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박원명화 수필가] 하늘을 보며 가끔 꿈을 꾸곤 한다. 머릿속이 수세미처럼 헝클어지거나 마음에 먹장구름이 낄 때면 기분 전환을 위해 나는 푸른 빛깔의 옷을 입는다. 현실과는 조금은 동떨어진 색깔이어도 푸르름이 물든 옷을 걸치고 있으면 묘하게 기분이 업 된 듯 상쾌해진다. 황홀하게 펼쳐진 시원스러움이랄까, 희망과 절제의 계절 같은 게 느껴진다.

어릴 적 뛰놀던 고향의 뒷동산 장구봉에 올라가면 옹기종기 마을 앞으로 펼쳐진 푸른 들판이 훤히 내려다 보였다. 들판은 평화 그 자체였다. 봄을 맞듯 살랑살랑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너른 들판에 펼쳐져 있는 푸른 잎들이 스러질 듯 하다가도 어느새 만상(萬象)을 포용해 평정을 이루곤 했다. 그 모진 추위에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시치미 뚝 떼고 평온한 안정을 되찾아 가는 비법을 어찌 터득했을까. 수백만 개 포기의 청보리들, 영혼을 한데 모아 서로를 지탱해야지만 이 살아갈 수 있다는 진리를 바람을 통해 배우고 익혔는지도 모른다. 삶이 힘든 만큼, 맑은 정신만큼, 간절한 소망만큼, 뭉쳐야 살아갈 수 있다는 걸 깨달았을 터였다.

여름이면 어머니는 옥색 치마에 모시로 지은 흰 저고리를 자주 입고 다녔다. 초록 들판처럼 시원해 보이던 어머니의 자태는 깨끗하고 우아한 한그루 소나무였다. 물오른 잎새의 싱싱함과 반듯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여인의 운명 같은 서슬 푸른 다짐처럼 보였다.

지금도 나는 너른 들판을 바라보고 있으면 눈이 맑아지고 마음이 넉넉해진다. 생활에 찌든 감정도 차분해지고 날선 갈등도 풀린다. 바람이 화나면 우둑 솟은 나무는 꺾이기 쉽지만 가녀린 보리는 흔들리기만 할뿐, 이지러지지 않는다. 우리네 삶도 그런 것 같다. 형세에 따라 우왕좌왕 흔들리기 보다는 한걸음 뒤로 물러나 있으면 이러쿵저러쿵 시비하는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 푸른빛은 선비의 올곧은 정신을 닮았다. 그냥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다.

수필가 박원명화는
2002년 한국수필로 등단.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수필가협회 사무국장이며 제9회 한국문인협회 작가상ㆍ연암기행수필문학상ㆍ제39회 일붕문학상을 수상했다. ‘남자의 색깔, 길 없는 길 위에 서다, 풍경’ 외 수필집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