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지는 울상인 그의 얼굴에 입술을 가져갔다. 침대에 무너뜨리며 그 위로 무너졌다.(자료사진=골프타임즈)

[골프타임즈=정병국 작가] 손수진 차장과의 만남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가 철저하게 연출한 연극이었음을 깨달았을 때 이은지는 기가 막혔다.

손 차장의 언행은 언제나 겸손했다. 화를 내야할 때에도 빙그레 웃는 것으로 그만이었다. 누군가가 따귀를 때린다면 남은 뺨도 내놓을 사람이었다. 그런 믿음이 어느 날부터인가 금이 갔다. 무엇인가 감추고 있다는 느낌이 자꾸만 커졌다. 처음에는 이쪽에서 오해했거나 잘못 판단한 게 아닐까, 불안하기까지 했었다.

은지는 그의 스마트폰에 일방적인 약속시간을 남겼다. 의심하고 불안한 마음을 확실하게 털어내고 싶었다. 미덥지 않은 행동 하나하나를 들춰내며 일일이 따져 해명을 요구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보다 더 확실한 사랑의 증거, 그 뜨거움을 확인할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 방법의 실행이 바로 오늘이었다.

경리부 직원들의 회식이 있었지만 빠졌다. 시골에서 건강이 좋지 않은 부모가 올라오시기 때문에 서울역으로 마중가야 한다는 핑계를 댔다.

은지는 4호선 전철역 이수교에서 내렸다. 총신대학 방향 대로변의 한 모텔로 들어갔다. 삼층 끝 방을 잡아놓은 후 백화점에서 술과 안주를 샀다. 평상시에는 소주나 맥주를 마셨지만, 오늘밤은 그게 아니다 싶어 와인을 샀다. 장미꽃도 몇 송이 샀다.

손 차장이 약속 장소까지 오기에는 아직 이른 시각이었다. 그가 퇴근 후 곧바로 달려온다고 해도 한 시간은 족히 기다려야 했다.

은지는 잠시 망설이다가 버스정류장 한쪽의 포장마차에서 떡볶이와 순대를 먹으며 쿡쿡 웃었다. 남자가 강제로 납치해서라도 모텔이든 호텔이든 가야 하는데, 번번이 그 반대 현상에 자꾸만 웃음이 터졌다. 내 몸 속의 그 어디에 이런 욕망의 불덩어리가 숨어 있을까, 궁금했다. 사랑의 확인을 몸으로 하겠다는 배짱은 정말 상상치 못한 발상이었다. 만약 진실한 사랑이 아니었을 때, 그때는?

은지는 또 쿡쿡 웃었다. 그것은 나중의 문제로 이제 와서 포기할 수 없었다. 설사 적당히 즐기는 사랑이라도 일단은 확인하기로 했다.

약속 장소인 찻집에서 둥굴레차를 마신 후 모텔 이름과 호실을 문자로 날린 후 일어섰다. 모텔로 돌아온 그녀는 텔레비전 옆의 탁자를 이용해 술상을 차렸다. 비록 낡고 못생긴 탁자였지만, 장미꽃 몇 송이와 와인이 놓이자 그럴 듯 했다.

욕조에 뜨거운 물을 가득 채웠다. 침대 위에 겉옷부터 속옷까지 아무렇게나 벗어던졌다. 스타킹은 방바닥에 뱀 껍질처럼 적당히 엉켜놓았다. 팬티스타킹의 색깔이 분홍색이었기 때문에 묘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아직 결혼할 생각은 없습니다. 준비도 덜 됐고요.

한 달 전이었다. 강원도의 강촌으로 등산 갔을 때였다. 그는 젊은 사람들의 눈꼴사나운 얘기를 하다가 결혼을 화제로 삼았다.

결혼은 반드시 해야 합니다. 독신으로 살겠다는 사람들을 보면 인생 사기꾼처럼 보입니다.

은지는 그때 손 차장이 결혼 프러포즈를 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워낙 성격이 온순한데다 겸손해서 이 남자는 이런 식으로 청혼을 하는구나 싶어 속으로 웃기까지 했었다.

