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강향순 수필가] 장마철로 접어들면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진다. 비 오는 날은 집안일 하기에 딱 좋은 날 같다. 계절이 바뀌었는데도 미루기만 한 옷 정리에 손을 대기로 한다. 옷장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숨이 콱콱 막힐 정도로 옷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욕망과 게으름의 결과물이다. 옷들을 과감하게 분류하기로 하고 2년 동안 한 번도 입지 않은 옷에서부터 유행이 지난 것까지, 버릴 것과 남겨둘 것의 기준을 정한다.

버릴 것으로 첫 번째는 옷의 질감이 좋지 않은 것부터 내놓는다. 두 번째, 색이 무겁고 칙칙한 색을 골라놓는다. 셋째, 착용감을 고려해 입고 벗기 불편한 것을 골라낸다. 옷을 살 때 나는 소재의 질감을 우선순위로 본다. 감이 좋아야 피부에 닿아도 몸이 편안하고 건강에도 좋기 때문이다. 나이 탓이런가, 언제부터인지 밝고 환한 색깔에 눈이 간다. 입고 벗기가 불편한 것은 옷이 나를 입은 것 같은 구속감이 들어 자유롭지 못하다. 버릴 것을 내놓으니 산더미를 이룬다. 나의 취향에 맞는 옷들을 골라 정리해 두고 나니 옷장이 살짝 헐렁하고 깔끔해진 듯싶다. 하지만 아직도 버려야 할 것들이 많이 남아 있음을 어이하랴.

옷이란 입는 사람 취향에 따라 다르다. 남 보기에 과하지도 않고, 때와 장소를 가려 센스 있게 입는 사람을 보면 보기에도 좋고 부럽기도 하다. 남을 바라보는 시선은 열려 있음에도 정작 나 자신 패션의 기준은 무모하기 이를 데 없다. 사치스러운 것에서부터 보잘것없는 것에 이르기까지 옷치장에 대해서는 대충 나 편하면 그뿐, 특별히 신경 쓰지 않는다.

옷에도 스토리가 있어 쉽게 정리할 수 없는 게 있다. 내가 가장 아끼는 옷으로는 큰아이가 첫 월급으로 사준 체크무늬 재킷이다. 10년 넘은 옷이지만 색깔도, 질감도 좋지만 오래 입은 것인데도 전혀 낡아 보이지 않는다. 뭐랄까, 딸아이의 뽀송뽀송한 마음이 겹쳐 있어 그런지 쌀쌀한 날 입으면 포근하고 따뜻하다.

자주 입지 않지만, 소장 하고 싶은 옷도 몇 벌 있다. 추억과 그리움이 함께 하는 옷이라 지금껏 버리지를 못하고 옆에 끼고 산다. 그중에는 시어머님 칠순 기념으로 동네 바느질 잘하시는 한재골 아지매께 부탁해 선물 받은 모시 적삼이 있다. 그 옷에서는 어머님 미소가 담긴 치자 꽃 냄새가 난다. 마땅히 입을 일도 없을뿐더러 손질도 많이 가는 옷이다. 디자인 또한 어머니 세대에 맞춘 것이라 나이 들어 입으리라 간직하고 있었는데 아직 한 번도 입을 기회를 찾지 못한 채 그대로 보관하고 있다. 어머니도 떠나가고 없는 지금, 이제 이 나이에 모시 적삼을 입어도 어색하지 않을 듯한데도 왠지 선뜻 용기를 내지 못한다. 올여름에는 풀 먹여 손질해 입어볼까 생각을 해본다.

또 다른 옷 하나, 남편이 35년 전에 사준 무스탕 반코트다. 퇴근길에 갑자기 전화해서 나보고 사줄 게 있으니 백화점으로 나오라고 했다. 어린것들을 어떻게 하고 나가느냐 했더니 잠깐 앞집 할머니께 맡기라는 것이었다. 밍크코드를 할인해 판매한다고는 했지만, 가격표를 보니 만만치가 않았다. 비싼 것도 걸리는 데다가 내 눈을 사로잡을만한 디자인도 없었다. 그때는 무스탕이 한참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결국, 브라운 톤의 무스탕 반코트를 선택했다. 자기 옷도 겸연쩍어 못 사던 사람이 아내의 옷을 사준다니 참으로 천지 괴벽할 일이었다. 그런 남편의 마음이 고맙기도 하고 기분이 좋아 나는 주책없이 자다가도 일어나 무스탕 코트를 입고 패션쇼를 하듯 방안을 한 바퀴 돌기도 했다. 그런 나를 보며 그는 뿌듯한 듯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나 역시 남편이 좋아하는 것을 보며 함께 웃었는데, 그게 마지막 선물이 될 줄이야.

옷장 정리를 하다 보니 이런저런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함께 쇼핑을 즐기던 친구들도 떠오른다. 옷에 꽂혀 서로 경쟁하듯 옷에 집착했던 시절이 있었다. 같이 쇼핑하다가 똑같은 옷을 사들였다가 모임 날 같은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박장대소한 적도 있었다. 같은 옷을 입었어도 팔등신인 미옥이가 입은 옷은 명품 같아 보였고 마르고 키 작은 내가 입은 모양새는 마치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처럼 후질 근해 보였다. 친구와 비교당하는 일처럼 부끄러울까, 그땐 정말이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웃지 못할 촌극이었다.

그때 그 친구들 모두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미숙이는 여전히 멋쟁이겠지. 아니면 헐렁하고 편안한 옷차림에 손자, 손녀 재롱떠는 재미에 우리가 부러워하던 그 아름다운 몸매가 부서진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옷에는 관심 없이 살고 있을는지도. 그동안 무심히 지낸 친구들이 옷을 보니 문득 보고 싶고 그리워진다. 다들 건강해야 할 텐데, 더 늦기 전에 수소문해서라도 패션쇼 한번 열어봐야겠다.

이제는 다들 그때처럼 옷 입은 멋도 안 난다고 투덜대겠지. 아니 옷 차려입고 밖에 나가는 것도 귀찮아할지도. 멋 내기보다 지금의 나처럼 편안한 옷차림을 선호할는지도, 나이 탓인지 몰라도 이제는 사람도 옷도 익숙해져 편안한 게 좋다. 정리해 내놓은 옷가지를 묶어 헌 옷 수거함에 쏟아붓고 나니 막혔던 속이 풀린 듯 후련하다. 그동안 아까워 버리지 못하고 채워 놓기만 했으니 그 무게의 짐을 온몸으로 짊어지고 살았던 듯싶다. 이제부터라도 비우고 내려놓는 습관을 생활해야 하리니.

수필가 강향순은
한국수필로 등단, 한국수필가협회ㆍ한국수필작가회 회원이며 은평문인협회 백일장 대회 우수상 수상했다. 나를 닮은 그릇(공저)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