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문민순 수필가] 낙엽이 비가 되어 거리를 적시던 가을 무렵이었다. 캐나다에 사는 동생이 왔다. 오랜만에 자매 셋이서 며칠 밤을 보내게 되었다. 5년 전, 아버지를 여의고 나니 고아가 된 듯 구심점이 없어졌다. 세자매가 오랜만에 만나니 한 이야기도 많았다. 방안에서 뒹굴뒹굴, 그 옛날 어릴 적 추억을 동화처럼 회상 하며 하늘나라에 계신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도 들춰내고 친척과 이웃들을 소환해 웃음꽃을 피웠다.

아버지가 술 한 잔 얼큰히 취해 밤늦게 들어오실 때에는 검은 비닐봉지를 손에 들고 들어오시며 기분 좋은 듯 노래를 흥얼거리시곤 했다. 그 비닐봉지에는 우리의 입을 즐겁게 하는 간식거리가 들어있었다. 간식거리로는 우리의 마음을 채워주는 국화빵, 쎈베이과자, 쌀강정, 그것도 없는 날에는 저녁 늦게 차린 밥상 앞에 불러 앉혀놓고 김밥을 한입 먹기 좋게 싸주셨다. 우리는 아버지가 싸준 김밥을 마치 제비새끼처럼 받아먹으며 희희낙락 맛의 포만감을 채웠다.

아버지의 자식사랑은 표현도 없고 말씀도 없으셨지만 늘 관대하셨고 기둥처럼 든든했다. 또한 어머니와도 금슬이 좋아 집안에서도 큰소리치신 적이 없었다. 살림은 그다지 넉넉한 편은 못되었지만 집안 가득 웃음꽃이 피었다. 어머니도 노래를 좋아하신 듯 반찬을 만들거나 음식을 하실 때도 부엌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 소리를 듣곤 했다. 우리는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노래를 기억해 내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선창하면 다 같이 따라 불렀다. 지난 세월을 반추하는 시간들을 주체할 수가 없어 우리는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

틀어놓은 TV 홈쇼핑 채널에서 때마침 손톱에 붙이기만 하면 봉숭아물처럼 자연스럽게 혼합아트를 연출한다는 제품을 소개하고 있었다. 우리는 금새 그 화면 속으로 빠져들었다. 옛날 우리 집 앞마당에 들어서면 길 양쪽 화단 앞으로 수줍은 듯 봉숭아꽃이 줄지어 피어 있었다. 유난히도 별이 총총한 여름밤이면 마당 감나무 아래 펴놓은 평상으로 우리 자매를 불러 모았다. 어머니께서는 빨강, 하양, 분홍색의 겹 봉숭아꽃을 따다 준비해 놓고는 백반과 소금, 숯을 섞어 반반한 돌 위에 찧어 우리들 열 손가락 손톱에 올려놓고는 피마자 잎사귀로 곱게 싸서 하얀 명주실로 칭칭 동여매어 주었다. 우리는 잠잘 때 봉숭아물이 빠질까봐 밤새 선잠을 자가며 손을 가슴 위에 얹혀놓고 잤지만 아침에 일어나보면 어떤 것은 뒤틀려 손가락까지 물들어 있었고 어떤 것은 빠진 채 요위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우리는 제각기 손가락을 펼쳐 보이며 색깔을 비교해가며 서로가 제 것이 예쁘게 되었다고 자랑하느라 침이 말랐다.

세월의 변화는 무죄라 하였던가. 봉숭아물을 대신으로 매니큐어 시대가 오더니 지금은 손톱에 접착을 시키는 네일아트가 등장하고부터 주택가 골목마다 네일아트가게가 눈에 띄고 많아졌다. 그 섬세한 색깔이 미국, 캐나다시장까지 파고 들어갔다니 우리의 기술이 놀랍기만 하다. 배고픈 시절, 손톱 끝에 봉숭아꽃물을 들이던 우리가 네일아트 계에서는 세계시장을 석권하고 있다고 하니 세월의 변화무쌍함을 새삼 느낀다. 캐나다 동생이 홈쇼핑에서 붙이는 네일아트 한 박스를 주문한다. 값은 생각 보다 싸지는 않지만 그 옛날 어머니가 들여 주던 봉숭아 대신 네일아트를 붙여 봉숭아의 추억을 반추하는 재미도 맛본다. 남은 것은 캐나다에 있는 며느리와 친구들에게 붙여주고 싶다고 가져간단다.

세월은 가도 추억은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남아 있다. 언제나 어리게만 보이던 막내의 나이도 어느덧 예순 고개를 넘어섰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세상이 아무리 변한다 해도 본질은 변하지 않듯 우리 자매들의 순수한 감정, 따뜻한 사랑의 마음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으로 장담한다. 우리 자매는 오래오래 살아 또 다시 만나자고 맹세하듯 손가락을 건다.

오늘도 또 하루를 맞는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하다. 하지만 살아 있다는 것으로도 감사할 일이다. 푸른 숲을 향해 걸으며 살고 싶은데 하루가 다르게 몸은 자꾸만 엉뚱한 길을 가고 있으니….

수필가 문민순은
한국수필로 등단.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한국수필작가회 이사이며 한국수필 제5회 독서문학상 대상 수상했다. 마침표가 아닌 쉼표, 4번선 없는 기타ㆍ사랑에는 향기(공저)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