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박영희 시인] 눈 오고 하루 종일 흐렸지만, 보름으로 치닫는 낮달이 걸려있습니다. 해질녘쯤엔 노을이 자리 잡는 것도 보았습니다. 멀리 보이는 공장의 굴뚝에서 내뿜는 연기가 하늘을 가려도 붉게 물들고 있는 노을의 아름다움을 지우지는 못합니다.

눈앞에 머무는 현재, 기억의 창고를 단단히 지키고 있는 과거, 품에서 자라고 있는 미래를 만져봅니다. 생의 바다에 펼쳐진 삼세(三世)가 아름답습니다.

이즈음에는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곁에서 함께 걷고 있는 것들을 보며 세상의 중심에 서 있는 나와 만나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지난 시간은 아픔과 근심으로 세상을 살아내는 일이 많았지만,  그 와중에 한 줌 볕뉘를 만날 수 있어 행복했고 이따금 미래를 품을 수 있도록 누망처럼 기특한 사건들이 일어나 연(緣)을 덧대주어 뿌듯한 시간도 많았습니다.

저무는 노을을 보니 안부를 물어야 할 사람들이 생각나 두 손을 모읍니다. 나를 비롯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향하는 곳. 그 어디든 희망의 종착지이길 바랍니다.

가르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휩쓸리지 않으며 맞잡은 손에서 따듯함이 배어 나오듯 서로의 마음을 맞대고 따사로이 살아갈 것에 대한 바람을 하늘가에 올려놓습니다.

세밑

한 집안의 기둥을 떠나보내고
주변을 정리하는 사이에 한 해가 갑니다

세상을 끌어가던 고관절을 잃고 중심 잡지 못하는 이의
마음을 쓸어주지 못하고
발 하나 겨우 걸어 놓은 사이에 한 해가 갑니다

앉은 방석도 못 하고 꼬불쳐져 있던 꺾인 다리가
스테퍼 위에서 힘 타는 사이에 한 해가 갑니다

손가락 마디마디 시큰함은 늘어 가고
연필의 흑심과 멀어지는 사이에 한 해가 갑니다

그미를 떠나보낸 것처럼 안타까운 시간
손 내밀지 못했던 잃어버린 시간
힘을 얻고자 깎아버린 시간
줄 하나 긋지 못하고 흩어져 버린 시간을

새새 지나가 버렸지만
어름진 시간 가리 늦더라도
늦 섬 든 것처럼 휘영청 가겠습니다

어둠에 삼켜진 산하에
햇발 찬란히 퍼지듯
숫눈길에 발자국 새기듯
꾹꾹 누르며 가겠습니다

ㆍ어름 : 두 물건이 맞닿은 자리
ㆍ가리 늦기 : 때 늦어. 시간이 늦어
ㆍ섬 : 철들다(평창 지역 방언)
ㆍ숫눈길 : 새벽에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

시인 박영희는
한국문인협회 회원, 디지털 삽화가, 칼라맨, 캘리그라퍼. 출판편집 디자인 팀 ‘지소사’의 팀장, 시와수상문학 운영위원장으로 문학사랑에 남다른 열정을 가진 박영희 시인은 필명 ‘지소하’로도 활동하고 있으며 시집으로 ‘우연처럼 뜬금없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