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정병국 작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재촉했다.

사소한 일에도 마치 우주가 박살나는 양 허풍떠는 선배 언니이기 때문에 느긋하게 받아넘겼다. 오늘은 시간이 없으니 내일 오후에 보자. 해가 지면 작은 고추 카페서 술 한 잔 하며 이야기하자고 했다가 날벼락을 맞았다.

“미친년! 지금 당장 와.”

“시간 없다니까.”

“알았어. 내가 갈게. 지금 거기 어디야?”

설마 오려고, 했는데 반 시간도 못 되어 들이닥쳤다. 함께 시시덕거리던 친구들이 선배 언니가 나타나자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더니 아예 커피숍을 나갔다. 마주치기만 하는 늘어놓는 선배 언니의 잔소리에 학을 뗀 친구들이라 삼십육계부터 선택했다.

“너 쟤네랑 수다 떨려고 시간 없다고 했어?”

미라는 들은 척도 안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부터 가져왔다.

“무슨 일인데 또 호들갑이야?”“엄마가 시집가란다. 좋은 놈 챙겼다고.”

“그래? 그럼 가면 되잖아. 뭔가 문젠데?”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미라가 못마땅한지 눈 흘기곤 길게 한숨을 쉰다.

그게 말이야. 엄마가 점이라면 환장하거든. 나 대학 갈 때도 점쟁이가 권하는 학교에 지원했어. 황소 뒷걸음질하다가 쥐 잡은 격이겠지만, 엄마는 그때부터 열 몇 살에 신이 내렸다는 천상선녀의 집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었어. 이번에도 부산의 큰 이모가 소개한 신랑감 생년월일 들고 그 무당을 찾아갔는데 천생배필이라고 했나 봐. 그 한 마디에 맞선보러 부산까지 내려가자는 거야.

“미라야! 우리 엄마 어떻게 된 거 맞지? 그렇지?”

“아니! 정상인데.”

“너까지 왜 그래? 무당의 말 한마디에 내 인생을 걸란 말이니?”

“아니. 엄마랑 부산에 가지 말고 혼자 가. 가서 말이야…”

미라는 눈을 감았다.

한 달 전이었다.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정확하지 않으나 스스럼없이 만나는 지석 오빠였다. 이 나라, 이 땅에서 이름께나 날리는 회사의 홍보직원인 그가 꼭 할 말이 있다며 단둘이만 만날 것을 요구했다. 단둘이라는 말에 뭐지? 정식 데이트 신청인가? 아니면 내 친구 중 누구를 사랑하니 도와달라고 부탁하려는 건가? 이런저런 이유를 예상하며 약속 장소로 갔다.

지석 오빠는 늘 깔끔한 정장 차림이었다. 유명 회사에 근무하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미라는 단정한 정장패션이 늘 마음에 들었다. 언행도 반듯했다. 술자리에서도 흐트러짐이 없었고, 여럿이 식사할 때 여자들을 배려하는 모습에서 포근한 감정이 일곤 했다. 그러나 한 번도 사귀고 싶다는 연인의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단순히 매너가 참 깨끗하다, 마음 놓고 취할 수 있는 술친구다, 그 정도의 신뢰였다.

그는 커피숍의 창가에 앉아 있었다.

미라가 다가가며 미소 없이 묵례하자 자리에서 일어나 꽃다발부터 주었다. 헐! 이 오빠 좀 봐. 내게 안개꽃 속의 붉은 장미꽃이 박힌, 아예 부케 같은 꽃다발을 준다? 이건 정식으로 연인이 되고 싶다는 프러포즈잖아. 받아? 말아?

“미안!”

꽃다발을 안겨주며 뜬금없이 ‘미안’하다고 하자 미라는 재빨리 물었다. 다분히 의도적인 질문이었다.

“뭐가? 왜 미안한데?”

“아! 그게…”

지석 오빠답지 않게 당황하자 미라는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을 기다렸다. 언제나 냉정함을 잃지 않는, 뭐랄까? 조금은 차가운 인상의 그가 얼굴까지 살짝 붉히자 결론을 내렸다. 이 남자, 날 좋아하는 게 분명해. 그동안 아닌 척했지만, 더는 감출 수 없는 무엇이 있다는 확신에 돌직구를 날렸다.

