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도서 후기

그녀는 롯데백화점으로 원피스를 사러가고, 늦게 와서 통성명도 못했다. 이름도 성도 모른다. 여류화가의 이웃집에 산다는 그 여인, 호호복집에서 복매운탕을 시켜 먹는다. 하얀 블라우스 위로 앞가리개를 하고 후룩후룩 떠올리는 숟가락질 사이 나는 딴청을 부렸다. 말투도 행동도 조카딸과 많이 닮았다고 넌지시 수작을 부렸다. 상담심리를 한다는 그 여자의 입에서 프로이드와 융 그리고 프롬의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우리는 거리로 나왔으나 후식을 먹지 않고 설빙 건너편 도로에서 헤어졌다 40년 전 놓아버렸던 시간. 이름도 성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 속으로 휩쓸려 다니다가 마음이 허탈해서 방금 전에 둘러보고 나온 영광도서에 다시 들어갔다. 문학코너로 직행해서 덥석 시집 한권을 골랐다. 불끈한 시집! 40년 전에 들리던 곳 오늘 책을 사서 그 틈을 한꺼번에 메꾸어버렸다. 점원 아가씨가 피식 웃었다. 시집 속으로 훨훨 나비가 스며들었다. 그 페이지 속에 부질없는 욕망을 봉해버렸다. 시법(詩法)은 나를 용납하겠지. 시적 진실! 남자가 여자를 보는 법, 여자가 남자를 보는 식. 다르다! 다르겠지? 엄청. 헤어질 때 아무도 기쁘지 않았다. 아무도 슬프지 않았다. 안녕!
     -정노천 시인의 시 <영광도서 후기> 전문-

[생각 하나]
40년이란 엄청난 간극을 메꾸었다. 친구의 간절한 부탁으로 일주일을 작정하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KTX는 설렁설렁 나를 싣고 가서 부산에 부러 놓았다. 내 인생의 길이 이렇게 쉬웠다면 무슨 걱정이랴.

태양과 바다를 그리는 열정의 화가를 서면에서 만났다. 40여 년 전 재수를 하던 서면로타리 부근의 학원과 자고 공부하던 독서실의 현장. 주식은 길 건너 서면시장의 거친 손칼국수였다. 가진 것 없는 자에겐 청운의 꿈을 갖던 시절 나는 약간 무모한 악동의 기질을 품었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 서면학원을 다니던 미술대 지망생이었던 김동수라는 친구가 생각나지만 지금은 묘연하다 그뿐이랴 정인수, 문경호 등과 호텔캘리포니아를 크게 틀었다가 독서실에서 쫓겨난 이름 모를 친구 그리고 테렌스힐을 닮았던 윤쾌원이란 친구 그와의 서면 예일독서실 시절 해프닝은 참 절묘했다.

그 녀석을 보러 내려간 것인데 간 김에 부산서 활동하는 연수지 화가를 만나서 차 한 잔과 식사를 하는 도중에 뛰어 든 여자와의 첫 대면. 작가의 이웃에 산다는 참 섬세한 그녀와 통성명도 못하고 헤어졌으니 아쉽지만 그 또한 시의 씨앗으로 내게 날아왔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시(詩)를 만지다 보러가기➧시를 만지다

골프타임즈｜master@thegolftimes.co.kr
<저작권자 © 골프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