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삽화=박소향)

[골프타임즈=김효진 작가] “차돌아! 어데가노. 동생하고 놀지”
엄마의 소리 높은 질책에도 씩씩하게 “나 출장 가”
하고 전용 자가용인 세발자전거 그리고 보디가드이자 친구인 케리와 함께 대문을 박차고 나와서 1km 넘게 떨어진 아버지 사무실로 향했다.

“아부지 돈 줘. 그거 살 거야”
냅다 소리를 지르며 들어선 경찰서 사무실은 일순 조용한 정적이 흘렀다. 급히 고개를 숙이며 숨는 아버지의 모습을 케리가 먼저 발견하였다. 꼭 빚 받으러 온 빚쟁이처럼 으스대며 돈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는 모습은 가관이었다.

지난 장날 사준 어린이 양복, 모자, 가방 그리고 나비넥타이에 셔츠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그 아래로는 밑이 터진 내복 차림이니 제법 쌀쌀한 날씨 탓에 시퍼렇게 오그라진 고추는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를 치면서 큰 개까지 사무실을 휘저으니 아버지도 어쩔 수 없이 돈을 주셨다. 동료 아저씨들도 덩달아 동전 몇 푼을 보태주시니 수입이 제법 쏠쏠하였다.

수금 같지 않은 수금이 끝나고 깍듯이 인사를 하고 나오니 그제서야 사무실에 와르르 하고 웃음꽃이 피었다. 사연인즉, 전날 저녁술에 취해 들어오신 아버지께서 가게에 새로운 장난감이 들어왔다고 하셨는데 그걸 사달라고 조르며 어리광을 부렸다. 내일 아침 돈을 주겠다고 약속을 받은 뒤에 그냥 출근해 버린 일을 따지러 온 것이었다.

차돌이란 이름도 해방 직후 할아버지께서 차돌처럼 단단하고 건강하게 자라도록 지어주신 아명이었다. 열악한 환경 탓인지 연달아 돌 전에 형을 둘씩이나 먼저 보내고 난 뒤였다.

그래서 나는 본의 아니게 5대 종손이 되었다. 케리는 나하고 같이 자란 셰퍼트 종류의 개인데 키가 나보다 더 컸다. 우리 집에서는 유일한 내 친구이자 쫄병이었다.
그러나 먹어대는 양이 우리 네 가족보다 많았다. 얼마 후 아버지 친구 과수원의 파수꾼으로 팔려갔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약 한 달간을 외로운 투쟁과 함께 심통을 부렸었다.

중간에 철조망을 뚫고 20여리를 달려온 케리와 극적인 해후가 두 번이나 있었지만, 나이보다 다소 이르게 내가 교회 부속 유치원을 가게 됨에 따라 곧 잊혀지게 된 것 같다.

그러나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같이 다니던 뒷집의 못생긴 영순이가 나비처럼 나풀나풀 춤을 추며 내게 무용을 같이 하자고 했을 때, 정수리부터 찌르르 하는 느낌에 다시는 춤을 추지 않았던 일이 생각 난다.

그 길로 유치원도 작파하였다. 그런 연유 에서인지 장성해서 어른이 된 뒤에도 나는 보신탕을 먹지 않았다. 자꾸만 어릴 적 친구였던 케리의 냄새가 나서 차마 먹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작정하고 무용이나 춤을 배워본 적이 없다. '그냥 기분 좋게 취하면 적당히 몸을 흔들면 되지' 라고 생각했다. 스탭을 밟고 손을 흔들 때면 그 못생긴 영순이의 손짓이 생각나서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들을 둘씩이나 잃은 어머니에게 이웃집 할머니가 권유하는 대로 인근 유명 사찰 칠성각에서 백일 기도 끝에 얻은 것이 바로 나 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어머니는 가끔 “너는 나중에 커서 개고기 보신탕을 절대 먹지 말아라” 라고 당부를 하시던 일이 뇌리에 남아 있다. 하지만 직장 생활 중에 주변의 강권으로 몇 번의 시도를 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 곳에만 가면 남들이 맡지 못하는 특유의 개 비린내가 진동을 하여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구석진 자리에서 처량하게 삼계탕을 먹고 있는 나를 동료들은 놀리고 조롱했지만, 내심 어릴 적 친구였던 케리의 냄새가 나는 고기 몇 점을 먹는 것 보다는 더 낫다는 기분으로 위안을 삼곤 했다.

누구에게나 어린 날 추억의 편린(片驎)이야 다 있을 테지만, 유난히 거칠 것 없이 자랐던 시골의 유년 생활이 내게는 큰 훈장처럼 자랑스럽고 소중하다.
지금은 다들 떠나고 껍데기만 남은 고향이지만, 그래도 어린 날의 모습과 부모님의 선영이 있는 소중하고 귀한 나의 보물과도 같은 곳이 바로 그 고향이다.

개발이 늦은 탓에 오히려 청량감과 수려함을 자랑하는 그 곳, 문경은 내게는 더 할 수 없이 소중한 곳이고 서울 생활이 정리가 되면 언제든 돌아가야 할 곳이기도 하다.

시인, 수필가 김효진은
시와수상문학 시와 수필로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시와수상문학 작가회 회장을 역임하고 있으며 꾸준한 문학 사랑으로 많은 문인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저서 사집 ‘새벽 별을 걸고’ 2023년 제1회 정병국 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