다. 이만 돌을 던져야 할 때가 된 듯싶다.

함봉호는 흔들리는 자신이 우스꽝스럽다는 생각에 허망한 미소를 흘린다. 그는 곧바로 소파에서 일어난다. 가죽 소파가 묘한 불협화음을 낸다. 잔잔한 수면에 돌을 던진 듯한 파동마저 인다.

“오빠! 자고 가세요. 밤도 늦었는데….”

하지혜가 인기척을 들었던 모양이다.

함봉호는 일어나다 말고 다시 소파에 주저앉는다.

“내 옆에 와서 자도 돼요. 부끄러워할 것 없어요. …내가 다 용서해 줄게요. 언니한테 말 안 할게요.”

“내가 부담되면 그냥 거기서 주무세요. 굳이 비싼 택시비 주고 집까지 갈 필요 없잖아요.”

“오빠! 나중에 후회하지 마세요. 하지만…, 그렇다고…, 나를 허튼 계집으로 보면 그건 큰 오산이에요.”

“이리 들어와! …오빠!”

하지혜가 연신 주절거린다. 술에 취한 그녀의 목소리가 천태만상이다. 음질의 대부분에 졸음기가 담겨 있다. 그래서 간혹 잠꼬대로 착각되기도 한다. 또한 자장가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런 덕에 함봉호는 깜박 눈을 붙인다. 아늑한 분위기, 그리고 적당한 자장가가 어울린 탓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함봉호가 순간 눈을 뜬 이유는 뭔가 새털같이 부드러운 감촉이 그를 짓눌렀기 때문이다. 함봉호는 눈을 떴지만 움직일 수가 없다. 그의 몸 위에 하지혜가 포개 엎드려 있던 것이다. 하지혜는 긴 머리를 흐트러뜨린 채 재미있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고 있다.

함봉호는 어이가 없어 눈길을 피해 괘종시계를 쳐다본다. 시간은 이제 새벽 1시를 벗어나고 있다. 잠시 동안 눈을 붙인 줄 알았는데 그새 40여분이 지난 것이다.

하지혜의 잠옷이 지나치게 부드럽다. 그녀는 언제 화장을 지웠는지 맨 얼굴이다. 그런 모습이 더 요염하다. 여자의 얼굴은 대부분 화장을 지우고 나면 형편없다. 그는 결혼 첫날밤 아내의 그런 얼굴을 보고 적이 놀란 것이 아니다.

응접실 탁자 위에는 양주와 술잔이 있다. 그리고 간단한 마른안주와 야채샐러드가 준비되어 있다. 자세히 보니 하지혜는 그가 잠든 사이에 양주를 몇 잔 마신 듯했다. 하지혜의 얼굴은 좀 전보다 훨씬 격앙된 모습이다. 옆에서 술을 마시다 말고 술기운에 함봉호의 입술을 훔치고 싶은 충동이 일었던 모양이다. 아니 함봉호의 육체를 탐하려는 배짱이 두둑해졌을까.

“어머, 일어나셨네요. 잠든 모습이 너무 귀여워 내가 그만 실수를….”

하지혜가 입술을 배시시 비튼다.

“아니, 내가 깜박 잠들었던 모양이군. 이거 큰일 났네.”

“언니가 걱정돼서요?”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괜찮아요. 이미 내가 언니한테 전화했어요. 술에 취해 우리 집…, 남동생 방에서 잔다고….”

“…….”

그야말로 완벽한 거짓말이다. 거짓말이란 가끔은 유용하지만 이런 경우는 지극히 가살스럽다.

함봉호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사실 그는 아내에게 미처 말하지 않았던 것이 가장 큰 걱정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를 하지혜가 구해 준 셈이다. 그야말로 완벽한 알리바이가 성립된 것이다.

함봉호는 하지혜가 피한 틈에 재빨리 몸을 일으킨다.

“자, 한잔하세요.”

하지혜가 양주를 따른다.

“내일 출근 안 해?”

함봉호가 놀란 눈으로 쳐다본다.

“뭐 하루 정도 제낄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에이, 그래도 그렇게까지?”

“아니에요. 이 정도 가지고 출근까지 안 할 수야 없죠. 자, 걱정 말고 드세요. 그리고 이왕 늦은 거 그냥 여기서 주무시구요.”

“아까 전화했다며….”