그날 강촌의 아담한 모텔에서 함께 밤을 보냈다. 손 차장이 첫 남자는 아니었지만 애써 처음인 양 행동했다. 은지는 그 후 데이트 때마다 손 차장의 손길을 기다렸다. 그의 행위는 평상시의 성격만큼이나 조용했다. 그러나 자신의 욕구를 채우고 옆으로 나뒹구는 남자가 아니었다. 마치 한 걸음, 한 걸음 산 정상을 향해 오르듯 그렇게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손 차장의 은근하면서도 끈질긴 애무에 숨이 넘어가곤 했다. 그의 품 안에서 잠을 깨면 그렇게 아늑할 수 없었다. 이 세상 그 어디에 이렇게 따뜻한 가슴이 또 있으랴, 싶었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도 먼저 잠자리로 유인하는 법이 없었다. 늘 은지가 앞장섰다. 그때마다 여자로서의 자존심이 상했다. 마치 미래의 행복을 위한 사랑이 아니라 지금 당장 섹스에 목마른 여자가 된 것 같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은지는 그의 몸에 익숙해질 무렵 우연히 손 차장이 근무하는 부서의 여직원을 만났다. 친구의 친구였던 그녀는 술이 취하자 손 차장에 대해 좋지 않게 평했다. 차장 진급도 사장의 친척이라서 가능했고 사내 어느 부서에서도 그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했다. 여자관계도 복잡하다는 말의 사실 유무를 떠나 그녀의 충고가 심상치 않게 들렸다. 술자리 내내 좀 더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밤늦게 귀가하다 보면 안양으로 공연히 이사했구나, 싶습니다. 회사와 거리도 멀고…불편한 게 많아요.

몇 번 만나지 않은 어느 날 그는 부모와 함께 신림동에 산다고 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안양으로 이사했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집에서 나왔다면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 아닌가. 가령 결혼하기 위해 아파트를 샀다든지, 아니면 전세를 마련했다는 설명은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와는 충무로 전철역에서 아침마다 마주치게 되어 눈인사를 나눴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 앞 식당에서 만났다. 손 차장은 정말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다가와 명함을 내밀었다. 은지는 그의 명함을 받으며 유행어처럼 숙명적인 인연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망설임 없이 교제를 시작했다.

은지는 욕실로 들어가려다 핸드백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거울 속의 발가숭이 몸을 동영상으로 찍었다. 스마트폰은 이상 없이 작동했다.

손 차장의 우연을 가장한 접근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건 남자의 애교스러운 행동이었다. 자기가 남자라도 첫눈에 반한 여자가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인성을 고루 갖춘 것처럼 행동하는 데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가슴 속에 어떤 흉계가 있지 않고서야 어찌 몇 달씩 속일 수 있을까. 거기까지 생각할 때 스마트폰 벨이 울렸다.

손 차장이었다. 그는 저녁을 먹자고 했다. 은지는 거절했다. 당초의 계획대로 그와의 사랑 행위 장면을 스마트폰에 담아야 했다. 마지못해 손 차장이 올라왔다. 은지는 그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동영상의 셔터를 눌렀다. 그가 손을 내저었다.

그는 매우 당황했다. 발가숭이의 은지, 침대에 널려 있는 옷, 팬티스타킹, 탁자 위의 와인과 장미꽃을 내려다보다가 침대에 주저앉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은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계속 동영상만 찍었다.

“왜 이러는지 설명해 봐요.”

그는 언제나 존댓말을 했다. 존댓말이 싫다며 앙탈부리면 늘 그 때뿐이었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존댓말 하는 것이 그렇게 멋있어 보였다고 했다.

“그 존댓말, 날 아내로 맞겠다는 거 맞죠?”

은지는 계속 동영상을 찍으며 물었다. 손 차장 뒤 벽에 대형 거울이 있었다. 거울 속 알몸인 자신의 모습이 손 차장과 함께 잘 나오도록 자리를 옮기며 동영상을 찍었다.

“그만 찍어요.”

“싫어요.”

“알았어요. 은지 씨 하고 싶은 대로 해요.”

“세상에! 그렇게 대답하면 내가 강요한 게 되잖아요. 하지만, 좋아요.”

은지는 두 개의 잔에 와인을 따랐다. 장미 꽃잎을 띄웠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손 차장과 강제로 러브삿을 한 은지는 속삭였다.

“우리 결혼해요!”

“아! 그건…….”

은지는 울상인 그의 얼굴에 입술을 가져갔다. 침대에 무너뜨리며 그 위로 무너졌다. 한 손으로 스마트폰의 동영상 찍는 것을 잊지 않았다. 늘 수동적인 손 차장의 가슴에 사랑의 확인 사살 작업을 하는 뜨거움이 섹스보다 더 강한 쾌감으로 밀려왔다.

정병국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 저작권자 © 골프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소설가 정병국은
도서출판 ‘지식과사람들’ 및 문예계간 ‘시와 수상문학’ 발행인, 문예창작아카데미와 스마트폰 전자책문학 파란풍경마을을 운영하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