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타임즈=박원명화 수필가] 또다시 다가온 12월, 한 장 남은 달력 앞에 낙엽귀근(落葉歸覲)이란 말을 새삼 떠올린다. 세상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자연은 이치대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바쁘고 복잡한 세모의 물결이 출렁인다. 백화점에서부터 작은 시장 골목에 이르기까지 네온 장식과 대형트리가 반짝이고 상점에서는 징글벨이며 화이트크리스마스 노래가 울려 퍼져 가슴을 설레게 한다. 한해를 떠나보내야 하는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훈훈한 축제의 마당을 벌이는 것처럼 보인다.

송년의 술잔으로 회포의 정을 풀어내는가 하면 온정의 손길을 재촉하는 구세군의 종소리는 빈자의 가슴을 따뜻하게 감싸준다. 잘못 판단하고, 잘못 결정한 수많은 회한의 껍질이 가슴속에 수북이 쌓여있는 걸 보면 즐거웠던 날도 많았지만 주름진 날도 많았던 듯싶다. 알고도 하고, 모르고도 하고, 잘하려고 한 것이 남의 마음에 상처를 주기도 했다. 한해의 끝자락에 이르러서는 지나온 시간을 습관처럼 산 것에 놀라고 바보처럼 산 것에 후회를 한다. 누군가 억지로 등 떠민 것도 아니고 나 스스로 다짐해 놓고 매년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게 얼마던가. 그래서인지 지나온 시간이 더 아쉽고 더 소중한 것 같다.

연말을 보낼 때마다 나는 잘한 것보다 잘못한 것에 대해 생각하고, 성찰하고, 용서를 구한다. 하지만 생각만큼 말과 행동엔 반성의 기미가 없는 듯하다. 누군가에게 잘못을 빌고 용서를 구하는 게 쉽지 않듯 진심을 다한 청정심을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거기에는 내 알량한 자존심의 콧대를 세우는 데 있다. 마음으로는 참회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매번 그게 잘 안 된다. 특히 가족이거나 가까운 이들에게는 민망하고 쑥스러워 자꾸만 머뭇거리게 된다.

나이를 의식할 겨를 없이 그렁저렁 바쁘게 사는 것도 이제 습관 된 지 오래다. 내 나름의 방식에서 성실히 땀 흘리며 살아왔다고 자부를 하지만 되돌아보면 남겨진 자취는 없고 잘 살았다는 확신도 서지 않는다. 새롭게 시작하는 연말연시의 분위기랄까. 마음은 청춘인 듯 나만의 착각에 빠져 할 일은 산더미처럼 싸놓고 그저 달리기 선수처럼 앞으로만 달려가려 한다.

정해진 틀 안에 갇혀 그렁그렁 살던 습관은 정작 내가 소망하던 일들을 뒷전에 미루어 놓기 일쑤다. 어쩌면 나이 탓도 있겠다. 젊을 때보다도 세상 물정에 어두운데다가 일의 능률도 생각만큼 성과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꽃띠인 듯 마음속 욕망은 쇠퇴할 줄을 모른다. 무조건 탐내고 무조건 취하고 싶어 안달하니 나 스스로 돌아봐도 내가 측은하단 생각이 든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 대해 전적으로 만족할 순 없다. 겉으론 제법 강인한 듯 하지만 실상 나는 뒤끝이 굳건치 못한 편이다. 매사를 내 잣대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편이어서 인화가 부족하다는 말도 더러 듣는다. 노력은 해보지만 남과 잘 어울리는 마음의 주인이 되기까지 아직도 더 많은 수양을 쌓아야 할 것 같다.

시작할 때는 세상 모두가 언제나 빛나 보이고 희망이 넘친다. 새해를 맞이해 긍정적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가리라 다짐해본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바쁘게 덤벙거리다 귀한 시간을 풍선처럼 떠나보내고 뒤늦게 후회하는 습성부터 고쳐야 할 것 같다. 나 자신을 반성하고, 겸손을 배우고, 내가 지킬 수 있는 용량만큼만 설계하고 실천하기를 약속해 본다. 벼른 마음이 행여 흐트러질세라 이번에는 가슴에 압정까지 단단하게 꽂아둔다.

새해 새 아침, 가까운 지인들에게 첫인사로 「복 많이 지으시고, 건강하세요」라는 축원을 띄워 보내리라. 받는 기쁨보다 짓는 기쁨이 더 크다는 마음으로~.

수필가 박원명화는
2002년 한국수필로 등단.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수필가협회 사무총장이며 제9회 한국문인협회 작가상ㆍ연암기행수필문학상ㆍ제39회 일붕문학상을 수상했다. ‘남자의 색깔, 길 없는 길 위에 서다, 풍경’ 외 수필집 다수.