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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길의 스타톡톡] 여배우 김산옥, 그의 ‘배역에서 벗어나기’

배역은 배우의 일부일 뿐, 많고 뛰어난 또 다른 몰입을 위해 덫에 갇혀서는 안 돼 윤상길 칼럼니스트l승인2017.09.19l수정2017.09.19 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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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타임즈=윤상길 칼럼니스트] ‘표절’의 윤리적 문제는 학자나 작가뿐 아니라 언론에 종사하는 기자에게도 적용되어 마땅하다. ‘표절’에 있어 ‘자기표절’도 마찬가지이다. ‘자기표절’이란 자신이 과거 창작한 저작물의 전부 또는 일부를 새로 창작하는 저작물에 다시 이용하면서 정당한 방법으로 출처표시를 하지 않은 행위를 말한다. ‘표절’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저작권법상 저작자 자신의 저작물을 본인이 이용한 것이므로 저작권 침해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필자는 이 판례에 비겁하게 편승해 글을 시작하려 한다.

필자는 지난 2011년 1월 3일자, 온라인신문 ‘TV리포트’에 ‘배우들의 배역 벗어나기’를 소재로 칼럼을 기고한 바 있는데, 이 칼럼의 내용을 ‘자기표절’해 ‘여배우 김산옥의 배역 벗어나기’를 점검하려 한다.

배우들의 ‘연기론’에 보면 ‘배역에서 벗어나기’(get out of his role)란 대목이 나온다. 이 훈련 과정의 핵심은 “좋은 연기자는 맡은 배역에 잘 몰입하는 만큼 배역이 끝난 후 잘 빠져나와야 한다.”이다. 배역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경우 배우는 작품이 끝난 다음에도 그 주인공이 된 듯 착각에 빠져 현실을 가상처럼 살게 된다. 전문가들은 이 증상이 정도를 넘을 경우 자기최면이란 심리치료법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주문한다.

액션 연기를 주로 해온 배우가 술에 취해 주변 사람들과 걸핏하면 주먹다짐을 하거나, 범인 배역을 자주 맡은 배우가 거리에서 경찰을 만나면 자신도 모르게 몸을 숨기려 하는 경우, 독실한 종교인이 그 종교를 부정하는 배역을 연기할 경우 등이 그렇다. 이런 예는 바로 ‘배역에서 벗어나기’에 익숙하지 않아 일어난다. 흔히는 “슬럼프에 빠졌다”라고 말한다, ‘반짝스타’, ‘거품인기’ 같은 표현도 결과적으로는 ‘배역에서 벗어나기’에 실패할 때 붙는 수식어이다.

‘배역에서 벗어나기’는 배우에게는 상식이다. 하지만 상식이 모든 배우에게 통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의외로 많은 배우들이 ‘배역에서 벗어나기’에 어려움을 겪으며, 슬럼프에 빠진다. 최근 시사회를 가진 문신구 감독의 영화 ‘원죄’(原罪). 이 작품에서 여자주연을 맡았던 김산옥(38)도 ‘배역에서 벗어나기’로 슬럼프를 겪는 배우 가운데 한사람이다.

‘원죄’는 ‘신성모독’이란 이유로 천주교단으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는 영화다. “하나님은 나를 심판하고, 나는 그 하나님을 심판한다”라는 포스터 메인 카피만 보더라도 천주교단은 물론 개신교단에서도 발끈할만하다. ‘절대자’를 부정하는 듯한 이 문구가 불편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 대해 문화평론가인 김정겸 박사(한국외국어대)는 ‘발칙하고 무모한 영화’, 영화평론가인 김윤겸 부장(트래블 라이프 편집장)은 ‘인간과 신의 전쟁’이라고 극평을 하고 있다.

어릴 적 끔찍한 경험(성폭행)으로 생긴 트라우마로 종신수녀의 길을 택한 수녀(김산옥), 선천성 소아마비 장애인인 남자(백승철), 뇌전증(간질병)을 앓고 있는 남자의 딸(이현주)이 ‘원죄’의 주인공이다. 영화는 이들 세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이며, 죄는 누구의 죄이며 무엇이 죄인지, 죄의 현상과 본질을 묻고 있다. 영화는 딸이 아버지를 살해하고, 그 딸은 자살하고, 구원에 나서지 못한 수녀는 파계를 택하는 결말에 이른다.

