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강향순 수필가] 칼바람이 불어온다. 날 선 기운이 맴도는데도 나무는 바람이 시키는 대로 몸을 뒤척일 뿐, 새들이 떠들어도 아무 말 않고 푸른 하늘을 우러르고 있다. 그런 나무를 보고 있으면 과묵하신 아버지가 생각난다. 나무가 우거진 숲길을 걸어본다. 나무가 없으면 산은 의미가 없다. 아버지의 후덕한 마음씨처럼 가슴에 강 같은 평화가 밀려온다.

해가 서산마루에 걸터앉아 있을 즈음이면 긴 한숨을 몰아쉬며 하염없이 노을 진 하늘을 바라보시던 아버지, 장대 같은 외아들을 가슴에 묻고 철없는 삼 남매를 키우고 있는 서른여덟 청상과부인 며느리가 가여워 감히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고 눈물만 하염없이 흘리시던 부정(父情)의 애틋함, 그 한 맺힌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을까. 논농사와 밤 농장을 억척스레 하셨던 것도 아들 잃은 슬픔을 견뎌 내기 위해 부러 몸을 혹사했던 것이리라.

가을 추수가 끝나고 나면 알밤이며, 햅쌀 등 이웃까지도 넉넉한 마음으로 나누어 주시며 후한 인심을 베풀어 주시곤 했다. 아들 집 지어 준다고 산에 삼나무와 편백을 심어 놓았지만, 아버지의 꿈은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져버린 것이다. 비록 아들은 가고 없어도 아버지는 끝까지 산을 지키려 애를 쓰셨다. 아마도 가슴에 묻은 아들과의 약속을 지켜주기 위한 사랑의 힘이 아니었을까.

시부모님도 아들 곁으로 떠나고 그 자리를 홀로 딛고 종갓집 종부로 살아온 지 어언 사십삼 년이다. 그런 나에게 모든 걸 흔쾌히 내어주신 아버지의 믿음이 있었기에 나는 살아갈 용기가 생겼고 자식 삼 남매를 키우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살면서 어떤 일에 처했을 때도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이겨낼 용기가 솟았고 사람의 도리를 지키며 살아야 한다고 나를 향해 타이르고 다짐하기를 반복했다.

아버님은 경주 김씨 38대 장남으로 태어났다. 대를 잇고 싶어 하는 부모님의 바람을 저버릴 수 없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모님의 뜻에 따라 이듬해 한 살 연상인 어머니와 결혼을 했다. 스무 살에 첫아들을 보았다. 금이야 옥이야 키운 외아들을 나와 결혼시켰고, 가끔 며느리인 나와 외출이라도 하는 날에는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가 아닌 남매지간으로 볼 만큼 다정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아버지 나이 오십이라지만 키도 헐 칠한 미남인 데다가 동안이었으니 서른 살 며느리를 남매로 착각할 수밖에.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살자던 맹세를 한 줌 미풍으로 날려버리듯 남편은 서른아홉 젊은 나이에 위암 발병 6개월 만에 어린 삼 남매와 나를 남겨두고 저세상으로 홀로 이 떠나갔다. 그때 내 나이 서른여덟, 큰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 둘째가 2학년, 막내이자 종손인 아들이 여섯 살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했던 시절이었다. 창졸간에 남편을 잃은 나의 슬픔도 컸지만, 자식을 앞세운 두 분의 심정이 오죽했으랴. 아니 그보다도 어린 손녀, 손자 삼 남매와 청상과부가 된 며느리의 처지가 더 기가 막혔을지도. 부모는 죽으면 뒷산에 묻고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고 했던가. 생때같은 자식을 잃고도 억장이 무너지는 슬픔을 내색도 못 하고 가슴으로 눈물만 쏟아냈으니 그 한 많은 생을 어찌 살았을까. 아들을 가슴에 묻은 탓인지 아버지는 칠십에 어머님은 같은 해 6개월 간격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아들 곁으로 떠나갔다.

지금까지 내가 종갓집 종부로서 그 어려운 역할을 다할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조상님이 지켜주신 은덕인지도 모른다. 여섯 살이던 종손인 아들과 함께 아버지의 의지를 받들어 문중 어른들과 함께 경주 김씨 38대 종부와 종손의 도리를 다하고자 나는 지금도 경주와 서울을 오르내리고 있다. 종손인 아들은 대기업 연구원으로,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장녀는 약사로, 막내는 미대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 가 공부해서 지금은 일본의 모기업에서 당당한 직장인으로 인정받고 다닌다. 잘 자라주는 자식들은 내 삶의 든든한 버팀목이었고 내가 살아가는 힘이 되어 주었다. 남은 숙제가 있다면 세 아이 모두 좋은 인연 만나 알콩달콩 사는 보는 그 날을…

세월은 어김없이 오간다. 벌써 내 머리에도 서리가 내려 어느덧 부모님 나이가 되었다. 그 긴 세월을 어찌 살았는지 내가 생각해도 가슴 시린 세월이었던 듯싶다. 겁도 없이 종갓집으로 시집간 것도 그렇지만 밑으로 시누이가 여섯 명이나 있는 집으로 시집을 간 걸 보면 나의 무모했던 청춘도 사랑을 빙자한 오만한 객기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나는 내가 살아온 세월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내 고단했던 삶을 누가 알아줄까마는 그 사람을 만난 것도 전생의 인연이었을 터, 이 또한 부모님 사랑과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아이들도 엄마인 나의 말을 잘 따라 주었기에 이만큼의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음이 아니런가.

아버님, 어머님의 온화한 성품처럼 나도 자식들 가슴에 좋은 부모로 기억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식들 뜻을 존중해주고 나의 주장을 내려놓고 살아야 할 것 같다. 아무리 좋은 조언이라 해도 번복해 말하면 잔소리로 들리기 마련이니 말하기보다 들어주는 기쁨을 누려야 하리니.

수필가 강향순은
한국수필로 등단, 한국수필가협회ㆍ한국수필작가회 회원이며 은평문인협회 백일장 대회 우수상 수상했다. 나를 닮은 그릇(공저)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