“그러니까 하는 말이에요. 그리고…, 제가 유혹하지 않을게요.”

“후훗…, 지혜는 어떨 때 보면 꼭 선머슴 같아.”

“그런 얘기 많이 들어요. 하지만 저도 알고 보면 부드러운 여자라고요.”

“누가 아니래?”

“자, 건배! 우리 집 입성을 축하하면서…!”

“하핫, 입성?!”

“아무튼 뭐든지 축하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래, 그건 그려.”

두 사람은 잔을 부딪친다. 하지혜가 인상도 쓰지 않은 채 단숨에 잔을 비운다. 그런 반면 함봉호는 몸을 사리며 눈치를 본다.

“어머, 선배님! 완 샷!”

하지혜가 그런 함봉호를 질책한다.

함봉호는 마지못해 양주잔을 다 비운다. 그러자 하지혜가 또다시 잔을 채워 준다.

“지혜는 왜 혼자 살지? 부모님은 다 어디 가고?”

“아, 제가 말 안 했나요? 부모님은 다 미국에 갔어요.”

“언제? 그랬나? 그럼 아주 이민을 간 건가?”

“네.”

“금시초문인데….”

“굳이 그런 얘기를 할 필요가 없어서….”

“하기는, …그런 소문이 나면 사내들이 호시탐탐 노릴까 봐?”

“어머, 꼭 그런 건 아니고….”

하지혜가 눈을 흘기며 잔을 부딪친다.

술 마시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진작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런데, 왜? 막내딸을 남겨두고 미국으로…?”

“말년에 고생하지 말고 미국에 와서 살라고 오빠가 불렀어요.”

“아, 그랬군. 하기는, 미국이 여기보다 살기는 더 낫지.”

“이 막내딸 속 썩이는 거 안 보니까 얼마나 좋아요?”

“허허, 지혜가 그 정도로 속을 썩였나?”

“그럼요. 술도 잘 마시고, 이렇게 유부남도 꼬시고….”

“떽기! 농담 그만!”

“호호홋!”

하지혜가 특유의 웃음을 내뱉는다. 머리를 뒤로 젖히고 호탕하게 선머슴처럼. 그 틈에 언뜻 풍만한 젖가슴이 보인다. 함봉호는 머리를 휘젓는다. 우연히 마주친 것일지라도 가식적인 자신의 눈길이 미웠다. 마음만 먹으면 금세 일을 낼 만큼 아름다운 여체가 지척에 있다.

함봉호는 서두른다. 차라리 취하는 것이 현명한 대처 방법일 성싶다. 취하지 않으면 분명 사고를 칠 것 같다. 그 역시 별다를 바 없는 사내였으므로 자신이 없던 것이다. 하지혜의 몸은 지나치게 뇌쇄적이다. 그녀의 어디에서 그런 묘한 마력을 내뿜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보통의 여자들과 다른 것만 확실할 뿐이다.

함봉호는 흐릿해지는 기억을 아주 찰나적으로 느낀다. 그리고 그 다음은 연결할 수가 없다. 끊어진 필름을 잇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이던가. 얼마나 많은 양의 술을 마셨는지 생각조차 안 난다.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떴다. 미명이다. 낯선 곳에 있다는 것을 처음 발견할 때는 새삼스럽게 공포감을 안겨 준다. 소파에 무너진 채 잠이 들었던 것이다. 탁자 위의 양주병이 두 개나 된다. 얼마나 마셨는지 다 비어 있다.

하지혜는 안방 침대에 누워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다. 잠버릇이 나쁜지 이리저리 뒹굴어 잠옷이 다 벗겨져 있다. 요염한 속옷도 무방비 상태다. 연두색 삼각팬티가 눈부시다.

함봉호는 잠시 혼돈을 겪다가 매몰차게 발길을 돌린다. 아파트를 빠져나오자 한결 기분이 낫다. 역시 아파트는 살 만한 곳이 못 된다. 경비원이 꾸벅꾸벅 졸고 있다. 겁 없는 까치 한 마리가 그를 따라온다. 아파트의 까치들이 비둘기를 닮아 가는 것일까. 함봉호는 쿡 웃는다. 아파트 정문 앞에 사우나가 보인다.

무엇인가 묻어 있을 듯한 흔적을 지워야 한다. 그러나 정신적인 흔적을 지워낼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계속>

박하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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