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문민순 수필가] 여름이 알차게 영글어간다. 여름방학이 다가오면 외갓집 그 작은 고샅길이 생각난다. 어릴 적 외갓집은 내가 항상 가고 싶어 하던 그리운 곳이었다. 영광 법성포 근처에 있는 외갓집은 바로 눈앞에 바다가 있고 그 앞으로 가마미해수욕장이 있었다. 얼마나 가고 싶은 마음이 컸든지 방학이면 엄마를 졸라 외할머니집을 가고 싶다고 안달하듯 조르곤 했지만 무슨 연유인지 바쁘다는 핑계로 우리 자매들을 보내주지 않았다. 외할머니는 손맛까지 좋아 해주는 음식마다 내 입안을 황홀경에 빠지게 했다.

큰이모는 군산에 살았고 둘째 이모는 서울에 살았다. 장가를 간 막내 삼촌이 외할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삼촌 부부는 누이인 엄마에게 매씨매씨 하며 살갑게 굴었다. 우리 집을 올 때마다 엄마가 좋아하는 박대며, 서대, 새조개를 영광어시장에서 직접 가져와 밥도 같이 먹고 저녁 늦게까지 놀다 가곤 했다.

어느 해 여름, 군산에 사는 사촌 언니가 우리 자매를 초대했다. 대지 위로 쏟아져 내리는 햇살이 뜨거운 욕망처럼 대지를 달구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군산에서 삼일을 사촌 언니와 지내다가 있다가 우리는 영광 외갓집으로 가기로 약속을 했다. 사실 이모네 보다는 외갓집에 간다는 기쁨이 훨씬 컸다. 처음 본 군산은 거리도 비교적 깨끗했고 사람들도 여유로워 보였다.

월명산 공원에 올라가 멀리 바라본 장항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금강의 야경과 푸른빛이 감도는 서해는 한 폭의 그림 같았고 유난히 반짝거리는 불빛의 화려함은 풍요로운 거대한 왕국 같았다. 은빛 싱싱한 갈치, 알이 통통하게 밴 꽂게를 손질하던 이모의 손맛은 지금도 입안에 침샘을 자극한다. 그 시절 조달청에 다니던 사촌 언니는 금전적 여유가 있었는지 우리 언니와 내게 원피스 한 벌씩을 맞춰 주기도 하고 수영복도 사주고 용돈도 주었다. 친절하고 자상한 사촌 언니의 배려가 그때는 마치 천사처럼 보였다.

우리는 약속대로 외갓집이 있는 영광으로 향했다. 엄마가 살았던 곳이라 생각하니 친근감이 더했다. 개량되지 않은 초가지붕 위에는 커다란 박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늘진 담벼락 너머로 능소화 넝쿨이 기운차게 발돋움을 하고 있었고 그 옆으로 피었다가 져버린 나팔꽃이 입을 앙다문 체 시들시들 사위어 가고 있었다.

난생처음 먹어보는 하얀 박나물 맛은 담백하기는 했지만, 기대만큼 감동의 맛은 아니었다. 지붕 위에 주렁주렁 매달린 박과 하얀 박꽃에는 내가 모르는 아름다운 정서가 담겨 있는 듯했다. 그래서 박꽃을 월하미인(月下美人)이라 했을까.

뻘이 많고 넓지 않은 해수욕장은 내가 처음 가본 곳으로 그런대로 해수욕장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넓고 푸른 바다는 아니었지만, 물이 빠지고 나면 조개도 줍고 낙지도 주워가며 온몸에 뻘을 묻히곤 했다. 어느 날은 뜨거운 모래사장을 맨발로 뛰어다니며 철없는 웃음을 드넓은 바다에 방산하는 재미에 빠져 저물녘까지 놀기도 했다.

외할머니는 언제나 깊은 속옷 꼬쟁이에 돈을 담아두고 다녔다. 더운 날 아이스크림이라도 사 먹으라고 우리에게 돈을 줄 적마다 녹음기 틀 듯 엄마 말 잘 들으라는 당부를 빼놓지 않았다. 거기다 손수 만드신 쓰기에도 아까운 수예 소품들을 주었다. 한쪽 한쪽 이어 만든 상보, 동전을 담을 만은 작은 주머니, 바느질할 때 쓰는 골무 등등 할머니의 야무진 손끝이 들어있는 그런 것들이었다.

나는 외할머니가 주신 그때의 소품들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가 결혼할 때 몇 점 가져오기도 했다. 지금도 그것들을 보고 있으면 할머니의 투박한 사랑과 외갓집의 정겨운 풍경이 가슴 가득 피어오른다.

우리 자매는 지금도 만나면 외할머니와 외갓집 이야기를 자주 하곤 한다. 그 정을 잊지 못해 엄마가 돌아가신 날에는 영광 근처 펜션으로 형제자매가 모여 어린 시절의 그리움을 삭인다. 눈이 많이 내리는 날에는 예정도 없이 하루 더 묵고는 못다 한 이야기꽃도 피우고 캠프 파이어도 해가며 기타를 치고 어머니가 좋아하던 노래를 부른다. 가끔 늦게 조카들도 합류해 우애를 다지기도 한다.

자연은 우리에게 편안함을 가져다준다. 서해안의 낙조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우리가 묵는 숙소 바로 앞에 낙조 전시관이 있어 다양한 구경거리가 된다. 외갓집 추억은 나이를 먹어도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정서가 담겨 있어 그리움을 솟게 한다.

수필가 문민순은
한국수필로 등단.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한국수필작가회 이사이며 한국수필 제5회 독서문학상 대상 수상했다. 마침표가 아닌 쉼표, 4번선 없는 기타ㆍ사랑에는 향기(공저)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