“오빠! 나 좋아해? 사랑하는 거야?”

“그게…”

“사랑하는 거 맞네. 얼굴 빨개지는 것 좀 봐.”

“마! 그렇게 밀고 들어오면 어떻게 해. 민망하게!”

미라는 쿡쿡 웃었다.

지석 오빠에게 수줍은 감성이 있다니 신기했다. 술자리가 됐던, 떼로 몰려가 연극을 보던 그는 감흥보다 비판이 먼저였다. 누군가 술자리이든 연극이든 그냥 좋았다, 재미있었다, 감동적이었다고 말하면 안 되느냐 핀잔하면 한 마디로 무시했다. 넌 개똥도 금덩어리라고 하니? 그래서 별명이 언제부터인가 개똥이 되었다.

“미라야! 이거 좀 봐.”

지석 오빠가 상의 안주머니에서 편지봉투를 꺼내더니 앞으로 밀어놓았다. 미라는 무엇인가 싶어 빠르게 봉투 속의 종이를 꺼내어 펼쳤다.

“오빠! 이거 뭐야?”

“뭐긴…너와 나의 궁합풀이지.”

“세상에! 오빠 진짜 웃긴다. 내가 언제 오빠랑 결혼한다고 했어? 미쳤나 봐.”

미라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지석 오빠와의 궁합이 궁금해 서너 장의 풀이를 죽 훑었다. 한마디로 하늘이 맺어준 천생배필이라는 궁합이었다. 두 사람의 속궁합도 변강쇠와 옹녀가 만났으니 더는 바랄 게 없다고 했다.

“오빠! 이걸 믿어?”

“믿지! 믿으니까 너에게 보여주지.”“그래서, 지금 내게 결혼하자고 프러포즈하는 거야?”

“결혼 프러포즈는 나중에 정식으로 할게. 우선 오늘부터 사귀자.”

미라는 터지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 천생배필인지 아닌지는 살아봐야 아는 것이고, 일단 지석 오빠가 무당이 단언한 변강쇠 여부부터 확인하기로 했다. 미룰 것도 없이 오늘 밤 당장 확인하기로 한 미라는 꽃다발을 들고 일어섰다.

“자축 안 해?”

“자축? 아! 해야지. 가자!”

미라의 말에 그도 재빨리 일어섰다.

커피숍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아담한 카페가 있었다. 미라는 의도적으로 술을 빨리 마셨다. 지석 오빠에게도 술을 계속 권했다. 그가 어느 정도 취하자 미라는 만취된 양 횡설수설하며 호텔로 유인했다. 그날 밤, 지석 오빠와의 성 유희는 차라리 절망이었다. 무당이 말한 변강쇠와 옹녀의 만남은 간 곳이 없고 삼 년 묵은 파김치가 너부러져 있을 뿐이었다.

새벽, 호텔을 빠져나온 미라는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며 진저리쳤다. 무당의 점괘는 그렇다고 치고, 도대체 지석 오빠는 뭐하는 남자인지 한심하다 못해 동정심이 앞섰다. 자신의 물건이 그 정도라면 적어도 비뇨기과를 찾아야 하는 게 아닌가. 그 밤 이후 지석 오빠를 다시 볼 수 없었다.

미라는 한 달 전 충격에서 벗어나며 선배 언니를 바라다보았다. 그녀는 미라가 눈을 뜨자 상체를 앞으로 밀며 물었다.

“부산에 혼자 가라는 말, 무슨 뜻이야?”

“설마 몰라서 묻는 거 아니지?”

“너 또 그 얘기니? 궁합보다 몸으로 직접 확인하자.”“훗날 성격이 안 맞아서 이혼한다는 새빨간 거짓말 안 하려면 속궁합 확인부터 해.”

난감한 표정으로 무너지는 선배 언니를 바라보다 또박또박 말하는 미라.

“언니! 하룻밤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거 잊지 마. 알았지?”

정병국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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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병국은
도서출판 ‘지식과사람들’ 및 문예계간 ‘시와 수상문학’ 발행인, 문예창작아카데미와 스마트폰 전자책문학 파란풍경마을을 운영하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 예고 안내
2017년 정유년 닭띠 해를 맞아 ‘닭을 주제’로 정병국 테마콩트를 1월 10일 화요일부터 3개월간 연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