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김병호 시인의 ‘밤새 이상을 읽다’ 표지.
[골프타임즈=성아라 인턴기자] 사람 나이가 마흔이 되면 그래도 사는 것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는 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슬하에 자식도 두엇 있을 것이고 직장에서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을 나이. 언뜻 보면 안정적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다.
마흔을 불혹(不惑)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일까. 하지만 김병호 시인의 마흔은 조금 다른 듯하다. 그에게 있어 마흔은 지나온 길들을 더듬어보는 시간이다. 지나온 길들에는 주변 사람들도 있고 스쳐지나왔던 풍경들도 있고 자신의 지난 생들도 있다.
고목에 눌어붙은 이끼처럼 돋아나는 검버섯들
한때 처녀였고, 어머니였던 흔적들
(중략)
힘겹게 엉거주춤 앉은 어머니는
간지럽다며 연신 웃음만 삼키는데
검버섯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고
알뜨랑비누는 자꾸 미끄러지기만 하고
-「엉거주춤」 중에서
화자는 여름날 어머니의 등목을 도우며 어머니의 등을 가만히 바라본다. 오랫동안 자식들을 보살펴 온 어머니 등에 핀 검버섯을 화자는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다. 어머니 등에 새겨진 세월의 흔적은 지워질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엉거주춤’은 꼭 마흔 같은 시어다. 앞으로 가야할 길도 많이 남아서 주저앉을 수는 없고 그렇다고 벌떡 일어나서 달리기엔 많은 것에 지치고 꽤 많은 것을 알아버린 나이. 청춘의 활짝 피는 시간도, 노년의 시들어 떨어질 일만 남은 시간도 아닌, 간절기 같은 시간이 마흔이다.
국수 한 그릇을 비우는 동안 노인은 고개 한번 들지 않습니다 (중략) / 그리움도 없이 살면서 자꾸 창밖만 내다보는 병은 겨울에 가깝습니다 / 한자리에 고이는 일 없이 흐르는 울음처럼 눈이 내립니다 / 겨울이 지나면 국수집 길자네도 없습니다
-「재개발지구」 중에서
이 시는 한 줄 한 줄이 각자 한 연을 이루고 있다. 그만큼 여백이 많은 시다. 시인은 자신의 시선을 독자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한 걸음 물러서서 풍경을 그려줄 뿐이다. 시 속 풍경은 마치 해가 지기 전 같은 느낌을 준다. 이미 철거가 예정돼 있는 재개발지구의 국수집은 사라지지 않은 채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손님을 받는다. 그리움도 없이 살면서도 국수집 길자는 자꾸만 창밖을 내다본다. 미련도 그리움도 없는 듯 말이 없지만 마치 두고 온 무언가를 찾으려 잠시 뒤를 돌아보는 것 같은 몸짓이다. 채 다 저물지 않은 풍경은, 마흔은 닮아 있다.
펑펑 울 일은 아니지만
한 번 더 목숨 버릴 일도 아니지만
갑자기 급소가 사라져버렸다며
친구는 서둘러 면발을 끊는다
후회나 막심 따위가 세월이나 허기와 연루된 한낮
(중략)
나도 그대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나
고드름처럼 차갑고 가벼운 이름 하나
마지막 판돈처럼 반질반질 윤이 난다
-「이름 없는 풍경」 중에서
화자는 십 년 만에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옛 연인의 뒤통수를 치고 도망왔다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지나간 옛 이름을 떠올린다. 한 번 더 목숨 버릴 일도, 펑펑 울 일도 아니라고 말은 하지만 마지막 판돈처럼 여전히 반질반질 윤이 나는 이름을 화자는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간직하고 있다.
고드름처럼 차갑게 식은 것 같지만 아무도 모르는 이름 하나를 품고 앓고 있는 것이다. 마흔이라는 나이 역시 그런 나이가 아닐까. 청춘의 뜨거움과 노년의 건조함 사이에서 남모르게 흔들리는 나이.
‘제 몸에 그믐을 새긴 잔’이나 ‘뒤늦게 이혼을 이야기하는’ 어느 아버지나 ‘단 한 번의 신음이나 비명도 없이 얼룩이 지’는 어떤 여자에 이르기까지, 김병호 시인의 시선은 저물어가는 세상의 모든 저녁들에 머문다.
그래서인지 시인은 유달리 ‘저녁’이라는 시어를 많이 사용한다. 시인의 저녁은 붉은 노을빛이 낭자하거나 쉴 자리를 찾아가는 저물녘 새떼들의 소란스러움이 아니다. 겨울나무 아래에서 오래도록 서성거려 보기도 하고 꽃나무들이 서로의 벗은 잔등에 어떻게 불꽃의 혀를 대는지도 지켜보면서 자신을 그 풍경 속에 가만히 녹인다. 감정을 날 것으로 드러내거나 강요하지 않으면서 정제된 시어들을 사용한다. 그의 시가 정갈하면서도 맛깔스럽게 느껴지는 이유이다.
새삼 사무칠 것도, 피할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아프지 않을 수 없는 나이가 마흔인 것일까. 김병호 시인에게 마흔은 어쩌면 열병을 앓는 시간이자 또 다른 사춘기일지도 모른다.
한참 달려오던 길을 잠시 멈춰 저물어가는 것들에 잠시나마 제 시선을 머무르게 하면서, 시인은 다시 또 생을 걸어간다. 그리하여 시인의 마흔은 ‘물고기 비늘만 묻은 성긴 그물을 들고’ 가는 시간이 된다.
성아라 인턴기자｜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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