김산옥이 연기한 에스더 수녀는 신의 대리인이다. 장애인으로 태어나 모진 목숨을 이어가는 부녀는 자신들의 ‘불행한 삶’이 ‘원죄’라는 사실에 격한 반응 보인다. 자신들이 선택한 삶이 아닌데, 불행한 삶을 강요받아야할 ‘원죄’의 이유가 없다는 반항이다. 이 ‘원죄’에 대한 구원은 신의 몫이어야 하며, 에스더 수녀로 대표되는 성직자에게 그 책임이 있다며 분노한다. 남자는 여러 방법으로 에스더 수녀를 증오하고, 괴롭힌다. 이 과정에서 감독은 끔찍하고 잔인하고 역겨운 장면을 연출한다. 시종 흑백화면에 담겨진 이야기의 흐름에는 배경으로 쓰인 을씨년스런 작은 포구의 생선가게의 비릿함이 가득하다.

결과적으로 에스더 수녀는 부녀의 ‘불행한 삶’을 구원하는 데 실패하고, 자책감으로 수녀복을 벗는다. 이 일련의 과정을 연기하기 위해 김산옥은 지난 1년을 김산옥이 아닌 에스더 수녀로 살았다. 성경책을 읽고 또 읽고, 수녀 생활을 위해 전국의 수녀원을 순례하고, 장애인 단체에서 조언을 받고, 항구 어판장에서 어부와 생선중개인 등 거친 사내들과 어울려 수십차례 소주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난해한 내용 탓에 연기도 쉽지 않았다.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는 남자의 잔혹한 비난에 시달려야 했고, 심지어 숙소로 스며든 남자로부터 나신에 오각성(악마 숭배의 표시)이 그려지는 수모까지 당하는 연기가 화면 내내 펼쳐진다.

이제 영화는 완성됐고, 시사회를 통해 ‘문제적 영화’란 평가와 함께 일반 개봉을 앞두고 있다. 김산옥은 연기 경력 15년차인 나름 베테랑 배우이다. 대학로 연극가에서는 ‘섬세한 연기’를 잘 하는 연기자로 꼽힌다. 영화는 ‘원죄’가 데뷔작이다. 그런 그가 얼마나 배역에 몰두했는지, 요즘 그를 보는 사람들은 “예전의 김산옥이 아니다”라며, 우려담긴 시선을 보내고 있다. 평소 쾌활하고 뒤끝 없는 쿨한 사람이었는데, ‘원죄’ 출연 이후 외출을 자제하고, 어쩌다 대학로에 나타나도 표정이 어둡다고 지인들이 전한다. 김산옥은 자신의 SNS에 “이제 에스더를 떠나보내야 한다”라고 썼다. 자신도 에스더 수녀란 ‘배역에서 벗어나기’를 결심한 듯 보인다. 하지만 최근 그는 필자와 가진 커피 타임에서 “너무 힘들다.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라고 어려움을 털어 놓았다.

김산옥이 ‘배역에서 벗어나기’에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아주 진지한 배우이기 때문이다. 맡은 배역을 사랑했고, 배역을 완벽히 소화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덫에 스스로 갇혔다. 하지만 배우는 무대를 떠나면 존재 가치가 없다. 극중에서 지고지순한 수녀 역할을 맡았던, 대통령 역할을 맡았던, 세상을 막 사는 유흥가 퇴물 접대부를 맡았던, 실제와는 상관이 없다. 그건 어디까지나 캐스팅일 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극중 배역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명백히 연기자 자신이 독립적인 인격을 스스로 무시하는 처사이다.

대중이 스타에게 진정으로 ‘배역에서 벗어나기’를 주문하는 이유는 ‘그 작품의 그 배역’은 그 배우의 일부일 뿐이고, 더 많은 더 뛰어난 또 다른 연기 재능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윤상길 컬럼니스트|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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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윤상길
부산일보ㆍ국민일보 기자, 시사저널 기획위원을 역임하고 스포츠투데이 편집위원으로 있다. 장군의 딸들, 질투, 청개구리합창 등 소설과 희곡 등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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