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박원명화 수필가] 이별의 시간이 점점 길어져 갑니다. 아니, 어쩌면 이대로 선생님의 온화한 그 목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는 없다는 게 가슴 저린 슬픔으로 젖어듭니다. 선생님이 생각날 때, 전화를 걸면 열 번에 두서너 번 통화가 연결되지만 그 마저도 듣지를 못하시니 사모님께서 받으시어 선생님을 대신해 안부를 전해 주시기도 하고, 묻기도 하면서 오래전 선생님과 뛰어놀던 글밭에서의 추억을 뒤적입니다.

선생님을 처음 뵌 게 아마도 봄꽃들이 사라져지던 늦은 봄날로 기억됩니다, 정봉구 교수님 후임으로 추천받아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장대처럼 큰 키, 깡말라 왜소한 체구, 조용하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자칫 헛눈을 팔거나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알아들을 수 없는 불편함이 그때는 왜 그리도 짜증이 나던지, 수업 도중 ‘잘 안 들려요. 다시 설명해 주세요’라는 말로 강의의 흐름을 툭툭 끊어내듯 막무가내로 소리치기도 했었지요. 그럴 때마다 ‘미안합니다’ 하고는 한 옥타브 올려 말씀하시다가도 이내 본래의 음성으로 되돌아가곤 했습니다.

선비의 품격이랄까요. 몸에 밴 것 같은 따뜻한 성품, 정갈한 매너, 들어내지 않은 겸손함을 보고 느끼는 동안 어느덧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이 저절로 커갔습니다. 선생님과 함께 문학을 논하고 작품을 합평하던 그 시간은 제 마음을 정리하는 구도(求道)의 시간이었습니다.

수필이란 게 본시 내가 보고, 느낀 고백의 문학이라, 일상에서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낀 이야기를 그냥 편하게 전해주듯 쓰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언젠가 제 글을 보시고 잘 썼다는 칭찬한마디에 저는 목마른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처럼 주일에 한편씩 글을 써서 선생님께 보여 드렸지요. 수필의 단맛도 모르면서 그런 가당찮은 용기가 어디서 나온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제가 수필을 가장 많이 쓰던 전성기가 그때였던 듯싶습니다.

문우들 모두 선생님을 스승으로 받들고 싶어도 선생님은 스스로를 강사님이 아닌 좌장으로, 문학의 동지로 대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글공부 외에도 선생님과 취미삼아 탁구를 즐긴 일도 꽤 오래입니다. 한국수필문단에서 제가 우러러 보아야 할 원로 선생님들과 팀워크를 이루어 일주일에 한두 번 탁구를 치게 된 것도 순전히 선생님이 만들어준 자리였습니다.

운동이 끝나면 약속이나 한 듯 식당으로 향했습니다. 식사와 함께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반주가 격의 없는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문정을 과시하듯 선생님들의 오가는 말씀이 어찌나 죽이 잘 맞는지, 옆에서 듣는 것만으로 제게는 인생의 공부가 되었고 문학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함께 어울려 운동도 하고, 십여 년 세월 강평회를 가졌지만 선생님의 언행은 어디에서든 허세나 거드름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고, 주정(酒精)에서도 더함이나 덜함 없이 정도의 선위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문단에 들어와 제가 받은 가장 큰 축복은 아마도 선생님을 만난 일일 것입니다. 문학사적 지식만 물려주신 게 아니라 진실한 삶의 교훈까지 온몸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가 한국수필문단에서 이만큼 자랄 수 있는 것도 제가 잘 나서가 아니라 선물 같은 선비님을 만나서입니다. 부디 얼른 쾌차하시어 다시 만날 수 있는 날을 기대하며 내내 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

수필가 박원명화는
2002년 한국수필로 등단.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수필가협회 사무국장이며 제9회 한국문인협회 작가상ㆍ연암기행수필문학상ㆍ제39회 일붕문학상을 수상했다. ‘남자의 색깔, 길 없는 길 위에 서다, 풍경’ 외 수필집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