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강향순 수필가] 발신인이 표시되지 않은 택배가 왔다. ‘광양농산물센터’라고만 적혀있다. 누구일까? 아는 얼굴들을 떠올려본다. 순간 번개처럼 정겨운 얼굴이 떠오른다. 분명 그 친구일 터, 나의 예감에 확신을 얻고는 전화를 걸어 다짜고짜 울 안에 가두듯 단정에 찬 믿음에 압정을 꽂는다.

“범인은 바로 너지?”

전화기를 타고 들려오는 맑은 목소리가 흐뭇한 기쁨으로 다가온다.

“단감을 먹다 보니 아삭아삭 달고 맛있어 네 생각이 나서 보냈어. 통 안에 넣어 김치냉장고에 두었다가 입맛 없을 때 무라.” 그녀의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가 낯익은 인정처럼 들린다.

친구가 보낸 대봉감을 상자에 담아 그늘에 놓아두었더니 자연스럽게 농익어 홍시가 되어 꿀맛처럼 달달하다. 거기다 고구마 맛은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만큼 입안 가득 꿀 버터를 발라 놓은 듯 향기가 넘친다. 친구가 베풀어준 안락한 행복과 배부른 기쁨을 나는 과연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인가. 내가 친구에게 해준 것은 아무것도 없는 듯하여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론 미안한 마음이 인다.

부산에 사는 친구 경숙이는 오지랖이 넓을 만큼 인정이 많다. 5년 전, 내가 전원생활을 할 때, 친구는 건강이 안 좋아 열흘쯤 우리 집에 내려와 쉬었다 간 적이 있다. 이후 계절마다 그 고마움을 잊지 않은 듯 정성과 마음을 담아 이것저것 보낸다. 아직 완쾌 판정을 받지 않은 상태인데도 건강한 나까지 생각해 게 이렇게 보내오고 있으니 오지랖이라고 할 수밖에. 받는 만큼 나를 빚쟁이 만든다고 억지를 부려보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계절의 전령사들을 내게 배송하곤 한다.

봄이면 머위 순, 취나물, 두릅 순 같은 산나물들을 보내고, 여름이면 토실토실 살이 오른 광양 매실을 보내고, 가을이면 알알이 익은 햇과일과 농산물을 보낸다. 이렇게 보내온 것마다 그냥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듬고 씻고 손길을 가야 하는 것들이라 나는 투정하듯 귀찮으니 그만 보내라고 부러 엄살을 떤다. 그럴 때마다 ‘너 노는 꼴 보기 싫어 일거리 보내는 것’이라며 재미있는 듯 키득키득 웃는다. 그 정성스러운 따뜻한 마음을 내 어찌 모를까. 사랑과 우정을 넣고 만든 고추장 맛처럼 우리의 관계도 달콤하고, 매콤하고, 짭짤한 진국인 것을.

경상도, 전라도를 오가며 나를 챙겨주는 친구 경숙이에게는 나만이 느끼는 시간의 향기가 난다. 아니 오래 묵어 곰삭은 냄새인지도 모른다. 오랜 시간 쟁여 놓은 아름다운 우정의 냄새다. 첫눈 오는 날, 옆구리 시려할 나를 위해 근사한 노신사라도 보낸다는 약속은 아직도 공수표를 날리고 있지만, 그녀의 진실한 마음만은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변함이 없다.

아파트 생활하느라 남새밭 한 뼘도 없는 도심에서 무농약 채소에 고등어 김치찜과 나물까지 맛있게 무친 것도 모자란 건지 아예 된장국까지 끓여 한상차림을 보내오기도 한다. 입맛이 까다로운 우리 아이들도 솜씨 좋은 엄마 친구 덕에 외식하는 기분으로 먹는 것 같다며 손맛의 진미를 즐긴다.

친구가 보내온 단감 속에는 그리움 한 자락이 묻어나 있다. 문득문득 눈앞에 어른대는. 그 사람이 생각나 가슴이 먹먹해진다. 소개팅으로 만나 데이트할 적에 그는 과일 중 감을 유난히 좋아했었다. 뭐랄까, 시골 트기 같은 천진함과 순박한 모습이 내게는 친근하고 정스럽게 느껴졌다. 많고 많은 과일 중, 시골 아무 데서나 흔하게 먹을 수 있는 감을 좋아하는 걸 보면 영락없는 촌사람이다. 가끔 놀리듯 촌부로 살지 뭣 하러 도시에 사느냐 물으면 쓰다 달다 말없이 미소만 짓던 사람이다. 성품도 단감처럼 둥글둥글하고, 비 오거나 바람 불어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내게 사랑의 온도를 채워주던 남편, 먼저 간 그곳에도 단감이 주렁주렁 풍년이었으면 좋겠다.

따뜻한 봄이 오면 친구와 함께 공기 좋은 곳에서 한달살이라도 하면 좋을 것 같다. 곁에 있는 친구 남편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볕 좋은 봄날, 둘이 손잡고 지리산 둘레길이나 걷자고 해야겠다. 5년 전 갑사 가는 길을 매일 같이 운동 삼아 걸어 다녔다. 친구가 항암치료를 받고 있던 때라 아프고 힘든 산책길이었다. 지금은 거의 회복되어 가는 단계라 마음이 놓이지만, 몸 사리지 않고 오지랖을 더 해 가는 걸 보면 고맙고 대견하고 뿌듯하면서도 안쓰럽고 가여워 가슴이 저려온다.

수필가 강향순은
한국수필로 등단, 한국수필가협회ㆍ한국수필작가회 회원이며 은평문인협회 백일장 대회 우수상 수상했다. 나를 닮은 그릇(공저)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