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르미자니노의 목이 긴 성모

[골프타임즈=장창호 칼럼리스트] 추석 연휴에 바람이 좋아 기분이 상쾌한 아침입니다. 장남인 덕에 귀성의 수고도 없는 터라 집에만 틀어박혀 연휴의 한가로움을 즐깁니다. 아내는 삼시세끼를 꼬박 다 찾아먹는 필자가 못마땅한지 여행이나 가자며 보챕니다. 무반응으로 대답하자 필자더러 TV 리모콘 움켜쥐고 소파를 고수하는 타성에 젖었다고 쏴붙입니다. 오늘은 매너리즘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최근에 원로희극인 구봉서씨가 별세했습니다. 어릴 적 TV보급 초창기부터 구봉서씨의 코미디는 인기절정이었습니다. MBC ‘웃으면 복이와요’는 가장 기다리던 TV프로그램이었고, 구봉서씨가 중심이 되어 웃으면 복이와요를 이끌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희극인은 몸동작으로 웃기려고 애쓴 반면에 구봉서씨는 절제된 동작과 구수한 말솜씨로 시청자를 웃고 울렸습니다. 코미디가 인간사의 희로애락 중에 희락을 표현하는 드라마라서 동작과 대사가 과장되기 쉬운데 동작을 절제하며 웃기는 것은 보통 고수의 반열에 오르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불멸일 것 같았던 전통 코미디는 넘어지고 엎어지며 억지웃음 강요를 반복하는 매너리즘에 빠지면서 저질로 낙인 찍혀 차츰 대중의 외면을 받았습니다. 대신에 말로 웃기는 코미디인 개그가 등장하여 청년문화의 일부가 되었고, 유학시절에 개그프로그램 비디오를 공수 받아 돌려보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하지만 개그도 감각적인 말장난으로 일관하다가 역시 대중의 외면을 받고 한동안 TV에서 자취를 감추기도 했습니다.

TV에서 사라져 위축되었던 코미디는 개그맨들이 대학로에서 시험했던 스탠드업(Stand-Up)식 코미디를 KBS의 공개 코미디 개그콘서트로 옮겨오면서 권토중래했습니다. 1999년의 일입니다. 개그콘서트의 성공에 자극을 받고 SBS도 ‘웃찾사(웃음을 찾는 사람들)’를 출범시켜, 마침내 개그의 르네상스시대를 함께 엽니다.

그런데 요즈음 개그방송이 또 다시 위기를 맞았습니다. 일요일 황금시간에 편성된 개그콘서트조차 시청률이 10% 내외입니다. 웃찾사는 아예 평일 심야시간으로 밀려나 겨우 명맥만 유지합니다. 며칠 전 채널을 돌리다가 개그콘서트를 잠시 보았는데 실소를 금하지 못했습니다.

지난 겨울방학 때부터 이미 수명을 다했다고 판단한 코너가 아직도 억지웃음을 강요하고 있었습니다. 얼른 채널을 돌리면서 왜 시청률이 낮아졌는지 납득이 갔습니다. 인기절정의 포맷이라도 일정한 기간이 되면 과감히 내리고 신선한 새 포맷으로 교체했던 선순환의 역동성이 사라지고, 작은 박수에 안주하는 매너리즘의 벽에 갇혀있어 안타깝습니다.

아내는 명절 연휴를 이용하여 중국드라마 ‘보보경심(步步驚心)’을 한꺼번에 본다며 거실을 점령했습니다. 오가며 얼핏 보니 청나라 옹정(雍正)황제 등극을 둘러싼 궁중암투를 그린 대하사극입니다. 유사한 드라마가 많은데다 남자주인공이 우치롱(吳奇隆)이라서 신선감이 덜했습니다. 필자의 타이완유학시절 아이돌그룹 가수였는데, 그때의 인기를 바탕으로 주연급 연기자로 변신했습니다.

우치롱은 출연한 드라마마다 대부분 뻣뻣하게 찌푸린 인상 연기 하나로 일관하는데 보보경심(步步驚心)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물론 필자의 주관적인 판단입니다. 그러나 송강호와 하정우에 익숙한 필자로선 우치롱(吳奇隆)의 변함없는 발연기도 실망스럽지만, 신인이 못미더워 옛 명성만 보고 배우를 캐스팅하는 중국 드라마제작자의 매너리즘에 더욱 입맛이 씁니다.

우리는 흔히 일의 방식이나 태도가 틀에 박여 신선미와 독창성을 잃었을 때 매너리즘에 빠졌다고 말합니다. 원래 매너리즘(mannerism)이란 르네상스에서 바로크로 넘어가는 과도기인 16세기 중반 경에 유행한 미술사조입니다. 부자연스런 인위성이 매너리즘의 가장 큰 예술적 특징인데, 필자가 최근에 접한 매너리즘계열의 미술품은 예상외로 매우 독창적이라 놀랐습니다.

▲ 프란세스코 프리마티초의 조각상,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의 정부(情婦)였던 에탕프의 방 바깥문 장식품이다.

예컨대 프란세스코 프리마티초(Francesco Primaticcio,1 504∼1570)의 조각상은 해부학적 균형과 비례에 관계없이 과장되게 늘어져있는데도 인체의 우아함을 충분하게 표현합니다. 미켈란젤로의 조각상 ‘피에타’의 균형 잡힌 비례에 익숙한 필자로서는 매우 신선한 미적 경험이었습니다.

반(反)고전주의이면서 고전주의 작품을 모티브로 새로운 지적인 착상을 시도한 매너리즘의 창의성이 흥미롭습니다. 그래서인지 완성도보다 작가의 메시지 표현을 중시하는 현대미술에선 아이러니컬하게도 기형적인 형태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시도를 한 매너리즘을 재평가한다고 들었습니다.

여태까지 매너리즘이란 특정 기법이나 양식을 따라 작업하는 타성(惰性) 정도로만 알았는데 미술사의 개념은 확연히 다른 것 같습니다. 코미디는 드라마예술의 중요한 장르 중 하나입니다. 코미디를 표현하는 방법을 두고 자질시비란 있을 수 없습니다. 찰리 채플린도 넘어지고 엎어지곤 했습니다. 개콘과 웃찾사는 기존의 정형화된 포맷에 안주하는 매너리즘을 탈피하길 바랍니다. 고(故) 구봉서씨의 절제코미디를 타산지석으로 삼고 창의적인 새 방도를 모색하면 좋겠습니다.

이번 주는 일상의 매너리즘을 경계하여 날마다 심신이 새로워지길 축복합니다. 혹여 매너리즘에 빠졌다면 미술사조의 매너리즘처럼 기존 양식에서 새로운 변형을 시도하기 바랍니다. 약간의 비틀음은 때로 일상의 활력소가 되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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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창호 칼럼리스트｜master@thegolf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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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문학박사,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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