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정병국 작가] 주나희는 아파트로 가기 전에 와인 한 병을 샀다. 최인식 대리가 집에서 뒹굴 거리고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그는 어느 한적한 바닷가에서 울적한 마음을 삭히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와인을 샀다.

예상대로 그는 여행을 떠나고 없었다. 성격이 깔끔한 그는 집안 구석구석까지 깨끗하게 청소한 후 떠났기 때문에 손댈 곳이 없었다.

언제든지 쉬고 싶을 때 이용해.

그는 친구와 함께 생활하려면 불편하겠다는 말을 자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파트 열쇠를 주었다.

널 잡아먹지 않을 테니 마음 놓고 사용해.

그는 약속을 지켰다.

나희는 최 대리의 의연한 자세에 킥킥 거렸다. 그가 언제까지 견뎌낼지 궁금했다. 얼마 전 그는 거칠게 몸을 요구했었다. 그러나 몸 요구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가 과연 눈앞의 싱싱한 생선을 언제까지 외면할까, 궁금해 유혹의 몸짓을 틈만 나면 들이댔다.

나희의 계산은 빗나갔다. 한밤중에 샤워한 후 비누 냄새의 속옷으로 있어도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최 대리의 그런 의연한 행동에 자존심이 상했다. 여자의 존재조차 완전히 무시당하는 기분에 약이 올랐다.

그가 늘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자 나희는 술을 준비했다.

“항복 조인식인가?”

나희는 최 대리의 웃음에 화가 났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착각 말아요. 이건 우리들의 이별주니까.”

“그래? 그럼 빨리 마시고 헤어지자.”

최 대리가 단숨에 잔을 비우자 말문이 막혔다. 그날 밤 나희는 스물두 살의 문을 그에게 열어주었다. 남자 품속에서의 첫 밤은 두려움보다 기쁨의 시간으로 아침을 맞이했다.

최 대리의 손은 격렬한 재즈와 같았다. 그 후 나희의 몸뚱이는 그의 손안에서 눈처럼 녹아내리곤 했다.

최대리가 없는 아파트. 나희는 베란다의 창문을 열어놓고 의자에 앉았다. 그의 이번 여행은 어느 때보다 길어질 것이다. 회사도 그만둬 자유스러운 몸이었다.

내 인생을 심각하게 생각해봤어. 결론은 이게 아니었어.

나희는 며칠 전 그가 사표를 냈다며 들려준 말을 떠올렸다. 이해할 수 없는 그 말은 불길한 예감으로 다가왔다.

나희는 그가 원하는 인생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는 그가 미웠다. 그 동안 그가 들려준 얘기는 어린 시절의 추억뿐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원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꼬치꼬치 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다 고개를 저었다. 헛물음일 게 뻔했다.

나희는 그의 언제나 사색하는 모습의 몸가짐에 빨려 들어갔다. 그의 회사가 같은 건물, 같은 층에 있어 자주 마주 쳤다. 그때마다 그와 차도 마시고, 술도 취하고 싶었다.

“술 한 잔 해요.”

나희는 그와 함께 있고 싶은 욕망을 자제하지 못했다. 어느 날 그의 퇴근길을 가로 막았다.

나희는 둘만의 자리에서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러자 그는 눈가에 잔잔한 웃음을 흘렸다.

“나희는 곧 실망할거야.”

그는 스스러움 없이 이름을 불렀고, 또 말도 놓았다. 나희는 그 순간의 짜릿함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그는 어떤 요구에도 거절하지 않았다. 회사를 결근하고 등산가자고 했을 때, 그의 아파트에서 출퇴근하겠다고 투정했을 때 난처한 표정이긴 했지만 승낙했다. 나희는 그가 무슨 얘기든지 싫은 내색 없이 끝까지 들어주어 마냥 즐거웠다. 침대에서 그의 무릎을 베고 얘기할 때는 강한 섹스의 유혹에 말꼬리를 놓치곤 했다.

나희는 아파트단지의 어린이 놀이터에서 눈길을 거뒀다. 방범등 불빛 속의 텅 빈 놀이터가 싫었다. 안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벌렁 누웠다.

최 대리의 여행지가 어디인지 알면 달려가고 싶었다. 그와 며칠이고 산과 바다를 멋대로 돌아다니며 사랑의 자유 속에 묻히고 싶었다.

-나희는 수렁 같은 여자야. 헤어날 수가 없어.

그의 가쁜 숨결은 언제나 나희 가슴의 계곡에서 가라앉곤 했다. 그때마다 나희는 눈을 감은 채 그의 무게를 느끼며 또 다른 희열에 빠져들곤 했다.

어떤 때는 넌 마치 개미귀신 같아. 난 개미귀신이 파놓은 모래함정에 빠진 한 마리의 개미이구.

나희는 개미귀신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가 자세히 설명해 주자 그제서 이해를 하곤 킥킥거렸었다. 수렁이든 개미귀신이든 그녀는 상관없었다. 그가 항상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게 만족이었다.

그는 가족에 대한 얘기는 한 마디도 안 했다. 그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몸을 뒤채어 엎드렸다. 베개를 끌어안자 그의 체취가 묻어났다. 이젠 익숙해진 그의 냄새였다. 나희는 심호흡을 했다.

난 네게 너무 깊이 빠졌어.

그가 귓밥을 아플 정도로 문 채 어눌하게 말했을 때 나희는 깔깔 거렸었다. 그 말은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욱 뜨겁게 가슴에 새겨졌다.

나희는 침대에서 내려와 전화를 걸었다. 벨이 울리는 그의 스마트폰은 거실의 탁자 밑에 있었다. 지금 그에게 연락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텔레파시밖에 없었다. 나희는 세 번, 네 번 음성메시지를 보내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한 마음을 자제하지 못한 그녀의 얼굴이 상기됐다. 까만 기타 모형의 벽시계가 밤 한시 반을 가리키자 또 음성메시지를 날렸다. 그와 마시려던 와인을 병 채 한 모금 마셨다.

나희는 만약 그에게서 전화가 오지 않는다면 헤어지겠다는 생각을 했다. 왠지 그게 옳은 판단 같다는 생각을 하며 책과 컴퓨터가 있는 작은방으로 갔다.

컴퓨터의 마우스를 건드리자 절전형으로 잠자고 있던 모니터가 켜졌다. 화면에 어느 여자에게서 온 메일이 떠 있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오빠 대답을 듣고 싶은가봐. 어떡하지? 나랑 결혼 안 해도 괜찮아. 하지만 떠나시는 엄마만은 안심시켜줘. 부탁이야.

나희는 칠흑의 어둠속으로 곤두박질치는 현기증에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모니터 화면의 글자를 한 자, 한 자 읽으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오빠! 엄마는 오늘밤을 못 넘길 것 같아. 빨리 내려와.”

정병국 작가｜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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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병국은
도서출판 ‘지식과사람들’ 및 문예계간 ‘시와 수상문학’ 발행인. ‘문예창작아카데미’와 스마트폰 전자책문학 ‘파란풍경마을’을 운영하고 있다. 정병국 性풍자 콩트는 매주 화요일 연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